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74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42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74화
남궁세가는 겉에서 보기보다 더 거대했다.
장천운은 이끼가 낀 청석을 밟고 걸으며 남궁세가를 달리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지는 구천성의 절반도 안 되었지만, 높다란 담장 안에 늘어선 고풍스런 고루거각에는 구천성에 없는 수백 년 역사가 담겨 있었다.
‘이게 역사를 지닌 세가의 힘인가?’
전홍기 살인사건의 조사를 위해 나선 사람은 모두 열 명이었다.
장천운과 방호 일행, 그리고 남궁세가 쪽에서는 남궁호를 비롯해서 여섯 명이 나섰다.
개중에는 사공명신과 두양양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참관인으로서 조사의 공평성을 판단하는 게 임무였다.
그들은 창검전(昌劍殿) 안에서 남궁세가 무사들이 강상을 데려올 때까지 기다렸다.
밖에는 이야기를 듣고 모인 남궁세가 무사 수십 명이 서 있었는데, 그 중 절반은 방호 일행과 싸웠던 창룡검대 무사들이었다.
잠깐 기다리는 사이, 남궁도학이 강상을 데려왔다.
핏기하나 없는 해쓱한 얼굴, 더부룩한 머리와 여기저기 피로 얼룩진 지저분한 옷차림. 겉모습은 형편없었지만, 혼자 걷는 걸 보니 다행히 죽을 정도의 중상은 아닌 듯했다.
“강 형, 괜찮나?”
방호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불렀다.
강상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죽을 팔자는 아닌 모양이네.”
그때 남궁호가 물었다.
“귀하가 전홍기와 싸운 것은 확실하오?”
“그렇소. 하지만 서로 비등한 실력이어서 몇 수 겨루는 것으로 끝났소.”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보시오.”
강상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미 조사를 받을 때 두어 번 말한 터라 기억을 되살리는 게 어렵지 않았다.
“전홍기와는 이 년 전에 사소한 일로 다툰 적이 있는데…….”
하필 친구들을 만나러 합비로 가던 중 창룡검대 무사 둘과 함께 지나가던 그를 만났다.
과거의 앙금이 남은 두 사람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검을 들이대며 한바탕 비무를 벌였다.
“하지만 승부가 나지 않아서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는데, 갑자기 내가 그와 창룡검대 무사 둘을 죽였다며 추적대가 붙은 것이오.”
“그대가 죽이지 않았다면 누가 그들을 죽였단 말이오? 혹시 짐작 가는 바는 없소?”
“후우, 나도 헤어진 이후는 아는 바가 없소.”
조용히 듣고만 있던 장천운이 물었다.
“언제쯤 싸움을 벌였소?”
“사흘 전 아침이었소.”
“장소는?”
“서문 밖 이십 리쯤 떨어진 곳의 작은 호숫가에 송림이 있소. 거기서 싸웠소.”
“혹시 누군가 그쪽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지 못했소?”
“적어도 합비 쪽에서 오던 사람 중에는 수상한 사람이 없었소.”
장천운이 고개를 돌려 남궁호를 바라보았다.
“전홍기라는 사람의 시신은 어떻게 했소?”
“염해서 관에 넣은 후 제각에 안치했네. 창궁무전이 끝난 후 장례를 치를 생각이었지.”
“시신을 봤으면 싶소만.”
“상흔을 살피려는 건가?”
“그렇소.”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네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고 하더군.”
“사람마다 보는 부분이 다르고, 아는 것 역시 다를 수가 있소. 강 형의 무공은 누구보다 강 형이 잘 알지 않겠소?”
남궁호도 장천운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 보고 싶다면 못 보여줄 것도 없지.”
***
시신은 회와 숯을 넣은 관에 들어 있었다.
장천운은 남궁호에게 시신을 꺼내게 했다. 남궁호는 남궁세가 무사 둘을 시켜서 시신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때 몇 사람이 굳은 표정으로 제각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더니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멈추게!”
앞장서서 들어선 사십대 후반의 중년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남궁호가 몸을 돌리고는 중년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 중년인이 바로 전홍기의 부친이자, 창룡검대의 대주인 전옥창이었다.
“오셨습니까, 대주.”
전옥창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시신을 바라본 후 남궁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공자, 홍기의 시신을 재검한다고 들었네. 어떻게 된 일인가?”
남궁호는 그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증거를 찾기 위해 전 형의 시신을 다시 조사하고 있습니다.”
“이미 본 세가의 간부들이 살펴보지 않았는가?”
“상흔이 검에 의해서 난 것은 분명합니다만, 강상의 무공과 관련이 되었다는 증거는 아직 없지 않습니까?”
“강상이 자신의 무공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럼 그의 말을 믿을 건가?”
“일단 살펴보고 나서 판단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는 내 아들의 시신이 남의 손에 마구 굴려지는 걸 원치 않네.”
“하지만…….”
“이미 홍기와 강상이 싸웠다는 걸 본 사람이 있는데 또 무슨 증거가 필요하단 말인가?”
전옥창은 냉랭히 말하고는 한이 사무친 눈빛으로 강상을 노려보았다.
“네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몰라도 빠져나가기가 쉽진 않을 거다.”
강상은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저에게 잘못이 있다면, 전홍기와 싸웠다는 것뿐입니다. 전 대협이 뭐라 해도 저는 떳떳합니다.”
“네놈이 그래도……!”
그때였다.
“이제 보니 그렇게 된 거군.”
나직하면서도 힘이 실린 목소리가 한쪽에서 들려왔다.
전홍기의 시신을 자세히 살펴보던 장천운의 목소리였다.
“무슨 말인가요?”
두양양이 장천운에게 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장천운에게로 향했다. 심지어 전옥창마저도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흥! 네가 누군지 모르겠다만, 헛소리를 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라.”
장천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전옥창을 쳐다보았다.
“귀하가 뭐라고 하든, 범인은 강 형이 아니오.”
“뭐야?”
“강 형이 절정 경지에 오른 고수라면 또 모를까, 지금 실력으로는 절대 이런 검을 흉내 낼 수 없소.”
“흥! 너에게 절정고수의 검을 정확하게 판단할 능력이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절정 경지의 검을 펼치는 것도 어렵지만, 검의 경지를 정확히 판단한다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시신의 흔적만 보고 경지를 판단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남궁세가의 간부들이 그 점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각 안에 있는 사람 중 몇은 장천운의 말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절정 경지의 고수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남궁호도 그 중 하나였다.
“정말 절정 경지의 검이 분명하오?”
“그렇소.”
“이공자, 나는 저자의 말을 믿을 수 없네.”
전옥창이 냉랭히 소리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양양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쩌면 장 공자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전옥창이 이마를 찌푸렸다.
그도 두양양이 검성의 제자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젊은 여인이 알면 얼마나 알까 싶었다.
“두 소저는 본 세가의 간부들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 그럼 우리가 잘못 판단했단 말인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전 대협. 어차피 재조사를 하기로 했으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자는 것이지요.”
“흥! 나는 사건을 재조사한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드네. 실력도 없으면서 입만 나불거리는 자들의 말을 어찌 믿는단 말인가?”
장천운이 코웃음 치는 전옥창을 직시했다.
“그럼 어찌해야 믿을 수 있겠소?”
“네가 입으로만 나불거리는 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줘 봐라. 그럼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전옥창이 냉랭히 말하고는 장천운을 노려보았다.
“실력을 보여줘야 믿겠다?”
혼잣말처럼 나직이 뇌까린 장천운이 전옥창을 바라보며 옆구리의 검을 잡았다.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 모두 흠칫했다.
남궁호는 상황이 이상하게 흐르자 장천운을 말리려 했다.
“이보게…….”
그 사이 장천운이 현월을 천천히 뽑았다.
스르르르.
사람들 눈에는 너무 느려서 한참이 지나야 검이 다 뽑힐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사공명신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뭐, 뭐지?’
두양양의 눈도 점점 커졌다.
‘아……!’
장천운 주위의 모든 것이 정지된 듯했다.
무형의 기운이 대기를 지배한 상태.
그러나 정작 정면에 있는 전옥창은 그러한 기운을 느끼지 못한 듯 손을 등 뒤의 검으로 가져가며 싸늘한 눈빛을 번뜩였다.
놈이 검을 뽑으면 반격해서 따끔한 맛을 보여주리라!
일 장 거리. 한 발만 내딛으면 검신으로 놈의 목을 후려칠 수 있지 않겠는가.
스읏.
마침내 장천운의 현월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전옥창이 등 뒤의 검을 움켜쥐고 벼락같이 뽑았다.
‘이놈!’
하지만 그는 검을 한 뼘도 뽑지 못하고 멈춰야만 했다.
이제 막 검집에서 나왔다 생각한 상대의 검이 눈앞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어, 언제……?’
이마가 갈라지는 듯했다. 두 눈에 온통 검만 보이고, 온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저릿해서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내 말을 믿든 말든, 당신이 알아서 생각하시오.”
나직한 목소리를 내뱉은 장천운이 검을 거두고 다시 전홍기를 향해 돌아섰다.
제각 안에 십여 명이 있는 데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전옥창은 아예 석상처럼 굳어버렸고.
‘내가 전옥창이었다면…… 막을 수 있었을까?’
사공명신의 움켜쥔 손안에는 땀이 흥건했고, 두양양의 부릅뜬 눈에선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서, 설마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만검(晩劍)의 경지?’
다른 사람들은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해서 눈만 껌벅였다.
거무튀튀한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오는가 싶더니, 전옥창의 이마까지 길게 이어졌다.
마치 엿가락을 길게 잡아 늘인 것처럼,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속도가 무척 느린 듯 느껴졌다. 그런데 검이 언제 전옥창의 이마까지 늘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남궁호조차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실체를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 이마만 잔뜩 찌푸렸다.
‘뭐였지?’
그때 장천운이 말했다.
“이 시신의 검흔은 마치 검으로 두 번, 세 번 찔러서 확실하게 상대의 목숨을 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딱 한 번만 손을 썼을 뿐이오.”
퍼뜩 정신을 차린 남궁호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이 흔적이 검으로 한 번 찌른 흔적이라고?
자신이 봐선 최소한 서너 번 이상 찌른 듯했다.
“그렇소. 그리고 나는 이 시신의 검흔과 똑같은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무공을 하나 알고 있소.”
“무슨 무공인가?”
고개를 든 장천운이 이름 하나를 꺼냈다.
“광혼마검류.”
“광혼……?”
“구천성의 광혈단주, 광혈검마 탕추강의 다섯 가지 무공 중 하나요.”
남궁호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광혈검마는 구천성의 마도계열 고수 중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고수다.
“설마 범인이 광혈검마 탕추강?”
“탕추강은 다섯 사람에게 자신의 무공을 전수했소. 그리고 그 다섯 사람 중 하나가 광혼마검류를 익혔소.”
“그게 누군가?”
“광혈단 삼대주 가등이란 자요. 아마 두 소저라면 내가 누굴 말하고 있는지 알지도 모르겠소.”
“아!”
두양양이 눈을 크게 뜨며 탄성을 발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저와 싸웠던 자가 마지막에 괴이한 검초를 펼쳤어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살기가 짙었죠. 그게…… 광혼마검인가요?”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장천운의 말에 남궁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대 말이 사실이라 치세. 그와 전 형은 알지도 못할 텐데, 왜 전 형을 죽였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