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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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16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20화
소성주는 반시진이 되기 전에 무화원으로 돌아갔다.
장천운도 나름대로 즐겁게 성 내를 누비고는 본래의 위치로 복귀했다.
그로부터 일각쯤 지났을 때였다.
방안에서 차를 마시던 소성주의 하얀 면사가 바람도 없는데 펄럭였다.
거기다 맑은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어지면서 눈가에 가느다란 주름이 그어졌다.
소연추가 그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성주 사마경이 웃고 있다.
그것도 가식적인 웃음이 아니었다. 소리 내서 웃고 싶은데 참고 싶은 표정이 역력했다.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웃음인가.
한 달? 반 년?
소연추는 그 웃음의 원인을 떠올리고 자신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오늘 기분이 좋으셨어요?”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사마경의 눈가 주름이 사라지고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독고민 때문에 버렸어.”
“그래도 장천운이 서궁을 멋지게 상대했잖아요.”
“그건 좀 괜찮았어.”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독고민과 서궁이 누군지 알 텐데도 그렇게 대하다니요.”
“나야 속이 시원한데, 그래도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 것 같아.”
“그럼 그를 수혼대에서 내보내라고 할까요?”
소연추가 넌지시 그렇게 말하자, 사마경이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그런 사람 하나쯤 있어도 나쁠 건 없을 것 같아.”
“하긴 그가 말을 조금 심하게 하긴 했어도 틀린 말은 아니었죠.”
“맞아. 그는 잘못 말한 게 없어. 그런데 그가 정말 동겸의 이를 부러뜨린 거야?”
“사실인가 봐요. 듣기로는, 동겸이 입을 벌리면 앞니가 없어서 시커먼 속이 다 보인다고 해요.”
“큭.”
사마경이 외마디 웃음을 터트렸다.
그 소리를 듣고 소연추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웃는 것도 오랜만이지만, 저렇게 순수한 웃음소리는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자신이 그런 웃음소리를 냈다는 게 멋쩍은지 사마경이 표정을 추스르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두 사람이 왜 싸운 거야?”
소연추는 그 일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서 이능능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그때 일을 잘 알겠구나. 상세히 말해봐라.”
“예, 선자.”
이능능은 장천운과 동겸의 싸움이 발생한 원인부터 결과까지 입에 기름칠 한 것처럼 쉬지 않고 말했다.
“……그때 동겸의 이와 갈비 몇 개가 나가서 동겸은 결국 강련곡을 나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십팔호는 강련곡의 뇌옥에 육 개월 동안 갇혀 있었지요.”
사마경은 흥미가 없는 것처럼 담담한 표정이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그러고는 이능능의 설명이 끝나자 한마디 했다.
“제법이네? 별 볼일 없는 흑도 출신이라고 하던데 동겸을 그렇게 만들다니.”
“운이 좋았어요, 소성주. 마구잡이로 휘두른 주먹이 동겸의 급소에 맞는 바람에 동겸은 제대로 대항도 할 수 없었거든요.”
그 말에 소연추가 정색하고 말했다.
“동겸은 부친과 스승에게 상당 기간 무공을 배운 사람이다. 당시 그의 나이가 스물이 넘었으니 일류고수 수준은 되었을 걸? 그런 사람이 마구잡이 주먹에 급소를 맞아서 대항을 못했다고?”
“당시 사람들은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어요. 십팔호는 저에게도 질 정도였거든요.”
“너에게 졌다고?”
“예, 선자. 머리는 꽤 영리한데 무공은 강하지 않았어요.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흑도 건달로 살아와서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우지 못한 상태였거든요. 처음 들어왔을 때도 기껏해야 길거리 삼류무사 수준이었어요.”
“그게 사실이냐? 열여섯 살짜리 삼류무사가 삼년 만에 동겸을 그렇게 만들었단 말이지?”
“제가 어찌 선자께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그때였다. 사마경이 묘한 눈빛을 지으며 조금은 차갑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자 말대로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야. 그리고 보기보다 영리해.”
“왜 그렇게 생각하신 거예요, 아가씨?”
“그 많은 사람들을 속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잖아.”
“그건 그러네요.”
이능능은 그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을 닫았다.
장천운과 직접 비무를 해본 적 있는 그녀로서는 사마경과 소연추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소성주에게 대놓고 반박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당시의 상황을 보지 않았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뭐.’
***
그날 저녁. 우문각은 구천무원에서 한 사람과 마주앉았다.
“아무래도 고위간부 상당수가 그와 연결 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위 간부들이?”
“그렇습니다, 성주. 명령을 내려주신다면 몇 명을 은밀히 잡아들여서 사실을 밝혀낼까 합니다.”
“간부 몇 명이 협조한다 해서 그가 정말 나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보는가?”
우문각은 눈을 들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었다면 굳이 성주께 말씀드릴 것도 없이 제 선에서 처리했을 겁니다.”
그의 앞에는 백색과 청색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비단 장포를 입은 사십대 중반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덩치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당당하게 앉아 있는 그의 전신에서는 만인을 앙복게 하는 절대의 위엄이 자연스럽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가 바로 대 구천성의 성주. 천하제일세의 주인인 천궁마신 사마중천이었다.
“자네 말이 사실이라 해도 당장은 어떻게 할 수가 없네. 죄도 없이 간부들을 심문하면 반발이 무척 심할 것이야.”
“이대로 놔두면 더 심하게 곪을 것입니다. 반발이 심하더라도 단숨에 제거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자네 말도 옳네. 하지만 의심이 간다 해서 무작정 간부들을 잡아들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제가 어찌 그걸 모르겠습니까, 성주.”
“하면 다른 방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예, 성주.”
“말해 보게.”
우문각은 말하기 전에 먼저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후에 할 말의 파장이 워낙 커서 자신을 먼저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깊은 호흡으로 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힌 그는 신중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놈들을 어둠 속에서 끌어낼 수만 있다면 단숨에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말인가?”
“소성주를 이용한다면 놈들의 모습을 밖으로 드러나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사마중천의 굳어진 표정이 급격하게 차가워졌다.
“그 일은 불가(不可)하네.”
“성주.”
“안 돼. 이제 겨우 마음을 추스른 아이네. 더구나 이제 열여덟 살이야.”
“저도 소성주를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가슴 아픕니다. 하지만 놈들만 밖으로 드러나게 만들면 되니 별 위험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호할 테니…….”
“그래도 안 되네. 어미를 잃고 어릴 때부터 소성주라는 무게에 짓눌려서 살아온 아이야. 나는 절대 그 아이를 이용할 수 없네. 다른 방법을 찾아보게.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거야.”
“하오나 성주…….”
“자네의 마음을 모르진 않아.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네. 자넨 지금 나에게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말하고 있어. 나는 절대 허락할 수 없네.”
사마충천이 워낙 강력하게 거부하자 우문각도 자신의 의견을 더 주장하지 못했다.
말한다 해서 들어줄 사마중천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다.
‘너무 성급했나?’
하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암중의 흐름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그들을 파악한다 해도 이미 늦었을지 모른다.
때를 놓치면 천추의 한을 남길 터.
그런 생각에 불허할지 모른다는 걸 알고도 말했거늘, 사마중천은 요지부동이었다.
‘어쩌면 힘든 시절을 보내야할지도 모르겠군.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할 지도…….’
우문각은 씁쓸한 마음을 추스르며 한발 물러섰다.
“제가 어찌 성주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정 그러시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보겠습니다.”
그제야 사마중천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힘들겠지만 수고해 주게.”
***
말 몇 마디로 벽호당주 서호의 아들인 서궁의 기를 꺾은 이후부터 수혼대원들의 장천운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래봐야 ‘별 볼일 없는 놈’에서 ‘재미있는 놈’으로 바뀐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새파란 애송이 취급하는 것보다는 나아서 장천운은 즐겁게 받아들였다.
“어디 가나?”
장천운이 수혼대 거처를 나서서 밖으로 향하자 강초가 물었다.
“조장님께 부탁해서 시간 좀 얻었습니다. 친구들 좀 찾아보려고요.”
“조심해. 자네에게 이를 갈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래봐야 자기 이만 아프죠, 뭐.”
구천성의 정보를 총괄하는 첩밀각(諜密閣)에는 성의 무사들에 대한 정보가 모두 모아져 있었다.
소성주의 호위무사인 수혼대원들은 그 정보에 접근할 권한이 있었다.
장천운은 일단 첩밀각으로 가서 성 내의 무사들에 대한 정보부터 살펴보았다.
구천성 총단 내의 인원은 대략 사천여 명.
그 중 정식 무사가 삼천여 명이나 되었다.
다섯 권으로 된 두툼한 책에는 그 삼천여 명의 이름과 간단한 약력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장천운은 교육을 받을 때 그 중 간부급 인물에 대한 것을 달달 외운 터였다.
최근 들어서 가입하거나 이동한 간부들 몇 명을 제외하면 더 볼 것도 없었다.
간부들의 명단을 대충 훑어본 그는 말단 무사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두 번째 책을 반쯤 살펴봤을 때 눈에 익은 이름이 보였다.
‘여기 있군!’
추소철. 그가 풍혼단(風魂團) 무사 명단에 있었다.
무화원을 나선 장천운은 풍혼단으로 향했다.
‘구천성 내에 있으면서 보름이 넘도록 얼굴 한 번 못 보다니. 내가 생각해도 너무했군.’
추소철이 풍혼단의 무사가 되었다니 정말 잘 된 일이었다. 흑월회에 있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더니 그 자질을 인정받은 듯했다.
잠시 후.
풍혼단에 도착한 장천운은 몇 사람에게 물어서 추소철을 불러낼 수 있었다.
추소철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나오더니 장천운을 보고 석상처럼 우뚝 멈춰 섰다.
그도 잠시, 그가 환하게 웃으면서 뛰듯이 다가왔다.
“드디어 너를 만났구나.”
“잘 지내셨습니까, 추 대주님.”
추소철은 장천운이 과거의 명칭으로 부르자 피식 웃었다.
“자식, 남들이 들으면 웃는다.”
“흠, 이제는 정말 멋진 무사가 되셨는데요?”
무창 뒷골목에서나 알아주던 추소철은 이제 진짜 무사처럼 변해 있었다.
부드럽게 느껴지던 인상도 강인하게 변해 있었고, 뺨을 가른 희미한 칼자국이 날카로움을 더해주었다.
“말이라도 고맙다.”
“사실입니다. 제가 거짓말 못하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
“너도 유명해졌더군.”
“그래요? 이거 큰일인데요. 호위무사는 신분을 함부로 드러내고 다니면 안 되는데.”
장천운이 과장된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자, 추소철이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알더라. 경혼당 동 공자의 이를 뽑아낸 사람이 누군지.”
“아, 그거요? 그 작자가 못된 짓을 해서 옛날 솜씨 좀 발휘했죠.”
“동 공자가 사람을 잘못 건드렸군. 귀호를 건드리다니 말이야.”
장천운과 추소철은 풍혼단 남쪽에 있는 연무장을 거닐며 이런저런 추억을 되살렸다.
그렇게 일각쯤 흘렀을 때, 걸음을 멈춘 추소철이 장천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천운, 내가 필요하거든 언제든 불러라. 내 목숨의 반은 네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