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79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43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79화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아버지가…… 오오오, 아버지, 아버지…….”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넘쳐서 뺨을 타고 주르륵 쏟아졌다.
붉게 상기된 눈자위가 푸들거리며 떨리고, 떨리는 손으로 움켜쥔 의자손잡이가 끼긱, 끼긱, 부서질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버지.’
철없이 굴었던 자신이 야속하기만 했다.
‘아버지가 고통과 싸우고 있을 때, 아버지가 독과 싸우며 저를 걱정하고 있을 때, 저는 아버지가 힘든 줄도 모르고 투정만 부렸어요. 저를 위해서 고통도 참고 웃으시는데, 오히려 저는 매몰차게 돌아섰어요.’
대운사로 떠날 때 마중 나온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웃으면서 손을 내밀던 그 모습이.
‘그때 제가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갔으면, 손이라도 잡아줬으면, 그랬으면 아버지가 조금은 덜 외로웠을 텐데…… 그랬으면 덜 아팠을 텐데…… 그랬으면…… 그랬으면…… 미안해요, 아버지. 정말 미안해요…….’
철무와 장천운은 사마경의 내면에서 격렬하게 일고 있는 슬픔의 풍랑이 가라앉을 때까지 바라보기만 했다.
소연추가 떨고 있는 사마경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하지만 그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힘내세요, 아가씨.’
지금의 그녀 심정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었다. 다독임도, 그 어떤 말도 입바른 소리에 불과했다.
울고 싶으면 울고, 소리를 지르고 싶으면 소리를 지르는 게 나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슴의 응어리를 녹여낼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반각쯤 지나자 사마경의 들썩임과 떨림이 서서히 잔잔해졌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사마경의 슬픔이 조금이나마 진정된 듯 보여서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사마경은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낸 것이 아니라, 속에서 삭여버렸다.
이를 악물고, 사력을 다해서!
‘아버지는 내가 나약해지는 걸 바라지 않을 거야. 이겨내야 돼. 아버지에게 더 이상 미안해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이겨내야 돼.’
그녀의 눈자위가 붉은 모란꽃처럼 벌겋게 물들었다.
떨리는 입술도 터질 듯 붉어졌다.
‘반드시 이겨낼 거야!’
그렇게 다시 일각이 지난 후에야 그녀의 입이 열렸다.
“자세히 말해봐. 아는 것은 뭐든 다!”
철무가 소리 없이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말했다.
“좀 전에 소성주께 질문을 드렸습니다. 만약 음모에 의해서 돌아가신 거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할 거냐고?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음모를 꾸민 자가 누구든!”
“소성주께서 상대하기에는 적이 너무 거대합니다.”
“나도 알아!”
굳이 누구라고 말해줄 필요도 없다.
뻔하니까.
그들의 힘이 얼마나 거대한지도 잘 알고 있다.
떠나올 때까지 질리도록 봐왔으니까.
“천운, 천운은 나를 지켜주기로 약속했지?”
“예, 소성주.”
“저들이 겁나?”
“아닙니다.”
“나도 겁 안 나. 천운의 생각을 말해 봐, 내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소성주, 홍구로에선 말입니다, 피로 진 빚은 반드시 열배, 백배로 갚아줍니다.”
“나도 그럴 거야.”
“그리고 빚을 제대로 받아내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합니다. 특히 상대가 강할 때는 준비를 더 철저히 하죠.”
“나는 어떤 준비를 하면 되지?”
“먼저 마음부터 굳게 다스려야 합니다.”
사마경은 이를 악문 채 숨을 크게 들이쉬며 격동을 가라앉혔다. 두 눈 가득 고인 눈물도 소매로 찍어내고 뺨의 눈물도 닦아냈다.
“알았어, 그렇게 할 게.”
“그리고 상황을 최대한 자세히 알아야 하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사마경이 철무를 직시했다.
“철무 아저씨, 이제 이야기해 봐. 하나도 빼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해줘.”
철무는 그제야 알았다. 사마경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걸.
***
왕규는 머릿속이 텅 빈 기분이었다.
뭐? 구천성을 상대로 복수를 해?
‘이게 무슨 개소리야! 이건 아니잖아! 항주나 소주로 가서 세력을 만들기로 했잖아!’
그 일 때문에 모든 걸 처분했다.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고서.
그런데 이제 와서 뭐라고?
“난 가지 않겠네.”
왕규는 한번 버텨봤다.
툭, 장천운이 엄지로 검을 밀어 올렸다. 한 치쯤 드러난 검신이 불빛을 받아서 번뜩였다.
왕규는 즉시 말을 수정했다.
“하지만 뭐…… 조건만 맞으면 함께 못 갈 것도 없지.”
“무슨 조건 말입니까?”
“항주나 소주가 아닌 구천성으로 가려면 나도 뭔가 얻는 게 있어야하지 않겠나?”
“그거야 당연하지요.”
“그, 그래?”
당연하다고? 그렇게 말하면 반박하기가 이상하잖아?
“앞으로 한 가족처럼 지내기로 하셨잖습니까? 잃는 것도, 얻는 것도 함께 해야지요.”
왕규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한 가족!
자신이 먼저 그렇게 말했다.
왕규는 공패가 입에 달고 살던 말대로 자신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말이 좋아 잃는 것도 얻는 것도 함께 한다는 것이지, 쉽게 말하면 ‘죽든 살든 끝까지 함께 가자!’ 그런 말 아닌가 말이다.
“설마 루주께서 한번 한 약속을 뒤집겠단 말씀은 아니겠지요?”
왕규의 눈초리가 밑으로 축 처졌다.
쉰 살이 되도록 살면서 그에게 남은 것은 지금 짊어지고 있는 보따리 속의 돈 외에 ‘비마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는 말 몇 마디뿐.
돈이야 있다가도 없을 수 있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신뢰라는 놈은 한번 잃으면 영원히 꼬리를 따라다닌다.
‘지미, 어린놈이 주둥이만 갈고 닦았나…….’
거기다 검까지 강하다.
주먹도 무척 세서, 구천성의 서궁과 광혈검마의 제자가 그의 주먹에 박살났다고 한다.
“이제 루주 아니네. 주루를 공패에게 줘버렸거든.”
왕규는 그런 식으로밖에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하고 참담했다.
‘젠장! 내가 어쩌다가 저런 놈을 만나서…….’
정말 빌어먹을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그 빌어먹을 운명에서 목숨을 건지는데 한 푼의 가능성이라도 더 높일 수 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전에 자네가 말했던 자들, 아직도 찾고 있나?”
장천운의 표정이 당장 달라졌다.
“찾았습니까?”
“표사들이 황보산에서 봤다고 하더군.”
“그럼 사람을 보내서 그들에게 제 말을 전해주십시오.”
“무슨 말을 전하면 되지?”
“구천으로 돌아간다고 말하면 알아서 올 겁니다.”
철무가 한마디 덧붙였다.
“일단 태성산 구절곡으로 오라고 하시오. 그곳에서 기다릴 테니까.”
***
탕! 탕! 탕! 탕!
자시 초. 대장간을 떠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짐을 점검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세차게 두들겼다.
저두심이 대문을 노려보며 물었다.
“뉘슈?”
“방호요.”
저두심이 장천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
“열어줘.”
저두심이 문을 열어주었다.
문 밖에는 방호와 이공진, 유각이 서 있었다. 장천운이 구산, 저두심과 함께 나타나자 대장간이 장천운의 거처인 걸 눈치채고 찾아온 것이다.
“어쩐 일이오?”
장천운이 안으로 들어서는 그들에게 묻자, 방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도 함께 갈까 해서 왔소.”
“강상은 어떡하고?”
“강 형은 치료가 끝날 때까지 남궁세가에 남기로 했소.”
“우리가 어디로 갈 줄 알고 함께 가겠다는 거요?”
“어디든. 빚을 졌으니 갚아야하지 않겠소?”
“죽을지 모르는데도 말이오?”
피식, 방호가 실소를 지었다.
“강호에서 무사로 살아가려면 죽음을 친구처럼 생각해야 하오. 친구를 찾아가는데 뭐가 두렵겠소?”
장천운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럼 좋을 대로 하쇼.”
거대한 적과 싸워야하는 상황이다. 방호 일행이 대단한 고수는 아니지만, 꼭 고수만 도움이 되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지금 고수가 아니라고 해서 나중에도 고수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천 형, 하나 물어도 되겠소?”
“말해보시오.”
“당신은 누구요?”
“장천운. 그게 내 이름이오.”
“장천운이든 단천운이든, 이름은 뭐든 상관없소. 나는 이름보다 당신이라는 사람을 알고 싶은 거요.”
소름끼치도록 강한 무공과 무섭게 느껴질 정도의 냉정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의 정체를.
“예전에 사람들은 나를 홍구로의 귀호라고 했소.”
“홍구로?”
“무창의 흑도 뒷골목이오. 열여섯 살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소.”
단 몇 번의 만남으로 자신의 마음을 빼앗은 고수가 흑도출신이라고?
방호는 물론 이공진과 유각도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지금은?”
“소성주의 특별호위무사조인 흑월조의 조장.”
방호의 눈이 커졌다. 두 눈이 따로따로 흔들렸다.
소성주!
안휘를 휩쓸고 다닌 그가 그 단어의 의미를 어찌 모를까.
더구나 흑화방에서 남궁호와 사공명신의 질문에 대답하던 내용을 떠올리니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맙소사! 그럼 함께 있던 그 여자, 아니, 그 아가씨가…… 작년에 사라졌다는 구천성의 소성주?”
끄덕끄덕.
“그래서 구천성 사람들을 전부 죽인 거요?”
“그렇소.”
방호는 눈을 두어 번 껌벅거렸다.
대답이 너무 담담해서 정말 저 사람이 그 냉혹하던 자가 맞나 싶을 정도다.
“여기를 떠나면 어디로 갈 거요?”
“호랑이굴로 들어갈 생각이오.”
방호가 입을 다물고 장천운을 쳐다보았다.
호랑이굴. 그곳이 어딘지 짐작 못할 그가 아니었다.
‘구천성으로 돌아간다고?’
왜? 왜 도망치듯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간단 말인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그럼 자신들도 구천성으로 간단 말 아닌가?
‘그래서 죽을지 모른다고 한 건가?’
두렵진 않았다. 함께 가겠다고 한 말을 되돌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묘한 전율이 발끝, 손끝에서 머리끝까지 치달렸다.
‘으흥, 구천성에 간단 말이지?’
이공진과 유각도 싫진 않은가 보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다.
“이 형과 유 형은 어때?”
“못갈 것도 없지.”
“싫든 좋든 약속했잖아? 그럼 가는 거지.”
그때였다.
“천운, 이제 출발해.”
사마경이 소연추와 함께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방호를 일견한 그녀가 장천운을 향해서 ‘저 사람들 왜 온 거야?’ 하는 표정으로 슬쩍 고갯짓을 하고 설명을 기다렸다.
장천운이 간단하게 사정을 말해주었다.
“빚을 갚기 위해서 우리를 따라가겠답니다. 호랑이굴이라 해도 상관없답니다.”
“말했어?”
자신의 정체를 밝혔냐는 뜻.
“했습니다.”
“그럼 천운이 알아서 해.”
사마경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여행에 들떴던 행복함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녀의 표정에는 서릿발 같은 한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표정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얼굴도 달라졌다.
호기심 많은 시골 소년은 어디로 가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복수에 도움이 된다면 자신의 얼굴이라도 이용할 작정이었다.
제일 먼저 그녀의 미모에 넘어간 사람은 방호였다. 그는 사마경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따로 놀던 두 눈이 한가운데로 모여서 반짝거렸다.
‘구천성 소성주가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니.’
***
합비성을 나선 장천운 일행은 서산 골짜기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달을 보며 나아갔다.
그로부터 반각쯤 지났을 때, 그림자 두 개가 합비성의 높은 성벽을 야조처럼 날아서 넘었다.
두 그림자는 장천운 일행이 사라진 곳을 향해 달리며 나직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두 소저, 왜 저들을 따라가려는 거요?”
“그러는 사공 공자는 왜 나섰나요?”
“누가 더 강한지, 천운이란 자와 한번 싸워보고 싶소.”
“저도 마찬가지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