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11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67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11화
슬쩍 그를 쳐다본 유진생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구나.”
이 양반이 왜 또 이래?
장천운은 난데없는 유진생의 사과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동안 들은 바에 의하면, 유진생은 외고집에 성격이 괴팍해서 남에게 사과하는 일이 없다고 했다. 물론 수련생들에게는 사과할 사람도 아니었고.
그러니 갑작스런 사과가 더욱 불안하게 느껴질 수밖에.
“저는 괜찮습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른이 사과하면 받아줘, 인마.”
유진생은 툭 내뱉고는, 자신이 생각해도 머쓱한지 하늘만 쳐다보았다.
절벽 위로 떠오른 달이 유난히 밝았다.
장천운은 그제야 유진생의 말이 진심이란 걸 알고 별일이다 싶었다.
“사실 저도 너무 뻣뻣하게 나갔죠. 흑도건달 주제에…….”
“흑도건달이 어때서?”
“솔직히 자랑할 일은 아니잖습니까.”
“나도 흑도 출신이야. 너처럼 날건달로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랬나?
의외였다. 절정고수인 유진생이 흑도 출신이라니.
“합비 흑화방(黑華幇)의 당주였지. 그런데 스물다섯 살 때 스승님을 만나서 인생이 바뀌었다. 비록 고생은 많이 했지만, 십년쯤 지나서 절정고수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까.”
“대단하시군요. 나이 들어서 절정고수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던데요.”
“그거야 노력 여하에 달린 일이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같은 흑도 출신이라고 하자 왠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며칠 전까지 죽도록 고생시킨 사람이거늘.
“그래서 말인데…….”
유진생이 말꼬리를 늘이며 장천운을 직시했다.
장천운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가 말했다.
“나한테 주먹질 하나 배워볼 생각 없냐?”
“주먹질이요?”
“그래. 지난 삼백 년 동안 아무도 익히지 못한 주먹질이지.”
“아무도 익히지 못한 걸 어떻게 배웁니까?”
“다른 사람은 익히지 못했지만 너는 익힐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다. 내가 지금까지 가르친 수련생 중에 너보다 신체조건이 나은 놈을 보지 못했거든.”
신체조건 뿐만이 아니다. 머리도 좋은 듯했다. 자존심 때문에 말은 안 했지만.
“대체 어떤 주먹질인데 절정고수인 교관님이 익히지 못하신 겁니까?”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없지만, 옛날 옛적에는 악마의 권법이라고 했지. 정식 이름은 혼천수라권(混天修羅拳)이고.”
“이름 괜찮은데요?”
단순한 칭찬 한마디에 유진생의 표정이 밝아졌다. 생각보다는 순진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어때, 배워볼 생각 있냐?”
“그걸 배우려면 고생 좀 하겠죠?”
“조금은. 그래도 너라면 견뎌낼 수 있을 거다.”
아무래도 뭔가를 숨기는 표정이다. 하긴 오죽했으면 제대로 익힌 사람이 없을까?
‘조금이 아니라 엄청나게 고생할 것 같군.’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고생이라면 이골이 난 그였다.
절정 경지의 무공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정도 고생쯤이야.
“가르쳐 주신다면 열심히 익히겠습니다.”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던 유진생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때 장천운이 물었다.
“저번 일, 삼조장 때문에 그러신 겁니까?”
움찔한 유진생이 잠시 장천운을 바라보더니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굳은 표정으로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당분간은 잊어라. 그놈, 독사 같은 놈이다. 아직은 네가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야. 더구나 백리호가 그놈을 항상 주시하고 있다. 나중에, 힘을 얻은 다음에 혼내줘도 충분해.”
***
강련곡에 들어온 지 일 년이 지났다.
이제는 장천운에 대한 관심이 멀어져서 그를 흑도 출신이라고 비웃는 사람조차 없었다.
성적은 중간 정도.
사실 이조의 여자들이 육체적인 능력에서 떨어지는 걸 생각하면 꼴찌에서 두세 번째라는 말이었다.
장천운보다 점수가 낮은 남자 수련생은 유고원과 삼조의 곽풍이라는 자뿐.
오히려 이조의 여자 수련생 중 류화와 이능능은 무공에 탁월한 소질이 있어서 장천운보다 점수가 높았다.
그 바람에 장천운과 유고원, 곽풍은 졸지에 ‘여자보다 못한 놈들’이 되었다.
하지만 장천운은 실망하지 않았다. 실망은커녕 무척 만족했다.
단 일 년 만에 선두권과의 차이가 눈에 띌 정도로 좁혀진 것이다.
‘이젠 따라잡는 일만 남았군.’
***
언제부턴가 장천운은 수련만 끝나면 시도 때도 없이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어떤 때는 고개까지 숙이고 있어서 영락없이 조는 것처럼 보였다. 가끔은 그런 자세로 너무 깊이 생각하다가 정말로 졸기도 했고.
이전의 장천운과는 완전히 딴판인 모습.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쯔쯔쯔, 처음에 너무 고생해서 신경과 머리에 이상이 생긴 것 같군.
-일 년 넘게 무리했으니 몸이 견딜 수가 없지.
-나는 처음부터 저럴 줄 알았다니까. 멍청한 자식.
-흑도 새끼가 별 수 있어?
그들은 상상도 못했다. 장천운이 눈을 감고서 의식 저편에 있는 무공초식의 조각을 하나, 하나 꿰어 맞추고 있다는 걸.
게다가 장천운이 피곤하게 보이는 것은 밤늦게 수련하는 혼천수라권 때문이었다.
아직은 공력이 약해서 기초만 익히는데도 온몸의 뼈마디가 녹아버리는 듯했다.
어찌나 힘든지 배우겠다고 한 말이 후회될 정도였다.
하지만 장천운은 오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악착같이 혼천수라권을 익혔다.
그까짓 권법 하나도 익히지 못한다면 어떻게 남 위에 설 수 있을 것인가!
“이봐, 십팔호. 또 조냐?”
장천운이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벽에 기대고 앉아 있자 구산이 놀려댔다.
게슴츠레 눈을 뜬 장천운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졸은 게 아냐. 수련을 한 거지.”
“꿈속에서 말이지?”
“그래. 해보니까 그런 방법도 괜찮더군.”
“뭐? 푸하하. 졸면서 수련한다는 사람은 처음 보는군.”
“너도 한번 해봐.”
“됐다. 나는 꿈속에서 수련하는 것보다 실제로 하는 게 더 좋아.”
“근데 무슨 일 있어? 다 어디 갔지?”
“저녁식사 하러 갔다. 그냥 계속 졸게 놔두려다가 불쌍해서 깨운 거야.”
구산이 혀를 찰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하고는 방을 나갔다.
정말로 졸았나?
장천운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무공을 익히는 것도 배를 채운 후의 일이었다.
‘덩치는 곰처럼 커다란 놈이 그래도 인정은 있다니까. 백리여우보다 훨씬 나아.’
***
“조장, 십팔호를 더 주시할 필요가 있을까?”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장천운을 주시하던 단수인이 백리우진에게 말했다.
“나는 저놈이 갑자기 변한 게 더 마음에 걸려.”
“처음에 너무 고생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겠지.”
“그럴 놈이었으면 처음부터 관심을 갖지도 않았어. 좌우간 계속 주시해 봐.”
“조장이 하라니까 하긴 하겠는데…… 솔직히 괜한 짓 같아. 여귀에게도 형편없이 깨지는 놈을 왜 신경 쓰는 거지?”
“판단은 내가 하는 거야. 너는 시키는 대로만 해.”
“알았어.”
싸늘한 백리우진의 목소리에 단수인은 목을 움츠리며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지미, 저딴 놈을 뭐 하러 감시하라는 거야?’
대답은 했지만 정말로 감시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놈 때문에 수련시간을 허비해봐야 자신만 손해였다.
백리우진은 멀어지는 장천운의 등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장천운만 생각하면 기분이 더럽게 찝찝했다.
유진생과의 두 차례에 걸친 대결 때도 그랬고, 최근에 본 시험만 봐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다른 수련생들에게 항상 지는데, 단수인의 말처럼 형편없이 깨지는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차이. 그저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정도.
장천운은 항상 그렇게 졌다.
‘실력을 숨기고 있는 건가?’
장천운이 유진생에게 권법을 배우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혹독하게 대한 것을 사과하는 의미에서 몇 수 가르쳐주는 거라 했다.
그 정도로는 갑자기 실력이 늘 수 없었다.
유진생이 절정고수라 하나 그 정도 고수는 널리고 널린 곳이 구천성이다.
그에게 배운다한들 얼마나 대단한 무공을 배우겠는가.
‘정 안 되겠으면 기회를 봐서 정리해 버려야겠어.’
***
온 세상이 시커멓게 물든 자정 무렵.
강련곡의 구석진 곳에서 북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파팡!
동시에 어둠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시커먼 그림자의 주인은 장천운. 그의 맞은편에 우뚝 서있는 사람은 유진생이었다.
어둠을 뚫고 장천운을 바라보는 유진생의 눈빛에는 경악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십초를 겨루었다. 당연하게도 자신이 이겼다. 하지만 그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수가 없었다.
장천운이 만약 팔꿈치를 한 치만 더 틀었다면 그의 팔꿈치 끝에 자신의 턱이 걸렸을지도 몰랐다.
‘설마 그 자세에서 그런 공격이 가능하다니.’
혼천수라권을 배운지 단 일 년. 초식은 이제 자신이 더 가르칠 것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는 비무하는 것조차 꺼려졌다.
아차 실수라도 하면 한방 맞게 생긴 판이었으니까.
“흠, 비무수련은 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정확도와 타격지점에 힘을 집중하는 것만 꾸준히 수련하면 되겠어.”
장천운은 일격을 당한 어깨가 욱신거렸다. 다른 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아쉬움이 컸다.
‘살짝만 더 틀었으면 한방 먹였을 텐데.’
지금까지 비무라는 명분하에 셀 수도 없이 두들겨 맞았다. 그래도 최근에는 많이 나아져서 서너 대 맞는 게 고작이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맞지 않고 버틸 수 있을 듯했다. 오늘처럼 기회가 오면 한방 성공할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런데 비무수련을 그만한다고?
비무수련이 힘들더라도 그냥 끝낼 수는 없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이 맞았는데! 한대는 때려봐야 할 것 아냐?
속이 좁다고 욕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사람들도 유진생의 돌주먹을 일 년 동안 맞아보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아직은 초식이 서툽니다. 교관님께서 손봐주실 곳이 많습니다. 좀 더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비무를 안 하는 대신 옆에서 지켜보며 미숙한 점을 교정해주마.”
“그래도 혼자 수련하면 아무래도 긴장감이 떨어져서 발전이 더디지 않겠습니까? 힘들더라도 비무수련을 조금 더 했으면 싶습니다.”
그 말도 옳았다.
혼천수라권은 극한에 이른 실전적인 권법이다. 혼자서 수련하는 것보다는 비무수련이 훨씬 더 효과가 컸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비무수련을 한 것 아닌가.
고민하던 유진생은 일차 수련을 마칠 때까지만 더 도와주기로 했다.
설마 그 안에 무슨 일이야 있겠어?
“좋다. 그럼 이제부터는 사흘이 아니라 닷새에 한 번씩 비무를 하도록 하자.”
그날로부터 한 달쯤 지나서 일차수련을 보름 남겨놓았을 때였다.
양태악이 유진생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 교관, 눈두덩이 왜 그렇게 멍든 거요?”
“별 일 아니네. 신경 쓰지 말게나.”
“누구에게 맞았소?”
“별 일 아니라니까!”
“허어, 꼭 주먹에 한 대 맞은 것 같은데요?”
“자넨 신경 끄게!”
유진생은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어서 짜증난 표정으로 홱 몸을 돌렸다.
양태악은 웃음을 겨우 참고 방을 나갔다.
그도 알고 있었다. 유진생이 장천운에게 권법을 가르친다는 걸. 어제가 수련 날이었다는 걸.
‘크크크크, 방심했다가 그놈에게 한 대 맞은 모양이군.’
물론 장천운은 그 대가로 훨씬 많이 맞았겠지.
어쨌든 파양마권 유진생이 이제 갓 열여덟 살이 된 수련생에게 맞았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긴 이 년 전 새끼건달로 있을 때도 사밀령 사령주의 이마를 찢은 놈인데…….’
그뿐인가? 처음 비무 때도 유진생의 목을 친 놈이다.
방심하면 언제 당할지 모르는 놈.
양태악은 그렇게만 알았다.
그가 어찌 알까, 최근 며칠 동안 유진생이 장천운보다 더 많이 맞았다는 걸.
***
일차 수련이 열흘 남았을 때부터는 더 이상 단체 수련을 하지 않았다.
휴식기간이라고나 할까?
장천운은 잘 됐다는 듯 아예 구석에 처박혀서 끙끙거리며 몽중무의 구결을 떠올렸다.
그런데 봄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던 날 오후. 백리우진이 단수인과 도양문을 데리고 혼자 있는 그를 찾아왔다.
“십팔호, 잠깐 이야기 좀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