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비서 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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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8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의비서 37화
제5장 남독신의 (1)
아미파를 나온 조윤은 당황학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사천을 벗어나 운남을 지나칠 때부터 점점 더워지기 시작하더니 밀림이 우거진 남만에 도착하자 숨을 쉬기에도 거북할 정도가 되었다.
“여기가 남만인가요?”
“그래.”
남만은 원래 지역 이름이 아니라 남쪽 지방에 살던 부족을 통틀어 칭하는 말이었다.
중원인들은 한족이 주를 이뤘고, 주변의 종족들은 전부 오랑캐로 치부했다. 이에 동쪽에 있는 이들을 동이(땜夷)라 불렀고, 서쪽은 서융(西戎), 북쪽은 북적(北狄), 남쪽은 남만(南찬)이라 불렀다.
“사람이 살 것 같지는 않은데요.”
“내 기억이 맞는다면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나올 게다.”
남만에 오는 건 몇십 년 만이라 이미 마을이 없어졌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마을은 건재했다. 당황학과 조윤은 거기에서 하루를 푹 쉬고, 독곡(毒谷)으로 향했다.
독곡은 당문만큼이나 독을 잘 쓰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흔히들 중원에는 당문이 있고, 새외에는 독곡이 있다고들 한다.
당황학은 독곡으로 가는 동안 독에 대한 걸 가르쳐 줬다. 주로 독의 종류와 그에 대처하는 방법이었는데, 목숨과 직결되는 거라 조윤은 깊이 새겨들었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당자기가 들려줬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천하오대신의 중 한 명이 남만에 사는데, 특이하게도 독으로 병을 치료한다고 했었다. 이름도 들었었지만 오래되어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부님, 혹시 독으로도 병을 치료할 수 있나요?”
“불가능하지는 않다. 뛰어난 의원들은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이치로 병을 치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독제독은 독으로 독을 치료한다는 뜻이었다. 당황학의 말대로 의술이 뛰어난 의원들은 그러한 방법을 쓸 때가 있었으나 위험이 커서 흔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치료에 쓴다지만 독은 독이었다. 자칫 그 상성이 맞지 않거나 양이 조금만 많거나 부족해도 오히려 해가 된다.
“예전에 들은 건데, 남만에 그렇게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 있다던데, 당자기 사부님 말로는 천하오대신의 중 한 명이랬어요.”
“글쎄다. 나는 근 십여 년 동안 죽림원에서 지냈기 때문에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독곡 사람들은 독술이 뛰어나니 그런 사람이 있다 해서 이상할 건 없지.”
“사부님도 가능하나요?”
“당문은 독술을 치료에 쓰지 않는다. 대신에 의술을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는 다 하지 않더냐?”
생각해 보니 그랬다. 독술은 사람을 죽이는 기술이다. 위험을 안고 굳이 치료에 쓸 이유가 없었다.
“당자기 사부님이 예전에 가주님과 겨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당문이 독을 버리고 의가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랐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힘들겠죠?”
조윤은 말이 나온 김에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러자 당황학이 당시의 일을 기억해 내고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 일을 말하는 거구나. 모르는 사람들은 당자기가 당문을 의가로 바꾸기 위해 그랬고, 가주가 그 뜻을 꺾었다고만 알고 있지.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그게 맞다. 하지만 당시에 그렇게까지 일이 커지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단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가주에게는 딸이 두 명 있다. 장녀는 너와 정혼을 한 아이이고, 또 한 명은 음…… 그렇지, 이름이 당효주로구나. 혹시 본 적이 있느냐?”
“아니요. 단목세가가 그렇게 되어서 그때는 정신이 없었어요.”
“그랬구나. 알았다고 해도 쉽게 만나기는 어려웠을 게다. 그 아이는 날 때부터 불치병에 걸렸었다.”
“어떤 병인데요?”
“구음절맥이라고 들어봤느냐?”
“아니요.”
“구음절맥이란 말 그대로 아홉 군데의 맥이 막혀 있는 것을 말한다. 여자는 선천적으로 양기보다는 음기가 강하다. 한데 그게 막혀 있으니 어떻겠느냐? 구음절맥은 치료가 불가능해서 대부분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맥이 막혀 있다면 내공으로 뚫을 수 있지 않나요?”
“불가능하다. 막힌 혈을 뚫으려면 막대한 내공이 필요한데 어린아이들은 혈맥이 얇고 약해서 그걸 버티지 못한다. 당사자가 내공을 수련해서 뚫는 방법이 있지만 그 역시 혈맥이 막혀 있어서 안 되지.”
“그럼 만약 막대한 내공이 있고, 혈맥을 다치지 않게 뚫을 수 있다면 가능하겠군요.”
“이론상으로는 그렇지. 하나 막힌 혈을 뚫으려면 웬만한 내공으로는 어림도 없다. 적어도 일 갑자(甲子) 이상의 내공이 필요하다.”
일 갑자면 육십 년이었다. 그 긴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아 온 내공을 전부 소모하면서 치료를 하려면 부모라고 해도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 가능성마저 희박했고, 오히려 아이가 죽을 수도 있었다.
당황학의 말대로 불치병이라 봐야 했다. 그러나 조윤은 어쩐지 치료가 가능할 것 같았다. 명확한 이유는 없었으나 현대 의학이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되었다.
“당시에 가주가 그 아이를 치료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다. 천 리 길을 마다 않고 유명한 의원들을 데리고 오기도 했고, 무공의 고수들을 찾아가서 부탁을 하기도 했지. 그러나 모두들 고개를 저으며 돌아갔었다. 그때부터 가주는 의술을 등한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자기와 싸우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당자기가 의가로 거듭나자고 하자 그럼 당효주를 치료해 보라고 했단다. 명의들도 어쩌지 못한 병을 그가 어떻게 치료할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그런 대결을 한 거군요.”
“그래. 가주가 살아 있는 동안은 당문이 의가로 바뀌는 일은 없을 게다.”
조윤은 당수백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그도 하연이의 병을 고치고자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깟 병 하나 치료 못하는 의학을 부정하면서도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매달릴 것이 의학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아직도 살아 있나요?”
“모르겠구나. 하나 살아 있다고 해도 어차피 오래 살지는 못할 게다.”
조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독곡의 입구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바로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였다. 사시사철 이렇게 독무(毒霧)가 가득해서 일반인들은 접근할 수가 없었다.
“독 안개다. 안에 진법이 설치되어 있어 섣불리 들어가서는 안 된다.”
“그럼 어떻게 들어가요?”
“잠시 기다리면 사람이 나올 게다.”
당황학의 말대로 그 자리에 서서 잠시 있자 독 안개 속에서 희끄무레한 인영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독과 진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지 멀쩡했다.
“누구요?”
“나는 당문에서 온 당황학이라고 하오. 곡주를 만나고 싶어서 왔소.”
“당문? 잠시만 기다리시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만에 다시 나왔다.
“곡주님이 허락했소. 따라오시오.”
그가 앞장서자 당황학과 조윤이 뒤를 쫓아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가 가는 길을 따라 독 안개가 좌우로 갈라지며 흩어졌다.
“신기해요.”
“진법의 위력이다.”
앞서 가던 사내가 웃으면서 이야기해 줬다. 그는 당황학에게는 불친절했으나 조윤을 보는 눈은 따뜻했다.
독 안개가 조금씩 옅어지면서 완전히 없어지자 양쪽으로 깎아지른 것 같은 협곡이 나타났다. 그리고 놀랍게도 벽에 집이 수십여 채나 지어져 있었다.
사내는 벽에 나 있는 길을 따라 그중 유독 큰 집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울 줄 알았는데, 곳곳에 횃불이 밝혀져 있고, 그 비싸다는 야명주까지 천장에 박혀 있어 의외로 굉장히 밝았다.
대청에 도착하자 정면의 상좌에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노인이 보였다. 이곳 독곡의 곡주인 만담이었다. 그는 다소 귀찮다는 표정으로 당황학을 봤다.
“오랜만이오, 곡주.”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그대로군. 반갑지가 않아.”
“오랜만에 찾아왔거늘 문전박대를 하려는 거요?”
“흥! 그랬다면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지도 않았겠지. 무슨 일로 온 건가?”
“제자와 함께 강호를 유람하다가 그대 생각이 나서 잠시 들렀소.”
“클클. 그 어린놈이 제자인가? 보아하니 그 녀석을 수련시키기 위해서 온 거로군.”
“그런 뜻도 있으니 부정하지는 않겠소.”
“그냥은 안 되지. 조건이 있네.”
“말하시오.”
“독곡의 골칫덩이 중에 기라라는 놈이 있네. 그를 집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 조건일세.”
“그대가 하면 되지 않소?”
당황학이 묻는 말에 만담이 작게 웃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이렇게 조건으로 내걸 이유가 없었다.
기라는 독곡에서 독을 가장 잘 썼다. 심지어 곡주인 만담보다 더 뛰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독을 다루는 데 남다른 재능을 보이더니 약관이 넘어서는 당할 자가 없었다. 그가 독을 써서 죽이고자 하면 누구든 죽었다. 그러다 중년이 되어서는 독으로 병을 치료하는 경지에까지 오르자 사람들은 그를 남독신의(南毒神醫)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천하오대신의 중 한 명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싫으면 돌아가게.”
“아니오. 하겠소. 그를 집 밖으로만 데리고 나오면 되는 거요?”
“그렇지. 무슨 수를 쓰든 끌어내기만 하면 되네.”
“그는 어디에 있소?”
“먼 길 왔을 텐데 하루 정도 쉬는 것이 어떤가?”
“먼저 그를 처리한 후에 쉬겠소.”
“좋군. 그를 기라에게 안내해라.”
만담의 명령이 떨어지자 여기까지 안내했던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이쪽으로 오시오.”
밖으로 나온 사내는 절벽에 나 있는 길을 따라 이리저리 가더니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집 앞에서 멈췄다.
“여기요. 험! 위험하니 아이는 여기에 있는 것이 어떻소?”
“괜찮소.”
당황학이 딱 잘라 거절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조윤이 사내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고마움을 표하고 뒤따라갔다.
“헉!”
안으로 들어간 당황학은 크게 당황하며 조윤을 밖으로 밀어냈다. 얼결에 집 밖으로 날아간 조윤은 하마터면 절벽 아래로 떨어질 뻔했으나 다행히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붙잡아 줬다.
“괜찮으냐? 쯧, 그래서 놔두고 가라 한 건데.”
“고마워요. 그런데 왜…… 욱!”
말을 하던 조윤은 배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을 참지 못하고 토하기 시작했다. 사내가 그런 조윤의 등을 몇 번 두드려 주고 약을 하나 내밀었다.
“이걸 먹어라.”
“이게 뭐죠?”
“해독약이다.”
“해독약이요?”
“그래. 기라는 항상 집 안에 독을 풀어 놓는다. 그래서 내성이 없는 사람들은 잠시도 있지 못하지. 어서 먹어라. 안 그럼 속이 뒤집어질 거다.”
“네, 고마워요.”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걸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되지만 나쁜 뜻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약을 받아서 삼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배 속이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이름이 뭐냐?”
“조윤이요. 아저씨는요?”
“나는 이보라고 한다.”
그렇게 통성명을 할 때였다. 갑자기 문이 박살 나면서 당황학이 튕겨 나왔다.
“사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