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9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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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54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97화
“존경했던 분이네. 의술도 정말 대단하셨지.”
“하지만 성주님의 병은 치료하지 못하셨지요.”
“아무리 뛰어난 의원도 모든 병을 치료할 순 없는 법이네. 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만병을 모두 고칠 수 있겠나?”
“하긴 그렇지요.”
“아마 화타나 편작이 있었다 해도 성주님의 병은 고치지 못했을 거네.”
“그렇게 중한 병이었습니까?”
“머릿속의 병은 천운이 따라야 고칠 수 있지. 안타깝지만 성주께는 천운이 따르지 않았던 것 같네.”
“아무리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다니, 황 당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만, 너무 성급하셨던 것 같습니다. 무슨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었던 것이 아닌지…….”
송명선이 이마를 찡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은…… 후우, 나도 무척 아쉽다네.”
한숨을 내쉬는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장천운은 그 짧은 순간 송명선에게 말 못할 고민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 고민이 황사중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성주의 죽음과 황사중에 대한 이야기 와중에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장천운은 바로 묻지 않고 송명선이 약을 조제하는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자신의 시선을 의식한 듯 그의 손놀림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손길을 멈춘 송명선이 고개를 들었다.
“본래 술을 거의 안 드시는 분이었네. 그런데 언젠가부터 가끔 혼자서 술을 드셨지. 그런데 성주님께서 돌아가시기 두어 달 전 어느 날이었네. 그날…….”
그날은 유난히 과음을 한 듯했다.
자신이 들어갔을 때 황사중은 이미 술을 두어 병 비운 상태였다.
“당주, 너무 많이 마신 것 아닌지요?”
그가 난색을 표하며 말하자, 술잔을 단숨에 비운 황사중이 불콰한 얼굴로 송명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송 의원, 만약 내가 죽으면 자네가 의약당을 맡아주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주? 돌아가시다니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한 말일 뿐이네. 믿을 만한 사람이 자네밖에 없어. 아직까지 구천성의 권력에 물이 들지 않은 사람은 자네뿐이거든?”
“아무리 그래도 돌아가신다는 말씀은 거두어주십시오.”
“나도 죽고 싶지 않네.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네.”
웅얼거리듯 몇 마디 내뱉은 황사중이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 후 두 달쯤 지났을 때 성주께서 돌아가셨고, 황 당주님도 자결을 하셨지. 정말 아까운 분이 돌아가셨어.”
송명선이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맺고 약봉지를 접었다.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장천운이 묻자, 송명선이 다시 시선을 들었다.
“다른 말씀이라니?”
“예를 들어서, 성주님의 병증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던가, 아니면 남에게 말 못할 수 없는 어떤 심중의 고민을 취중에 슬쩍 흘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설마…… 황 당주님을 의심하는 건……?”
“그냥 좀 궁금해서요. 아무 말씀도 안 하셨나 보죠?”
“그런 말씀은 하신 적이 없네. 허튼 소리 할 거면 약을 갖고 그만 나가게나.”
송명선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하지만 장천운은 나갈 생각이 없는 듯 이마를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고치기 힘든 병증이 있으면 의원끼리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 게 일반적인 일 아닙니까?”
“그건 그렀네만…….”
“특히 성주님의 병증이 고치기 힘든 것이라면, 더더욱 믿을 만한 사람과 논의를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만.”
“…….”
“제가 듣기로 성주님께서는 지독히 쓴 약을 복용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일반적인 약은 아니었겠지요. 혹시 당주님께서는 성주님께서 어떤 약을 복용하셨는지 아십니까?”
송명선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성주님께서 드신 약에 대해선…… 아는 게 없네. 황 당주께서 달리 하신 말씀이 없었는지라…….”
“평소에도 특별한 약을 지을 때 아무 말씀 안 하셨습니까?”
“의원에게는 개개인만의 비법이 있네. 자신의 비법을 남에게 말해주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황 당주님께서 만든 약이 비법으로 제조된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안 하셨을 거라고 보십니까?”
“그, 그게 아니면 무슨 이유가 있겠나?”
“당주께서 생각하실 때, 치료되지 않는 병증에 자신의 비법만 고수할 정도로 황 당주님이 꽉 막힌 분이었습니까?”
“그건…… 아니네.”
언젠가 복합적인 병증이 발병한 환자를 치료할 때,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자 자신의 의견을 물은 적이 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일 년에 서너 번은 그랬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성주의 치료에 관한한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성주의 병이 비밀이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사중과 자신의 관계를 생각하면, 병증에 대한 건 비밀이었다 해도 최소한 약재에 대한 논의 정도는 해야 옳았다.
약재 책임자는 자신이었으니까.
그러나 황사중은 성주의 치료에 들어가는 약재에 대해서조차 자세히 말한 적이 없었다. 그저 성주의 치료를 위해 특별히 외부에서 조달해온 약재라고만 했을 뿐.
어디서 그 약재들을 조달한 것일까?
송명선은 갑자기 오한이 든 듯 몸이 떨렸다.
뒤늦게나마 장천운이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 감을 잡은 것이다.
“나, 나에게 뭘 알고 싶은 건가?”
“당시 황 당주께서 구천성에 있는 약재를 쓰지 않았습니까?”
끝내 우려했던 질문이 나왔다.
송명선은 사실대로 말했다.
“성에는 마땅한 약재가 없다고 하시면서 필요한 약재를 외부에서 가져오셨네.”
“누구를 통해서 가져왔는지 아십니까?”
“왕달이 심부름을 한 것으로 아네.”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황 당주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 목을 매고 죽었네.”
자살을 해?
‘제기랄, 철저히 잘라냈군.’
성주가 서거하고 당주가 자결한 판이었다.
말단 약재운반 담당이 죽은 일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겠지.
“그 약재의 출처가 어딘지 아십니까?”
“모르네. 아마 아는 사람은 왕달과 황 당주님뿐이었을 거네.”
아마 왕달도 중간에서 전달 받기만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주위를 조사한다 해서 중요한 단서를 찾기는 힘들 듯했다.
“아쉽군요. 그 약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면 좀 더 자세한 것을 알아낼 수 있을 텐데요.”
그때 송명선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성주께서 병이 아닌 다른 이유로 돌아가셨다고 보는 건가?”
장천운이 그를 직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안색이 하얗게 탈색된 송명선의 입술이 떨렸다.
“말해보게.”
“황 당주가 누군가와 은밀히 만난 것을 보시거나, 그에 대해서 들은 적 없습니까?”
“황 당주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네. 어떤 때는 병 때문에 만나기도 했고, 어떤 때는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만나기도 했지. 그 많은 사람들 중 의심 가는 사람을 꼽으라면 내 재주로는 고를 수가 없네.”
“그래도 사람에게는 감이라는 게 있지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 말입니다. 특히 사람의 성격이나 습관이 달라질 때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는 법이지요.”
장천운이 다그치듯 말하자, 송명선이 미간을 좁히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삼년 전 가을쯤, 장로원에 다녀온 적이 있네. 그 후부터 조금 달라진 것 같네. 말수도 적어지고, 고민하는 모습도 자주 보이고……”
그때였다. 뭔가가 갑자기 떠오른 듯 송명선의 눈이 커졌다.
“아! 맞아. 그때쯤 나에게 창평이란 곳을 아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네. 지금 생각하니, 무척 초조한 표정으로 물어보셨던 것 같구먼.”
***
의약당에 다녀온 장천운은 약재를 연송하에게 맡기고 사마경에게 송명선과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확한 단서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성주의 죽음에 황사중이 관여되었다는 것은 확실한 듯했다.
이제 증거를 찾아내는 일만 남았다.
공손백과 나극, 독고태. 독살의 주모자는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여럿일 수도 있다.
그들을 옭아매려면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했다.
“창평?”
생전 처음 듣는 지명을 되뇌는 사마경의 이마에 가느다란 골이 두 줄로 파였다.
“막부산 통산현에 있는 마을인데, 주로 약초상과 사냥꾼들이 산다고 합니다.”
“황 당주가 그곳을 왜 물어봤다고 생각해?”
“저들이 필요로 하는 약재가 그곳에서 나기 때문에 물어본 것 같습니다.”
“뇌혈산을 만드는 재료가 창평에서 산출된다?”
“현재로선 그 이유가 가장 타당성이 있습니다.”
장천운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사마경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을 보내서 알아봐.”
“예, 소성주.”
“그리고 약은 안 먹을 거니까, 송하에게 달이지 말라고 해.”
“몸에 좋은 것을 특별히 많이 넣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좋으면 천운이 다 마시던가.”
***
장천운은 가져온 약 한 제(劑:20첩)를 모두 달이게 했다. 무려 열흘 치의 약을 한꺼번에 달이게 한 것이다.
그는 약이 다 달여지자, 소천전의 흑월조원들에게 한 사발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흑월조의 거처로 가져갔다.
“좀 쓸 거야. 그래도 몸에 좋은 것이 많이 들어갔으니까 마셔 둬.”
조장이 주는 것이다. 무슨 약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
전에 영약탕을 줄 때도 그냥 몸에 좋은 거라고만 하지 않았던가.
그걸 먹고 공력증진의 효과를 본 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쓰디 쓴 약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싹싹 핥아 먹었다.
왕규와 사공명신, 두양양도 눈치를 보면서 약을 마셨다.
일찌감치 마시고 쳐다보는 눈빛들이 심상치 않았다.
마시기 싫으면 나 줘! 그런 눈빛.
아무래도 마시지 않으면 손해 볼 것 같았다.
약은 무척 썼다. 속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장천운은 조원들이 약을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최소한 머리는 맑아지겠지.’
***
태양이 서산의 골짜기 사이로 처박힐 무렵, 무화원에 손님이 찾아왔다.
괴이한 일행이었다.
이십대에서 삼십대 중반까지. 나잇대도 다양했고, 인상 역시 제각각이었다.
목상처럼 무뚝뚝한 자, 음침하게 생긴 자, 귀신처럼 섬뜩한 자 등등, 모두 여섯이었다.
수하의 말을 듣고 무화원 입구로 나온 이철궁은 그들을 보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화원까지 오는 동안 순찰무사가 저들을 못 봤을 리 없다. 봤다면 기이한 행색에 의문을 품고 반드시 철저한 검문을 했을 터. 그럼에도 무사히 이곳까지 온 걸 보면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여길 가면 장천운이라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던데.”
“장천운이라는 자는 어디 있지?”
우락부락한 인상의 장한과 귀신처럼 섬뜩한 인상의 장한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말투로 봐서는 자신들이 찾아온 장천운이 누군지도 모르는 듯했다. 안다면 저런 말투를 사용할 리가 없었다.
“장 조장은 무슨 일로 만나려는 거요?”
이철궁의 질문에 섬뜩한 인상의 중년 무사가 구겨진 서찰을 하나 내밀었다.
“총사가 보냈다.”
“총사께서 보냈다고요?”
“장천운이란 자에게 이걸 보여주면 알아서 할 거라고 하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