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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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47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63화
“그의 요구를 무엇이든 들어준다?”
나극이 반문하며 이마를 찌푸렸다.
단순한 말처럼 들리는 몇 마디지만, 무척 위험한 제안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다 놈이 너무 큰 것을 요구하면?”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독고태의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최악의 경우라 해도 성주 자리를 넘겨주면 됩니다. 그래도 공손백보다는 그가 훨씬 편한 상대지요.”
“흐으으음.”
나극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위험한 것은 분명하다. 자칫하면 여우의 입에 먹이를 거져 넣어주는 꼴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보다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우문각이 공손백보다 편한 상대라는 것만큼은 확실한 사실이니까.
“하긴 길이 막히면 돌아갈 수도 있는 법이지. 한번 시도해 봐라.”
27장: 합비의 겨울
구천성의 차기 성주인 소성주가 사라진 지 일 년이나 됐는데도 강호는 의외로 조용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몇 달 동안은 온 강호가 들썩였다.
그런데 여름이 되면서부터 고요히 가라앉았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소성주 사마경이 구천성을 떠난 게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여름이 흘러가고 가을마저 지나갔다.
그리고 차가운 바람이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만들던 십이월 초.
초겨울바람이 유난히 세차게 불던 그날 오후에 키가 크고 작은 두 청년이 합비의 서문을 통과했다.
두 청년 모두 낡은 청의를 입었는데, 키 큰 청년은 옆구리에 검을 찼고, 작은 청년은 검을 등에 매고 있었다.
일 년 만에 곽산을 나온 장천운과 사마경이었다.
사마경은 면사를 쓰지 않았는데, 얼굴에 뭘 칠했는지 몰라도 무척 지저분했다.
‘쳇, 이럴 줄 알았으면 면사를 버리지 말 걸.’
그랬다. 사마경은 면사를 고의로 몰래 버렸다.
없으면 쓰지 않아도 되겠지, 그런 마음으로.
그런데 장천운이 면사 대신 얼굴에 이상한 나무진액과 거무스름한 가루를 발라서 지저분하게 만들어버렸다.
‘남들이 아가씨 얼굴을 보면 귀찮은 일이 벌어진다니까요.’ 그러면서.
어쨌든 먼지를 뒤집어쓰고 성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거의 동시에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십여 장 떨어진 곳에 객잔이 두어 곳 있었는데, 마침 불어대는 바람을 타고 향기로운 냄새가 파도처럼 덮쳐왔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백 리나 되는 들판을 통과한 두 사람에게 향기로운 냄새는 최면이나 다름없었다.
“천운, 돈 있어?”
“조금 있습니다.”
사마경의 품속에는 은자 수백 냥 값어치가 나가는 보석이 여러 개 있었다.
그러나 객잔을 통째로 산다면 몰라도 식사 한 끼 해결하겠다고 보석을 내밀 수는 없는 일. 지금은 수백 냥짜리 보석보다 은자 한 냥이 더 쓸모 있었다.
“식사할 정도는 돼?”
“뭘 먹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요리 중에는 무척 비싼 것도 많으니까요.”
“그럼 비싼 요리만 안 먹으면 되겠네. 근데 어디가 좋을까?”
장천운이 앞에 있는 객잔 두 곳 중 우측의 객잔을 골랐다.
“이쪽 대풍객잔(大風客棧)은 어떻습니까? 이름에서 패기 넘치는 기풍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난 저쪽 연풍객잔(戀風客棧)이 마음에 들어. 젊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잖아.”
호위무사가 어찌 주인을 이기랴.
장천운은 두 말 없이 방향을 왼쪽으로 틀었다.
연풍객잔에는 객잔의 이름답게 젊은 남녀들이 많이 들락거렸다.
체구도 작은 사마경이 청년의 얼굴을 한 채 장천운과 들어서자 몇 사람이 슬쩍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누가 봐도 관심이 가지 않을 얼굴이었다.
두 사람은 마침 빈자리가 생긴 창문가로 향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막 자리를 차지하기 직전, 누군가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달려오더니 잽싸게 의자에 앉았다.
“여긴 내가 먼저 차지했으니 자네들은 다른 곳으로 가보게.”
장천운은 의자에 앉은 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 스물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청년이었다.
이마에 비단으로 된 파란 영웅건을 두르고 역시나 파란 무복을 입은 청년.
그 청년은 키도 훤칠했고 얼굴은 장천운의 뺨을 때릴 정도로 준수했는데, 딱 하나 단점은 심한 사팔뜨기라는 점이었다.
“풋.”
사마경이 제각각 노는 청년의 눈을 슬쩍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 인마? 지금 나를 비웃은 거냐?”
청년이 이마를 찡그리며 다그치듯 묻자, 사마경이 어깨에 힘을 주고 턱을 치켜들었다.
대운사를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하늘처럼 떠받듦을 받고 살아온 그녀다. 얼굴이 엉망인데도 범접하기 힘든 위엄이 절로 흘러나왔다.
“어? 생긴 건 쬐끄만한 놈이 제법인데?”
청의청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그의 눈이 반대쪽으로 사팔뜨기가 되었다.
사마경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더니 끝내 폭발하듯 대소가 터져 나왔다.
“크크크, 호호호호!”
“어? 이제 보니 놈이 아니라…… 여자잖아?”
청의청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나마 ‘년이잖아?’라고 하지 않은 게 그에게는 천행이었다.
그런데 눈이 커지니 더 이상했다.
그때 장천운이 냉기서린 어조로 말했다.
“여긴 우리가 먼저 앉으려고 했던 자리요. 비켜줬으면 좋겠는데.”
청의청년의 눈이 장천운을 향해 돌아갔다.
“그럴 순 없지. 나는 여기 앉아서 친구를 기다려야 하거든.”
“당신이 누굴 기다리던 관심 없소.”
“다른 자리 찾아보게.”
할 말 다했다는 듯 청의청년이 다리를 꼬더니, 옆구리에서 푸른색 섭선을 꺼내 촤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펼쳤다.
푸른색 천에 그려진 하얀 구름과 용호(龍虎) 두 마리.
그 섭선을 본 장천운의 뇌리에 강호인명부에서 봤던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풍낙선(風樂扇) 방호?’
나이: 계유년(癸酉年) 생(生).
활동영역: 안휘성에서 주로 활동함.
무기: 두 자 길이의 용호선을 무기로 사용함.
경지: 일류 상급으로 알려져 있음.
사문: 청풍마선(淸風魔扇) 위일기의 제자라는 소문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음.
특징: 심한 사팔뜨기.
그게 장천운이 강호인명부에서 본 방호에 대한 정보였다.
그때 바로 옆쪽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자, 사마경이 말했다.
“천운, 우린 이쪽으로 앉아.”
장천운도 소란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은 없기에 더 이상 청의청년을 상대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장천운과 사마경은 점소이가 탁자 위를 치우자 주문부터 했다.
간단하게 두어 가지 요리를 주문한 두 사람은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반각쯤 지났을 때, 사팔뜨기 청의청년, 방호의 자리에 두 사람이 합류했다.
“오래 기다렸나?”
“강 형은 아직 안 왔나 보군.”
둘 다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청년들이었다.
청의무복을 입은 청년은 머리가 사자갈기처럼 흐트러져 있었고, 갈의무복의 청년은 머리를 위로 묶어서 말꼬리처럼 뒤로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강 형이 늦군. 나보다 빨리 올 줄 알았는데.”
청의청년이 이마를 찌푸리며 대답하고는 섭선을 접었다.
그 직후 점소이가 요리를 가져왔다.
“맛있게 드십시오, 공자님들!”
힘찬 목소리의 대가로 동전 몇 푼을 손에 쥔 점소이가 희희낙락하며 돌아가자, 사자갈기 머리의 청년이 입을 열었다.
“식사를 다 하도록 오지 않으면 찾아보세.”
“그게 좋겠군.”
장천운과 사마경은 요리가 나오자 옆자리의 방호와 그 일행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고 식사에만 열중했다.
그런데 요리가 반쯤 비었을 때였다.
콰당!
객잔으로 들어서던 사람 하나가 입구 근처의 탁자 위로 넘어졌다.
몸이 온통 피투성이인 그 자는 손에 피로 물든 검을 들고 있었는데, 검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는 그의 몸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엇? 강 형!”
방호 일행 중 사자갈기 머리의 청년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치고는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방호와 말꼬리 머리 청년도 일어나서 황급히 뒤따라갔다. 피로 물든 사람이 바로 그들이 기다리던 강상인 것이다.
장천운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방호 일행 쪽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끈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이지?”
사마경이 입구 쪽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옆에 있던 자들의 동료가 누구에게 당한 모양입니다.”
“실력이 제법 괜찮아 보이던데.”
“처음에 봤던 자가 풍낙선 방호라는 자입니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은 사자검(獅子劍) 이공진과 일섬쾌도(一閃快刀) 유각 같습니다.”
“유명한 자들인가 보네?”
“정사 중간에 속한 자들입니다. 비록 말단에 적혀 있긴 해도 강호인명부의 젊은 고수 일천 명의 명단에 올라가있으니 나름대로 유명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때 객잔의 입구에 검을 든 무사 칠팔 명이 나타났다.
“흥! 결국 도망간 곳이 여긴가?”
갈색무복에 피풍의를 걸친 그들은 모두 검을 들고 있었는데, 가슴에는 청룡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들을 보고 누군가가 수군거렸다.
“남궁세가의 창룡검대군.”
“무슨 일이지?”
창룡검대는 남궁세가의 주력인 삼단(三團) 사대(四隊) 중 하나다.
그들이 직접 나섰다는 것은 남궁세가가 이번 일을 중요시 여기고 있다는 뜻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방호라 하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오?”
“풍낙선 방호?”
“그렇소. 강호의 친구들이 그렇게 불러주고 있소. 그런데 남궁세가가 왜 강 형을 죄인처럼 대하는 거요?”
방호의 질문에, 창룡검대 무사 중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무사가 냉랭한 말투로 대답했다.
“나는 남궁두라 하오. 그 일은 강상이 더 잘 알거요. 그대들이 강상을 두둔한다면 본 세가를 적으로 삼겠다는 뜻으로 알겠소.”
“우리는 남궁세가와 싸울 마음이 없소. 하지만 강 형은 우리의 친구요. 정확한 사정을 알기 전에는 물러설 수 없소이다.”
창룡검대 삼조장인 남궁두도 방호의 이름을 모르지 않았다.
방호는 안휘의 청년 무사 중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고수다. 아무리 자신이 남궁세가의 창룡검대 조장이라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
“강상이 대주님의 아들인 전 공자와 창룡검대 무사 둘을 살해했소.”
“뭐요?”
그때 피범벅이 된 강상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들을 죽인 사람은…… 내가 아니오. 도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하는 거요?”
“싸우는 걸 본 사람이 있는 데도 발뺌을 하겠다고?”
“내가 전홍기와 싸운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몇 초 겨루며 다투다가 물러섰소. 그가 죽임을 당한 것은 그 후의 일이고.”
“그에 대해선 본 세가가 조사해서 판단할 것이다. 순순히 항복하지 않으면 죽여서 데려갈 것이니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어라.”
“강 형, 정말 강 형이 죽이지 않았소?”
방호가 강상에게 물었다.
강상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이네. 나는 그를 죽이지 않았네. 솔직히 내 실력으로 그를 죽이려면 운이 따라야 할 거네.”
방호가 고개를 돌려서 창룡검대 삼조장인 남궁두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이대로 강 형을 보낼 수 없소.”
“본 세가에 맞서겠다는 거요?”
“사실을 밝히자는 거요.”
방호가 짤막하게 말하고는 슬쩍 고갯짓을 했다.
강상을 부축하고 있던 이공진이 주르륵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유각이 앞으로 나서며 방호와 나란히 섰다.
“흥! 놈들을 쳐라!”
남궁두가 냉랭히 코웃음 치며 공격 명령을 내렸다.
창룡검대 무사들이 객잔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방호와 유각이 그들을 제지하는 사이, 이공진이 강상을 업고서 뒷문 쪽으로 달려갔다.
방호와 유각도 이공진이 멀어지자 뒤로 몸을 뺐다.
“어림없다, 이놈들!”
남궁두가 소리치며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뒷문 쪽으로 몸을 날린 방호가 장천운과 사마경을 보며 소리쳤다.
“뭐해! 어서 이곳에서 빠져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