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5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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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6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56화
‘이 놈 봐라? 내 눈을 똑바로 쳐다 봐?’
자신의 눈은 특이하게 회색빛이었다.
어떤 자는 ‘귀신이 씌운 눈’이라고 했고, 어떤 자는 ‘곧 죽을 놈의 재수 없는 눈깔’이라고도 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한 말은 ‘개 눈깔’이지만.
한 여름 몽둥이에 맞아죽은 개‧눈‧깔.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는 것. 자신을 두려워하며 피한다는 것.
아니, 어쩌면 재수 없는 귀신이 씌울까봐 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부모가 버린 갓난아이 때도 그랬고, 나이 칠십이 넘은 지금도 그랬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눈을 ‘저주 받은 개 눈깔’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런데 새파랗게 젊은 놈이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도 아무런 표정이 없다니.
‘어린놈이 제법이군.’
제법 정도가 아니라 매우 위험한 놈이다.
노인은 사마경을 바짝 잡아당기며 맞받아쳤다.
“흥! 이 절독곡의 입구는 기문진이 설치되어 있어서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 도둑이 아니고서야 왜 이곳에 들어온단 말이냐?”
“기문진은 보지도 못했습니다. 저희는 저 쪽 절벽을 타고 내려왔지요.”
그 말에 노인의 시선이 장천운의 다리로 향했다.
시뻘건 피로 얼룩진 다리가 찢은 옷 사이로 드러나 있었다.
“그럼…… 암연의 독지를 건너왔단 말이냐?”
암연(黯然)의 독지?
자신이 소성주를 업고 지나온 검은 독지를 말하나보다.
“저 뒤에 있는 시커먼 독지를 말하는 거라면, 그렇습니다. 소…… 아가씨를 업고 건넜죠.”
장천운은 ‘소성주’라는 호칭을 재빨리 ‘아가씨’로 바꾸었다.
노인의 정체를 모르는 이상 소성주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었다.
‘아가씨’라는 호칭에 사마경이 그를 힐끔 쳐다보는데 싫진 않은 듯했다.
“암연의 독지를 맨 몸으로 걸어서 건넜단 말이지?”
노인이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괴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렇습니다.”
“다리의 그 상처는?”
“독을 다리 밑으로 밀어내고 핏줄을 잘라서 독혈을 빼냈죠. 덕분에 퉁퉁 부었던 다리가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지금쯤 미치게 가려울 텐데?”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더 가렵군요.”
“머리끝이 쭈뼛 설 정도로 고통스럽기도 할 거고.”
“고통은 어릴 때부터 숙달이 되어서 견딜 만합니다.”
노인은 장천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로 도둑은 아닌 듯했다.
하긴 저 어린놈 말마따나, 어떤 미친 도둑놈이 뭐 훔칠 것 있다고 이곳에 들어오겠는가.
노인은 시선을 내려서 묘한 눈빛으로 장천운의 몸을 살펴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군. 아주 좋아.”
“뭐요?”
이 노인네가 미쳤나? 놀리는 거야, 뭐야?
장천운은 눈에 힘을 주고 노인을 노려보며 검을 살짝 뽑았다.
그러나 노인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장천운의 몸을 살펴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흐음, 아무래도 독을 잘 견디는 체질 같군.”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체질이니 지금 살아 있는 거다. 아니면 발이 썩어 들어가고 있을걸? 조금 지나면 결국 같은 결과가 나오겠지만.”
장천운은 가슴이 덜컥했다.
자신의 상태를 보기만 하고 추측하는 걸 보니 독에 대해서 잘 아는 듯했다.
그런 자가 말하지 않는가. 발이 썩어 들어갈 거라고.
“조금 전에 좋다고 하셨는데, 설마 제 발이 썩어가는 것 때문에 좋다고 하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물론 아니지.”
“그럼……?”
“먼저 하나 묻겠다. 다리에 스며든 독을 해독하고 싶으냐?”
당연히 해독하고 싶다. 사실 자존심 때문에 참고 있지만, 살을 파내고 싶을 정도로 가려웠다.
얼마나 가려운지 고통조차 떠올릴 정신이 없을 정도다.
게다가 이대로 놓아두면 썩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귀호의 자존심이 있지, 한번은 버텼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곧 독을 완전히 밀어낼 수 있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 그렇게 독혈만 빼서는 완전히 해독할 수 없다. 그저 몸이 썩어가는 시간을 늦춘 것뿐이지. 아마 속에서 서서히 썩어 들어가다가 독기가 골반까지 침범하면 대라신선이 와도 살 수 없을 거다.”
“정말…… 이에요?”
사마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왜 너에게 거짓말을 한다 말이냐?”
노인이 냉랭하게 대답하고 장천운을 직시했다.
“해독하고 싶으냐?”
“노인장이 제 몸속의 독을 해독하실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으니까 말한 거 아니냐?”
사마경이 두 사람 사이에 나서서 초조함과 기대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어서 치료해주세요. 예?”
“저놈이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부탁요?”
“그래, 부탁.”
“무슨 부탁인데요?”
“들어준다고 대답하면 말하마. 그리고 이 계집아이도 놓아주지.”
사마경이 장천운을 보며 말했다.
“천운, 들어준다고 해. 다리를 치료하는 게 먼저잖아?”
장천운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노인의 의도가 왠지 수상해 보여서 망설였다.
“훗, 내 부탁을 들어주다가 잘못된다 해도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노인이 비웃듯이 말했다.
장천운도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어차피 자신이 살지 못하면 사마경을 지켜줄 수도 없지 않은가.
‘아버지는 그래도 검화문 소문주를 지켜주고 돌아가셨는데…….’
제법 강한 자들 다섯을 죽였다고 했다. 아버지의 친구들은 아버지가 그렇게 강한 줄 처음으로 알았다고 했다.
어깨를 으쓱 추켜 올린 장천운은 찜찜한 마음을 털고 순순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부탁을 들어드릴 테니, 일단 아가씨부터 풀어주시죠.”
“네가 대답하면 풀어주마.”
“그럼 어서 물어보십쇼. 뭡니까?”
“간단한 거다. 일 년 동안 내 실험대상이 되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실험이 끝나면 피를 조금 빼줘라.”
실험대상? 피를 빼줘?
“정말 간단하군요.”
자세한 것은 묻지 않았다.
어차피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한다. 무슨 실험인지 미리 알아봐야 골치만 아플 뿐.
‘빌어먹을! 인생 참 드럽게 꼬이는군.’
그런데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마경이 물었다.
“실험 전에 해독부터 시켜줄 거죠?”
“물론이지.”
“고마워요.”
“대신 그 이후에 중독되어서 죽는 것은 나에게 책임을 묻지 마라.”
“예? 중독요? 왜요?”
“독을 실험하는 거니까.”
“…….”
‘제기랄!’
***
노인은 약속대로 사마경의 팔을 놓아주었다.
도망갈 걱정은 하지 않았다. 사마경은 언제든 다시 잡을 수 있고, 장천운은 독에 중독되어서 걸음을 걷는 것도 힘든 판이었다.
품속에서 옥병을 꺼낸 그는 마개를 뽑고 새카만 단환 두 알을 꺼내서 장천운에게 내밀었다.
“씹어서 삼켜라. 냄새는 좀 고약하지만 효과는 뛰어나니까.”
장천운은 생사의 갈림길에 선 사람처럼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단환을 입안에 넣었다.
두어 번 씹었더니 입안에서 벌레 썩은 냄새가 가득 퍼졌다.
구역질이 절로 날 정도.
냄새가 어찌나 지독한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독 때문이 아니라 이 해독약 때문에 죽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노인이 재수 없는 회색빛 눈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뱉어낼 수도 없었다.
“크읍, 정말 지독하군요.”
“그만큼 저 독지에 고여 있는 시독(屍毒)이 지독하다는 뜻이지.”
오백여 년 전, 큰 전쟁이 났을 때 곽산으로 도주한 사람들이 절벽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길이 끊긴 줄 모르는 사람들이 뒤에서 밀려드는 바람에 떠밀린 것이다.
그 숫자가 무려 일만 명. 그들의 시체가 썩은 후 수백 년 동안 온갖 짐승들이 독에 중독되어 죽어갔으니, 가히 ‘지옥의 독지’라 불러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정말 저에게 주신 해독제로 시독을 해독할 수 있습니까?”
“못 믿겠으면 뱉어내.”
울컥한 장천운은 해독제를 노인의 얼굴에다 뿜어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 영감, 되게 쌀쌀맞네.’
다리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가려움만 없앨 수 있다면 뭘 못 먹을까.
‘제기랄,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망설이던 장천운은 눈을 질끈 감고 입안에서 뭉개진 단약을 삼켰다.
‘설마 누군지도 모르는 수상한 노인네에게 사기 당하는 건 아니겠지?’
그때 문득, 강련곡에서 수련할 때 봤던 강호인명록이라는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곳에는 강호의 고수 수천 명에 대한 이름과 특징이 적혀 있었다. 게다가 노인은 이 계곡을 절독곡이라고 했다.
회색빛 눈, 대나무처럼 마른 몸매, 그리고 절독곡.
노인을 바라보는 장천운의 눈이 커졌다.
“혹시…… 독왕(毒王)?”
막 돌아서려던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어린놈이 제법 아는 게 많군. 강호와 벽을 쌓은 지 이십 년이 넘었거늘.”
독왕 남사명.
십여 년 전부터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무림오왕(武林五王).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독왕이다.
특히 독왕은 이십 년 전 모종의 일로 강호의 지탄을 받은 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새로운 독을 실험한답시고 가족을 다 죽였다나?
어쨌든 그는 강호에서 가장 독을 잘 다루는 삼인 중에서도 제일 괴이한 자였다.
구천성에서 끌어들이려 했지만 실패했던 인물.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잘못 알려진 것이었군요.”
노인, 독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커다란 응어리가 가슴에 맺힌 듯 회색빛 눈을 덮고 있는 주름진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강호는 진실보다 진실이 아닌 것이 더 진실처럼 알려질 때가 있지. 어쨌든 나와의 약속, 잊지 마라.”
“걱정 마십시오.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겁니다.”
“혹시 몰라서 말하는데, 도망가 봐야 열흘도 못가서 다시 돌아오게 될 거다.”
노인, 독왕의 말에서 뭔가를 눈치 챈 장천운의 표정이 급변했다.
“설마 해독이 안 된 것……?”
“네가 독혈을 빼낸다고 무식하게 상처를 내는 바람에 시독을 완벽히 제거하려면 해독제를 두 번은 더 복용해야 한다. 도망가는 거야 상관없지만, 두 다리가 썩어도 나를 원망하지는 마라.”
‘빌어먹을! 그 썩은 냄새 나는 약을 두 번이나 더 먹어야한단 말이지?’
장천운은 시독으로 다리가 썩는 것보다도 그 일이 더 걱정되었다.
***
절독곡에서 밖으로 통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절벽 사이로 난 그 길은 짐승조차 드나들기 힘들 정도로 험했다.
그나마도 독왕이 기문진으로 봉쇄한 바람에 사마경과 장천운은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아마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절독곡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도 바로 그 기문진 때문인 듯했다.
어차피 시독을 완벽히 해독하려면 해독제를 두 번은 더 복용해야 하는 상황.
밖으로 나가는 걸 포기한 장천운과 사마경은 독왕이 내준 석실을 하나씩 차지했다. 돌침상에 가죽 이불을 덮고 지냈지만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식량도 걱정하지 않았다.
독왕이 이틀에 한 번씩 밖으로 나가서 식량을 가져왔으니까.
때로는 짐승을 잡아오고, 때로는 과일을 따오기도 했다.
그 짐승 중에는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기괴한 독물도 있었고, 과일 중의 반은 독과였다.
특히 사마경은 털이 많은 커다란 빨간 거미와 껍질이 울퉁불퉁 한 검은색 두꺼비를 유독 싫어했다.
독왕은 바로 그 독물을 독과와 자신이 가진 독에 섞어서 새로운 독을 만들어냈다.
그 사이 장천운은 시독에 대한 해독제를 사흘 간격으로 두 번 더 복용했다.
해독제를 세 번이나 복용했는데도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지독한 냄새는 적응되지 않았다.
그래도 효과는 좋아서 다리의 독기가 완전히 빠졌다. 게다가 상처 치료에도 효과가 있는지 옆구리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그렇게 장천운이 완전히 낫자, 독왕이 기다렸다는 듯 독을 들고 나타났다.
절독곡에 들어온 지 열흘 째 되던 날이었다.
“이제부터 실험을 시작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