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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호위 87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3,505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무적호위 87화

홍옥이 달린 노리개도 있었고, 진주가 박힌 반지도 있었고, 목걸이도 있었고, 심지어 패옥으로 예쁘게 장식된 단검도 있었다.

하나씩 만지작거릴 때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들리는 듯했다.

 

“이건 신양에 갔을 때 샀단다. 우리 예쁜 경아에게 아주 잘 어울릴 것 같구나.”

“네 어머니가 이런 목걸이를 아주 좋아했단다. 꼭 사주고 싶었는데…….”

“생일 축하한다, 경아야. 이 패옥을 가슴에 달면 잡귀가 달라붙지 못한단다. 아버지는 경아가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구나.”

 

뿌연 안개가 눈앞을 가렸다.

뚝.

뺨을 타고 턱에 고였던 눈물이 탁자 위에 떨어졌다.

이를 악물고 참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아버지의 목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는 듯했다.

한참 만에 마음을 진정시킨 그녀는 아버지의 선물을 깨끗이 닦아서 서랍장 안에 가지런히 정리했다.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복수의 칼날도 하나하나 정리가 되었다.

‘아버지, 구천에서 지켜봐 주세요. 경아가 한을 풀어드릴 테니까요.’

 

***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소천전으로 찾아왔다.

사마경은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그들을 일절 만나지 않았다.

대부분은 아쉬움을 접고 그냥 돌아갔다.

하지만 몇 마디 핑계 때문에 발길을 돌릴 생각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모종의 임무를 띠고 찾아온 백리호는 그녀를 만나지 않고는 돌아갈 마음 자체가 없었다. 백리우진과 독고민 역시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비켜라!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냐?”

백리호가 앞을 막고선 구산과 진구를 노려보며 걸음을 내딛었다.

“소성주께서 오늘은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내일 오시지요, 전주.”

“이 건방진 놈이!”

강력한 기운이 구산과 진구를 향해 해일처럼 밀려갔다.

만근 바위도 밀어낼 기세!

두 사람은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구산이 잇새로 겨우 몇 마디 뱉었다.

“소성주님의 허락이 있기 전에는 안 됩니다.”

“흥! 어디 버티려면 버텨봐라, 이놈들.”

구산과 진구의 무공이 괄목할 만큼 성장했다 해도 아직은 백리호의 적수가 아니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두 사람은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강력한 압박에 두 발이 뒤로 미끄러졌다.

끼기기기.

단단한 원목 바닥이 미끄러지는 발길을 따라서 파였다. 가슴이 짓눌려서 심장이 터질 듯했다.

‘과연 천혼전주답구나.’

‘빌어먹을, 아직은 어림도 없군.’

그럼에도 두 사람은 백리호의 눈을 쳐다보며 혼신을 다해 버텨냈다.

“제법이군. 하지만 버티면 버틸수록 네놈들만 손해일 것이니라.”

백리호가 더욱 차갑게 말하며, 늘어뜨리고 있던 두 손을 슬쩍 쳐들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장천운이 나왔다.

상황을 짐작한 그가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흔들며 말했다.

“멈추시지요.”

우수에서 뻗어나간 무형무음의 기운이 백리호가 펼친 공세 속으로 스며들었다.

부드러움 속에 칼날 같은 날카로움이 섞인 기운은 구산과 진구를 압박하던 기세의 맥을 가닥가닥 끊었다.

그물처럼 촘촘하던 기의 그물에 구멍이 나자, 백리호가 인상을 쓰며 장천운을 노려보았다.

충격도 없고, 상대가 펼친 기의 실체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공격이 힘을 잃었다는 것이다.

‘역시 보통 놈이 아니야.’

일단 기운을 거두어들인 그가 장천운을 노려보며 냉랭히 말했다.

“이번에는 네가 나를 상대할 생각이냐?”

“소천전에서 힘자랑을 하시다니, 언제부터 이곳이 힘자랑이나 하는 곳이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힘자랑? 내가 힘자랑이나 하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처럼 보이느냐?”

“아니라면 왜 소성주님의 거처에서 호위무사를 핍박하시는 겁니까?”

“숙부가 조카를 만나러 왔는데 왜 앞을 막느냐? 결국 너희들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니냐?”

“피곤해서 오늘은 만날 수 없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래도 꼭 만나야겠다면?”

백리호의 두 눈에서 싸늘한 한광이 번뜩였다.

반면 장천운의 눈빛은 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소성주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그래도 들어가겠다면?”

순간, 장천운이 두 손을 쥐었다 폈다. 그러고는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구천률을 보면 ‘특별한 이유 없이 하극상을 범한 경우 두 다리를 부러뜨리고, 그 죄질이 나쁘면 근맥마저 자른다.’라고 되어 있더군요.”

생각도 못한 말에 백리호가 눈을 치켜떴다.

일개 조장 따위가 자신에게 구천률을 들먹일 줄이야!

게다가 뭐라? 다리를 부러뜨리고 근맥마저 잘라?

“네가 지금 나에게 하극상을 논했느냐?”

“소성주님께서는 전주님의 조카라는 신분을 떠나 구천성의 서열 이위십니다. 성주님께서 서거하신 현재, 특별히 선출된 구천대령주를 제외하고는 구천성의 누구도 그분의 말을 거역하고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지요.”

“나도 그 정도는 안다. 하지만 나는 소성주의 숙부야.”

“누구든, 율법을 어기면 구천률에 따라서 처리하는 수밖에요. 제 말에 잘못된 것이라도 있습니까?”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현실이야 전혀 ‘아니올씨다!’였지만.

백리호도 그 점을 모르진 않기에 분노만 씹으며 장천운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 죽일 놈의 새끼가……!’

그때 백리우진이 눈을 치켜뜨고 나섰다.

“말이 심하군! 숙부께서 조카를 보자는 게 뭐 그리 잘못한 일이라고 그런 망발을 지껄이는 거냐?”

“조카 이전에 소성주라는 걸 모르나? 똑똑한 줄 알았는데 내 말을 똥구멍으로 들었나 보군.”

“뭐?”

“왜? 너도 하극상의 죄를 저지르면 어떻게 되는지 시험해 보고 싶어?”

“이이…….”

백리우진은 이만 악물고 있을 뿐 반론을 펴지 못했다. 공식 직함이 없는 그는 흑월조 조장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독고민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공손백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 동안 백리호와 백리우진에게 눌려 지낸 그로선 통쾌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후후후, 저 애새끼가 오늘 한 건 하는군.’

하지만 즐겁던 기분도 잠깐뿐이었다.

“그런데 독고 공자는 왜 왔소? 설마 백리우진 밑으로 기어들어간 것은 아닐 거고…….”

‘저 새끼가!’

“더 볼 일 없으면 그만 가보시지?”

독고민은 독기가 일렁이는 눈빛으로 장천운을 쏘아보았다.

“주둥이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보니, 조장이 무슨 대단한 벼슬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군.”

“대단한 벼슬은 아니지만, 적어도 아무 직위도 없는 자들에게 그딴 개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라오.”

으드득.

얼마나 세게 갈았는지 회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갈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장천운이 정말로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저런, 그러다 이가 부러지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동겸도 이가 많이 부러져서 고기를 제대로 못 씹는다고 하던데.”

독고민은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해서 분노를 씹어 삼켰다.

장천운 말대로 이곳은 소천전이다. 경천단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통하지 않는 곳.

“오늘 일, 잊지 않으마.”

으르렁거리듯 한마디 내뱉은 그는 곧장 몸을 돌렸다. 더 말해봐야 이득은커녕 속만 끓을 듯했다.

말 몇 마디로 독고민을 돌려보낸 장천운은 백리호를 바라보았다.

“전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성주님께선 내일 뵈었으면 합니다만.”

백리호는 독고민과 달리 차갑게 식은 눈으로 대답했다.

“오냐, 이놈. 경아가 피곤하다 하니 오늘은 그냥 가마. 하지만 시건방진 네놈의 말은 내 마음 속에 담아둘 것이다.”

그러시던가.

“감사합니다. 어떤 불순한 무리가 소성주님을 해할지 몰라서 그만 들어가 봐야 하니 안녕히 가십시오.”

장천운은 포권을 취하고는 대답을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장천운의 말에 가시가 있다는 걸 백리호가 왜 모를까.

차가운 눈빛으로 장천운의 등을 노려본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제일 먼저 저놈부터 없애야겠어.’

 

“모두 돌아갔습니다, 소성주.”

“우문 숙부는 오시지 않는군.”

“오시지 않을 겁니다.”

“눈치 보여서?”

“안 오는 것이 소성주께 나을 거라고 판단하셨을 겁니다.”

“우문 숙부는 다 좋은데, 너무 신중해.”

신중한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음흉한 면도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거지요.”

“하긴…….”

사마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후 장천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천운, 백부가 어떻게 나올 거라고 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성주의 뜻을 꺾으려 하겠죠. 아마 내일은 하루가 십 년처럼 길게 느껴질 겁니다.”

“차라리 내일 올 걸 그랬나?”

딱 하루 남겨놓고 짠! 하고 나타나면 어땠을까?

장천운도 그런 등장을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도 우문각과 비슷했다.

“그랬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소성주를 죽이려 했을 겁니다.”

“하긴 나라 해도 조카의 목을 잘라버릴 거야. 잠깐만 욕을 먹으면 되니까.”

사마경 역시 판단이 느린 편은 아니었다.

냉정함도 남 못지않았고.

“사실 지금도 충분히 위험합니다. 내일은 더 위험할 것이고, 모레는 살얼음판을 걷는 하루가 될 겁니다.”

“그걸 알면서 왜 백리 숙부를 자극했어?”

“그래야 상대하기가 더 편해지니까요.”

분노한 적보다 조용한 암살자가 더 막기 힘든 법이다.

“막을 자신 있어?”

사마경이 툭 던지듯 물었다.

장천운이 무심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아마 허튼 수작을 부리는 자는 혼백만 구천을 떠돌게 될 겁니다.”

 

***

 

유시 무렵, 방문 밖에서 구산이 안에 대고 말했다.

“소성주께 아룁니다. 냉원상 대주님과 연송하 대원이 왔습니다. 내일 오라고 할까요?”

“아냐, 들어오시라고 해.”

냉원상과 연송하는 호위무사다. 그들을 불러들인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냉원상은 볼이 홀쭉했다. 지난 일 년 간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그의 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얼굴의 살이 많이 빠지셨네요.”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같은 대답을 수없이 반복하다 보니 볼이 쑥 들어갔습니다.”

냉원상이 격동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 그답지 않게 농담을 섞어 대답했다.

“저 때문에 고생이 많았군요.”

“아닙니다, 소성주. 저야 불려 다니기만 했을 뿐, 그 동안 할 일이 없어서 놀다 보니 몸은 편했습니다. 그런데 여행은 즐거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럭저럭 괜찮았어요. 고생도 많이 했고 죽을 뻔한 적도 있었지만, 소득이 전혀 없지도 않았고요.”

사마경은 담담히 말하고 연송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류화와 이능능도 아직 남아 있어?”

“아닙니다, 소성주. 류화는 화무당으로 돌아갔고, 능능도 류화를 따라갔습니다.”

“그래? 하긴 내가 죽거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겠지.”

“꼭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연송하가 두 사람을 대신해서 변명하려 하자, 사마경이 말을 돌렸다.

“어째 대주님보다 살이 더 빠졌네?”

“많이 빠지진 않았습니다.”

“천운 걱정 때문에 빠진 거야?”

“아, 아닙니다.”

“괜찮아, 동생이 오빠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뭐.”

“…….”

당황한 연송하가 말은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장천운은 그 모습을 보고 사마경을 째려보았다.

연송하가 자신을 오빠 이상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이상한 소문이 돌면 연송하에게 해가 될까봐 모른 척 했을 뿐.

그 사실을 아는 사마경이 은근슬쩍 둘 사이의 관계를 오빠 동생으로 확정지으려는 듯했다.

‘하여간…… 죄 없는 송하는 왜 괴롭혀? 어떻게 공손백을 상대할 것인지, 그것 생각하기도 바쁜데.’

그래도 찬바람 휭휭 부는 분위기보다는 나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어쩌면 가슴에 맺힌 한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억지로 저러는지도…….

그는 나름대로 그녀의 마음을 이해를 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함께 온 두양양이란 여자, 송하도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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