신의비서 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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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8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의비서 45화
제8장 화설린 (1)
조윤은 밤늦게까지 탑의 지붕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탐라가 왜 여기에 자신을 놔두고 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시야가 탁 트인 높은 곳에 있으니 기분은 좋았다.
“내려오너라.”
탐라가 부르자 조윤은 조심조심 밑으로 내려갔다.
“저기, 스님.”
“왜 그러느냐?”
“거기에서 뭐를 해야 합니까?”
“네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이곳으로 오기 전, 조윤은 당황학에게서 탐라에 대해 들었었다. 수행이 깊고 깨달음이 높아서 인근에서는 생불(生佛)이라고까지 불린다고 한다. 그런 탐라가 시키는 일이었다. 분명 뭔가 의미가 있었다.
다음 날도 조윤은 탑의 지붕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할 게 없어서 운기조식을 하다가 멀뚱멀뚱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끝없이 펼쳐진 세상이 보였다.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그런가?’
자신이 여기에서 떨어져 죽는다고 해도 멀리 보이는 저 산은 그대로일 것이다. 땅도 그대로일 테고, 하늘도 그대로일 것이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위 사람들은 어떨까?
슬퍼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주 잠시일 테고 곧 잊힐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언젠가는 죽어 없어진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문제들이 전부 별것 아닌 것처럼, 의미 없이 느껴졌다.
저 넓은 세상에 비하면 자신은 한없이 작은 존재였다. 아등바등 고민하고 있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깨달음이었다. 세상에 자신을 대입함으로써 인간사가 모두 하찮게 여겨지니, 그만큼 생각이 커졌다는 뜻이었다. 조윤은 그제야 탐라가 왜 여기에 자신을 놔두고 갔는지 알 것 같았다.
저녁이 되자 탐라가 왔다. 이에 조윤은 지붕에서 깨달은 것을 이야기했다.
“제가 너무나 작게 느껴졌습니다. 그러자 제가 안고 있던 근심과 걱정, 번민도 모두 별것 아니게 생각되었습니다.”
“너는 반도 못 얻었다. 내일도 올라가거라.”
탐라가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름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건만 반도 못 얻었다고 한다.
도대체 얼마나 더 대단한 걸 얻어야 하는 걸까?
다음 날도 조윤은 탐라가 시키는 대로 또다시 지붕에 올라갔다. 삼 일이나 되었고, 나름대로 약간의 깨달음이 있어서인지 처음에 왔을 때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다만 아직도 뭘 더 얻어야 한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에 멍하니 앉아서 탁 트인 전경만 바라봤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조윤은 매일 아침 일찍 올라가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때가 되면 가져다주는 걸로 배를 채우고 해가 지면 내려왔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세상이 얼마나 큰지, 그것만 절실히 와 닿을 뿐이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다.”
“이참에 좀 푹 쉬세요.”
“그러마.”
“갔다 올게요.”
조윤은 당황학이 탕약을 모두 마시는 것을 확인하고 탐라와 함께 탑의 지붕으로 향했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당황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쪽에 놔둔 검을 들고 숙소 앞의 공터로 나갔다. 그는 최근 비연팔식의 마지막 비기를 완성했다.
조윤이 없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자니 무수히 많은 생각이 들었고, 그 와중에 상승의 경지로 가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에 그동안 생각하고 연구해 오던 것을 정리해서 드디어 비기를 완성한 것이다.
당황학은 그걸 비연이라고 이름 붙였다. 비연이라는 단어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평생의 숙원을 이뤘으니 이제 그걸 조윤에게 전하는 일만 남았다. 한데 지금의 몸 상태로는 어려웠다. 이에 며칠 전부터 몸의 감각을 일깨우고 있었다.
늙고 병든 몸으로 머릿속에 있는 비연팔식의 마지막 비기를 끄집어내려면 움직여야 했다. 그럼에도 단 한 번, 딱 한 번뿐이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조윤은 총명하고 이해력이 남다르니 그 한 번으로도 반드시 익힐 수가 있을 것이다.
저녁때가 되어 조윤이 오자 당황학은 처음으로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뭔가를 얻었느냐?”
조윤은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자신이 작은 존재라는 것만 느껴질 뿐, 다른 깨달음은 전혀 없었다.
“따라오너라.”
숙소를 나온 당황학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조윤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딱 한 번만 보여줄 것이다. 그러니 잘 기억해 뒀다가 네 것으로 만들어라.”
“네.”
“비연팔식의 일곱 번째 초식이자 네 번째 비기인 비연(飛燕)이다.”
당황학은 가만히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단전의 기운을 끌어올려 검에 실었다.
웅!
마치 움직이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검이 울었다. 그러자 소매와 장포가 크게 부풀어 오르면서 머리칼이 흩날렸다. 바람 한 점 없건만, 내공이 밖으로 뿜어져 나오면서 생기는 압력 때문이었다.
그때 당황학이 눈을 떴다. 그리고 땅을 박차는가 싶더니 어느새 허공에 떠올라 몸을 회전시키고 있었다.
훙!
검과 몸에서 새 모양으로 뭉쳐진 기운이 날아오더니 한쪽에 있던 바위를 박살 내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조윤은 뭐가 뭔지 몰라 눈만 깜빡거리다 곧 크게 감탄했다. 비연팔식의 마지막 비기는 놀랍게도 검기를 다루는 것이었다.
하나 단순한 검기가 아니었다. 원래 검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형태도 없다. 그런데 방금 당황학이 보여준 비연은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한 형태와 색을 띠고 있었다. 이는 그만큼 위력이 강하다는 뜻이었다. 빗맞은 바위가 흔적도 없이 부서진 것이 그 증거였다.
강호를 통틀어 그런 경지에 다다른 자는 몇 명 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보았느냐?”
“예? 예. 봤습니다.”
“할 수 있겠느냐?”
아직 걷지도 못하는데 뛰라는 것과 같았다. 비연참이나 비연섬, 그리고 비연폭이 걷는 것이라면 비연은 뛰는 것이었다.
“제겐 너무 높은 경지입니다.”
“요지는 파악했느냐?”
“전혀요.”
“생각이 일면 마음이 움직이고, 그럼 기가 따른다. 의지에 따라 기가 움직일 때가 되어야 비로소 내공을 마음대로 쓸 수가 있다.”
당황학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설명했다.
“그렇게 심기(心氣)가 일체가 되면 검이 더 이상 이질적이지 않게 느껴지고, 네 손의 연장이라 생각될 것이다. 그럼 손에 기를 보내듯이 검에도 흘려 넣을 수가 있게 된다. 의지와 기가 하나가 되고, 기와 검이 하나가 되며, 검과 기(技)가 하나가 되어 움직이면 그것이 바로 신검합일(身劒合一)이다.”
당황학은 내공의 활용 방법과 무공의 상승 이론을 계속 알려줬다. 조윤은 그러한 것을 처음 배우는 거라 최대한 집중하며 들었고, 그 때문에 당황학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한창 듣고 있는데 갑자기 설명이 뚝 끊기자 그제야 당황학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사부님.”
“괜찮다.”
검을 놓고 앉아 있던 당황학이 미소 지었다. 전해줄 것은 다 전해줬다. 그걸 얼마만큼 이해하고 어디까지 터득할지는 온전히 조윤의 몫이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당황학의 맥을 잡아보니 이곳에 올 때보다 상태가 더 좋지 않았다. 그동안 약을 먹으면서 푹 쉬었다면 이럴 리가 없었다. 비연을 보여주기 위해 무리한 것이 분명했다.
“탐라선사에게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었느냐?”
“아니요.”
“하루만 더 해보고, 안 되면 떠나자꾸나.”
“안 됩니다. 지금 몸 상태로 여행을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내 여정은 여기까지지만 너는 아직 남아 있지 않더냐? 조금 더 너와 함께하고 싶구나.”
처음에는 참 모질고 독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겉으로는 냉정해도 속은 따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는 것이 고마웠다. 지금까지 엄하게 이끌어 줬기에 그 힘든 시기를 다 이겨낼 수가 있었다.
조윤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조금 더 그래 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 * *
“어째서 안 가는 거냐?”
“나중에 갈 거예요.”
당황학이 묻는 말을 한쪽 귀로 흘리면서 조윤은 계속 약을 달였다. 그러자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 때문에 네 수련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약을 먹는다고 내가 얼마나 좋아지겠느냐?”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는 낫겠죠.”
조윤이 고집을 부리며 대답하자 당황학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달이고 있는 약은 탐라에게 부탁해서 어렵게 구한 약재로 만들었다. 당황학이 먹으면 조금은 기운을 차릴 수가 있었다.
오후 늦게까지 약을 달인 조윤은 당황학에게 그걸 먹이고, 탑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주위를 내려다보다가 이리저리 몸을 풀었다.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서 약을 달이느라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다 지붕 끝으로 갔다. 거기에서 한 발만 잘못 디뎌도 끝장이었다. 그만큼 아찔한 높이였다. 한데도 이상하게 겁이 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어제 봤던 비연과 당황학의 건강이 더 신경 쓰였다. 이에 잠시 비연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검을 뽑아서 휘둘렀다.
비연은 허공에 떠서 몸을 수직으로 회전시키며 검을 휘두르는 초식이었다. 검기를 쏘아내는 것은 어림도 없었고, 지붕 끝에서 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했다. 그런데도 조윤은 비연을 펼치고 가볍게 착지했다. 그저 흉내를 낸 것에 불과했지만 뭔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시원하니 바람이 불어오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뭘까, 이 여유는?
“세상이 나이고, 내가 곧 세상이다.”
스스로 말해놓고도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윤은 막혔던 것이 확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비연상승!”
백아가 호선을 그리며 위를 쳤다. 이어서 비연하강을 펼치자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그 상태에서 쿵쾅거리며 달려가다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비연참!”
파앙!
무지막지한 검압이 공기를 강하게 밀어내며 파공음을 냈다. 지붕 끝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디딘 조윤은 뒤로 날아올라 비연섬을 펼쳤다. 그러자 얇은 백색 섬광이 어둠을 뚫고 길게 선을 남겼다. 이어서 비연폭을 펼치자 한순간에 세 번이나 휘둘러진 백아가 반월형의 섬광을 연속으로 그렸다.
마지막은 비연이었다. 조윤은 통통거리는 공처럼 연속으로 튀어 오르며 검을 휘둘렀다. 한 번 하기도 힘든 비연을 그리하는데도 숨이 차지 않았다. 오히려 몸에 활력이 돌았다. 단전에 있는 기운이 사지를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쿵쾅거리는 소리 때문에 지붕으로 올라온 탐라는 그걸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야 다 얻은 게로군.”
세상에 비하면 사람은 정말 작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사람이기에 알 수가 있었다.
조윤은 그동안 세상과 하나가 되어 자신을 바라봤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한없이 작고 보잘것없이 느껴졌던 것이다.
한데 이제는 다시 자신이 중심이 되어 세상을 보고 있었다. 다만 예전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내가 아니라 세상을 품고 있는 거대한 나라는 것이 달랐다.
탐라는 조윤이 그러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 그렇지 않다면 한 발만 삐끗해도 떨어져서 죽는 저 높이에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칼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