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98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37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98화
이철궁은 서찰을 받아들고 이마를 찌푸렸다.
서찰은 쓰레기통에 버려진 걸 주워온 것처럼 심하게 구겨지고 지저분했다.
우문각이 처음부터 이런 서찰을 주진 않았을 터, 오는 도중에 이렇게 되었다는 뜻이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관철양은 더 고민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전해주면 장천운이 알아서 하겠지.
장천운은 관철양으로부터 서찰을 넘겨받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서찰이 이 따위입니까?”
그런 말 나올 줄 알았다는 듯 관철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하기 싫은 일 억지로 하라고 하면 괜한 곳에 화풀이하는 거. 딱 보니까, 하기 싫은 티가 역력하더군.”
장천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구겨진 서찰을 펼쳤다.
서찰이 너무 구겨져서 안에 적힌 내용을 읽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장천운은 서찰의 내용 중 몇 줄만 읽고도 우문각의 뜻을 간파했다.
[쓸 만한 사람들이니 잘 사용하면 도움이 될 거네. 그런데 성격이 제멋대로이니 그 점은 자네가 알아서…….]
우문각이 그리 말할 정도면 정말 괜찮은 실력을 지닌 자들일 것이다.
문제는 성격이 제멋대로라는 것인데…….
우문각이 왜 그런 자들을 보냈을까?
그런 성질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자들이란 건가?
‘어쨌든 강한 호위무사가 많아서 나쁠 건 없지.’
구겨진 서찰을 겨우 제 상태로 접은 장천운은 그들을 만나보기 위해서 소천전을 나섰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장천운은 나름대로 예를 갖추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섬뜩한 인상의 장한이 대뜸 시비조로 말했다.
“네가 장천운이냐?”
“그렇습니다.”
“나는 막소광이다. 총사가 너를 도와주라고 하더군.”
“저도 서찰을 봤습니다. 총사께서 몇 사람 보냈으니 알아서 써먹으라고 적어 놓았더군요.”
상대가 먼저 앞뒤 다 잘라먹고 말을 걸어온 터라 장천운도 말끝을 슬쩍 비틀었다.
“알아서 써먹어? 정말 그렇게 적었느냐?”
“사실 쓸 만한 사람이라고 해서 내심 기대를 했습니다만, 보아하니 이곳에선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섬뜩한 인상의 장한, 막소광의 눈썹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쓸 만한 사람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필요 없어? 그럼 쓸모없는 놈이란 말이잖아?’
생김새와 달리 눈치는 빨랐다.
“돌아가셔서 그렇게 전해주십시오.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장천운은 더 할 말 없다는 듯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졸지에 ‘쓸모없는 놈’이 된 막소광이 눈을 치켜떴다.
‘저 자식이!’
그때 그의 뒤쪽에 서 있던 청년 중 둘이 앞으로 나섰다.
“막 형님은 쓸모없다니까 돌아가쇼.”
“하긴 나이를 먹으면 고집만 세져서 남의 말을 듣는다는 게 쉽진 않지.”
한 사람은 키가 컸고, 한 사람은 빼빼마른 몸에 음침한 인상이다.
목진화와 수은귀다.
“이봐, 우린 남아도 되겠지?”
“난 여기가 좋아. 여기 분위기가 음침한 비령각보다 나은 것 같거든.”
장천운은 그들을 돌아다보았다.
“원한다면. 단, 남으려면 내 말을 잘 들어야 하오.”
“제길, 자네의 말을 들어야한다는 건 싫지만, 그래도 나는 남겠어.”
“나도. 이상하게 여기가 마음에 들어.”
목진화와 수은귀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장천운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자, 남은 두 청년, 임주상과 탁도광도 넌지시 합류했다.
“그 정도 조건이면 나쁘진 않군. 시키는 일만 잘하면 된다는 거잖아?”
“어차피 비령각으로 돌아가도 총사가 굴릴 텐데 뭐.”
나이는 둘 다 서른 살 전후로 보였다. 임주상은 단창 두 자루가 허리에 끼워져 있었고, 탁도광의 허리에는 기다란 흑편이 감겨 있었다.
장천운은 그 네 청년을 보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한가락 하게 생겼는데? 총사가 쓸 만하다고 할 만하네.’
그냥 쓸 만한 정도가 아니다. 모두 절정 경지를 밟아본 자들이다.
바닥도 굴러볼 대로 굴러본 것 같고. 사실 그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다.
우문각은 이런 자들을 왜 숨겨놓고 있었을까?
‘그러고 보니 총사도 엉큼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장천운은 나머지 두 장한을 바라보았다.
귀신처럼 섬뜩한 막소광의 입술이 일그러져 있었다.
우락부락한 인상의 장한, 등평은 눈알을 굴리며 눈치만 봤다. 겉모습과 달리 순진한 면이 있었다.
“그럼 두 분만 돌아가십시오.”
사람은 원래 남이 등을 떠밀면 가기 싫어지는 법이다. 막소광과 등평도 다르지 않았다.
“그냥 돌아갈 순 없다. 내가 쓸모없는 놈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지.”
“막 형이 남으면 나도 남는다. 나 혼자 돌아가면 총사가 염병지랄을 할 걸?”
***
장천운은 은명객을 흑월조의 거처로 데려갔다.
은명객들은 성격이 독특했다. 제대로 부려먹으려면 처음부터 말썽을 부리지 못하도록 철저히 교육을 시키는 게 좋을 듯했다.
흑월조원들은 장천운과 함께 오는 은명객들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행색이 제각각인데다 은연중 강한 냄새를 풍겼다.
막소광이 그런 흑월조원들을 보고 씩 웃었다.
“그 자식들, 눈빛이 괜찮은데?”
영락없이 귀신이 웃는 듯했다.
그 웃음을 보고 사공명신이 한마디 했다.
“인상 한번 제대로 더럽게 생겼군.”
막소광이 사공명신을 노려보았다.
“뺀질뺀질하게 생긴 놈이 주둥이만 살았군.”
피식, 사공명신이 실소를 지었다.
“조장, 어디서 이런 사람들을 데려왔나?”
“총사께서 알아서 써먹으라고 보낸 사람들이오. 뭐, 써먹으려면 철저하게 교육을 시켜야겠지만.”
추소철 등 이전의 흑월조원들은 그 말을 듣고 흠칫 몸을 떨었다.
그들은 ‘철저한 교육!’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진실이 얼마나 살벌한지 아는 것이다.
“뒷마당 쪽에서 할 거니까, 아무도 들어오지 마. 아마 한 시진 정도 걸릴 거야.”
추소철 등은 갈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왕규와 사공명신, 두양양은 ‘교육’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왕규와 사공명신은 장천운이 은명객과 함께 뒷마당으로 사라진 후 반각쯤 지나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온갖 쌍욕과 고함과 비명과 신음이 뒤엉켜서 쉴 새 없이 들린단 말인가.
그러나 두 사람은 뒷마당 쪽으로 간지 반의반각도 되지 않아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되돌아왔다.
“한 여름의 개도 저리 무지막지하게 때려잡진 않을 텐데…… 철천지원수지간이 아니고서야…….”
사공명신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나 왕규는 상황을 그와 조금 다르게 해석했다.
“내가 지금까지 조장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네.”
“무슨 말이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하다는 거지.”
그리고 독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릴 정도로.
왕규의 말에 사공명신이 끝내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기회가 되면 한번 붙어볼까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좀 더 지켜본 뒤에 결정을 내리는 게 나을 듯했다.
장천운의 교육은 반시진쯤 지났을 때 끝이 났다.
계획보다 일찍 끝난 것은 소천전에 있던 저두심이 달려왔기 때문이다.
“조장, 소성주님이 부르시네.”
아마 그 일만 아니었다면 한 시진을 꽉 채웠을 것이다.
장천운은 손을 털고 뒷마당에서 나왔다. 재미있는 놀이를 하다가 멈춘 아이처럼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조금만 더 했으면 혼천수라권의 극의를 깨달았을지도 모르는데…….’
그의 뒤를 따라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나올 수가 없었다. 일어나기도 힘들었으니까.
은명객 여섯 명은 그 후로도 석양이 질 때까지 뒷마당에서 편히 쉬었다.
날씨가 추웠지만 추위를 느낄 정신도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쉬면서 분노의 이를 갈았다.
장천운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자신들을 이곳으로 보내서 저 공포의 마귀 손아귀에 쥐어준 우문각이 원수였다.
“끄응, 개 같은 인간, 어디 보낼 곳이 없어서 저런 미친놈에게 보내.”
“헉헉헉, 내 살다 살다 저렇게 무식하게 사람 패는 놈은 처음 봤다. 진짜 사람새끼가 아냐.”
“두고 봐, 내 반드시 우문각의 모가지를 뜯어내고 말 테니까.”
42장: 밤은 피에 젖고
석양이 지기 시작하면서 구천성이 무거운 적막감에 짓눌렸다.
이제 원단까지 남은 시간은 세 시진.
그 안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무화원 쪽에 눈과 귀를 고정시켰다.
어둠이 점점 짙어지자, 서른여섯 개의 화톳불이 무화원의 안팎에서 타올랐다.
화톳불의 숫자가 평소보다 두 배나 되어서 일대가 대낮처럼 밝았다.
설마 저렇게 밝은데 자객이 숨어들진 않겠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무화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무화원 외의 다른 곳은 평소와 다름없이 짙은 어둠으로 물들고 있었다.
호법전 역시 군데군데에서 화톳불이 타올랐지만, 달마저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면서 어둠의 장막으로 뒤덮였다.
그렇게 술시가 되었을 때였다.
호법전 깊숙한 곳에서 헛기침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읍!”
여철숭은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좌측으로 돌렸다.
친조카처럼 지내왔던 사람이 자신의 옆구리에 꽂힌 단검을 쥐고 있었다.
바로 그 단검에 뚫린 옆구리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섬뜩함을 느낀 순간 다급히 검신을 움켜쥐었건만, 단검의 끝이 이미 심장에 도달해 있었다.
“이게 무슨 짓…….”
“숙부님은 소성주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했습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제 마음을 이해해주십시오.”
“이, 이 어리석은…….”
“물론 제가 어리석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숙부님처럼 신의를 위해서 꿈을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정의로운 놈이 되지 못합니다.”
여철숭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아아…… 내가 너를…… 잘못 봤구나.”
“죄송합니다, 숙부.”
십여 년 동안 가족처럼 지낸 만큼 조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다.
사람들이 가까운 이에게 배신당하고 뒤통수 맞는 걸 볼 때마다 자신에게는 절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자신의 조카는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배신 따위는 할 사람이 절대로 아니니까.
여철숭은 그렇게 생각했다.
조카가 방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씁쓸한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아마 남이 자신에게 ‘그가 당신을 배신할지 모르오.’라고 했다면 불같이 화를 내면서 당장 내쫓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리석은 사람은 네가 아니었구나.’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었다. 자신이 어리석어서 숙질간에 피를 보는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처음부터 사람을 제대로 봤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 아닌가.
조카가 의숙의 몸에 칼을 꽂는 걸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란 것만 알았어도, 가슴이 피눈물로 적셔지진 않았을 것 아닌가 말이다.
“네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이제부터 공손백은…… 너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을 거다. 그는…… 형제를 해친 자를…… 병적으로 증오하거든.”
단검을 잡고 있던 중년 무사의 표정이 두어 번 빠르게 변했다.
하지만 그는 여철숭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가 고심 끝에 내린 명령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믿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너는 그를…… 너무 모르는구나. 그는 필요하다면…… 자신의 가족조차…… 버릴 수 있는 사람이거늘…….”
“가족은 버려도 저를 외면할 수는 없을 겁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사람은 가족이 아니라 저니까요.”
이를 악문 중년 무사는 진기를 주입하며 단검을 비틀었다. 심장이 터지며 핏줄기가 더욱 거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