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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호위 86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3,441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무적호위 86화

멈칫한 염하가 눈알을 돌려서 장천운을 노려보았다. 눈에 불길이 담긴 듯 붉은 기가 돌았다.

장천운이 더욱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는 썩은 눈깔로 그렇게 쳐다보지 마쇼. 그랬다간 후회할 거요.”

그러고는 씩, 웃어주고 사마경을 따라 방을 나섰다.

장천운의 등을 노려보는 염하의 붉은 눈에서 진짜 불길 같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놈. 곧 네놈을 지옥의 불길로 태워 죽이고 말겠다!’

 

사마경과 장천운, 소연추가 전각을 나간 후 백리호가 백리우진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사형, 경아가 이곳에 왔었다면서요?”

“인사만 건네고 바로 갔다.”

“이런, 제가 조금 늦었군요.”

백리호는 문인동을 슬쩍 쳐다보고는 공손백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전부터 마음에 걸리더니…… 진즉 손을 썼어야 했어.’

그는 문인동의 능력을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언제 위험한 존재가 될지 몰라서 제거할 것인지, 말 것인지 몇 번이나 고민했었다.

그런데 기회를 잡지 못해서 망설인 사이 공손백의 한 팔이 되어 버렸다.

그가 한편이 되었으면 좋아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위험한 존재는 적일 때만 위험한 것이 아니다. 한편일 때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언제 자신을 밀어낼지 모르니까.

하지만 그는 선수를 치지 못한 아쉬움을 겉으로 일절 드러내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사형, 제가 일단 경아를 만나보려고 합니다.”

“그래? 마침 잘 됐군. 그러잖아도 문인 장로가 그 아이의 마음을 떠보았으면 했는데, 너무 빨리 가버려서 물어보지도 못했다.”

“우진이와 함께 갈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끼리 말이 통하지 않겠습니까?”

공손백의 시선이 백리우진에게로 향했다.

“자신 있느냐?”

백리우진이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37장: 얼어붙은 구천성

 

 

충격에 빠진 곳은 공손백 쪽만이 아니었다.

독고태는 소성주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급히 나극을 찾아갔다.

나극도 보고를 받았는지 굳은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게. 소성주가 공손백을 만났나 보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모르겠군요.”

“들어간 지 일각도 되지 않아서 나온 걸 보면 중요한 이야기는 없었던 것 같아.”

“으음, 장인어른, 소성주가 왜 돌아왔을 거라고 보십니까?”

“글쎄, 그 아이의 속을 알 수가 없군.”

“정말로 답답해서 여행만 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에 나갔다가 돌아왔는지는 사마경만이 알겠지요.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분명합니다. 소성주가 돌아왔다는 것.”

“일단 제거할 방법을 찾아봐야겠군.”

“우리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공손백이 먼저 손을 쓸 테니까요.”

아마 공손백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일 것이다.

그 점만으로도 축하사절에 대한 마도무사들의 습격 때문에 쌓였던 울분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그건 그렇군.”

“그런데 저는 당분간 소성주를 제거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음? 왜?”

나극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주름진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며 이마에 주름이 가득 만들어졌다.

작년에만 해도 서너 줄기에 불과했는데, 지난 일 년 사이에 배는 더 늘어난 듯했다.

“소성주의 등장으로 습격에 대한 이야기가 잠잠해졌습니다. 그리고 소성주가 공손백에게 대항하면 우리에겐 득이 되지 않겠습니까?”

독고태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흐으음.”

“어쩌면 소성주를 제거하기는커녕 도와야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공손백이 모르게 해야겠지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나?”

“어차피 여기서 더 밀리면 공손백의 발이나 닦아줘야 합니다. 그러려고 거사를 치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하지만 한다 해도 조심해야 할 거네.”

“설령 우리가 소성주를 도운 걸 알아도 공손백은 우리를 내치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우리를 욕하지 않을 겁니다. 소성주를 돕는 것은 구천성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

독고태의 입가로 칼날처럼 가느다란 웃음이 번졌다.

그 웃음이 너무도 차갑게 느껴져서 나극조차 마음이 씁쓸했다.

‘내가 원한 것은 이런 게 아니었거늘…….’

성주를 죽이면 당장 천하제일인이 되어서 강호를 호령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오히려 공손백과 힘겨루기를 하면서 고민만 더 깊어졌다.

어떤 때는 괜한 욕심을 부렸다는 후회가 들 정도다.

거기다 사위인 독고태의 한 서린 조소를 보니 답답한 마음마저 들었다.

문제는 물러서고 싶어도 물러설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십 년 전에 그 늙은이의 말을 들었어야 했어. 그의 말을 들었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거늘, 나극, 어리석은 놈…….’

그때 독고태가 방점을 찍듯 한마디 덧붙였다.

“상황을 봐서 민아와 믿을 만한 아이 몇을 소성주 곁에 심어놓아야겠습니다.”

 

***

 

“알고 계셨습니까?”

정유가 서운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우문각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여행을 갔으니 돌아오는 거야 당연한 일 아니냐?”

“총사, 그래도 저에게는 말씀을 해주셨어야 대비라도 했을 것 아닙니까?”

정유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우문각은 그가 통곡을 하든 대소를 터트리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감정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정말 절묘한 날을 택해서 돌아왔어.”

“내일 오셨으면 더 굉장했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

“이틀 남은 것보다는 하루 남은 게 더 극적이잖습니까?”

“내 생각은 다르다. 만약 소성주가 내일 왔다면, 공손백은 이것저것 재지 않고 무조건 죽이고 봤을 거다.”

“그럼 인심을 잃을 텐데요?”

“와신상담하며 꾸어온 꿈이 물거품 되는 것보다는 인심을 잃는 게 낫지 않겠느냐?”

“그럼 오늘 온 것도 큰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오늘은 하루의 여유가 있다. 하루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는 아마 소성주를 어떻게 처리하는 게 최선의 선택인지를 놓고 밤새 고민할 거다.”

“만약 소성주가 정식으로 취임하겠다고 하면 죽이려 할까요?”

“당장 죽이려 하겠지.”

“성주의 자리에 포기하겠다고 하면……?”

“나중에 죽이겠지.”

“결국 죽이려는 마음인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대신 당장 죽이느냐, 아니면 나중에 죽이느냐의 차이가 있다. 그것은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지.”

정유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도 그 차이를 모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러겠지요. 당하지 않도록 준비할 여유가 있으니까요.”

“너도 죽기 싫으면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다. 피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한 순간만 방심해도 목이 달아날 수 있으니까.”

정유가 어찌 현 상황을 모를까.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그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처럼 힘없는 사람만 당하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진말(秦末)에 병법가는 많았지만, 한중(漢中)으로 쫓겨났던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울 거라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뜬금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정유는 의문을 품지 않고 맞장구 쳤다. 우문각이 가끔 그런 식으로 비유해서 뭔가를 설명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항우가 강했지 않습니까?”

“그래, 강했지. 하지만 나라는 힘만 있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힘만 앞세우고 학자를 등용하지 않는 나라는 세워져도 오래 못가는 법이지.”

그런데 항우는 힘에 비해서 머리가 못 따라갔다.

그가 아마 장량의 술수에 넘어가서 범증을 내치지만 않았다면 천하의 주인은 바뀌었을 것이다.

“공손백은 그걸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자가 아니니라.”

정유는 우문각의 말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라에 뛰어난 학자가 필요하다면, 강호무림의 세력에선 뛰어난 군사가 필요한 법.

어느 누가 이기든 군사를 함부로 죽이진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특히 공손백처럼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리고 이 우문각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야.”

그에 대해선 천하의 누구보다 정유가 가장 잘 알았다.

세상은 아직 우문각의 진정한 무서움을 모르고 있었다. 세상에 알려진 것이 그의 전부였다면 진즉 공손백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소성주께서 저들의 술수를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너는 소성주를 너무 얕보는 것 같구나.”

“그게 아니오라…….”

“남들은 소성주가 주모를 닮았다고 하지만, 내가 본 소성주는 성주님을 쏙 빼닮았다.”

“예?”

정유는 수긍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성주는 천궁마신과 닮은 구석이 없었다.

심통이나 부리고, 까칠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던 소성주 아닌가.

“내가 왜 그리 생각하는지 너도 곧 알게 될 거다.”

“총사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저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우문각은 더 이상 정유를 납득시키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될 테니까.

“은명객은 연락이 다 되었느냐?”

“내일 저녁까지는 성 안으로 들어올 겁니다.”

“다행이군, 아주 늦진 않겠어.”

담담히 말하며 찻잔을 든 우문각은 입술을 축였다.

정유 앞에서 표를 내진 않았지만, 손가락 끝에서조차 전율이 일었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이 어디까지 휩쓸까?

‘모든 걸 송두리째 날려버리면 최상인데…….’

그때 정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총사, 축하사절에 대한 습격사건 배후에 누가 있다고 보십니까?”

우문각의 입술 끝이 미미하게 틀어지며 기이한 미소가 번졌다.

“네가 볼 때는 누가 그들을 움직인 것 같으냐?”

“그걸 모르겠습니다.”

“그럼 모르는 대로 그냥 놔둬라. 소성주께서 돌아오신 이상 그 일은 이제 중요하지 않으니까.”

 

***

 

구천성의 광활한 대지와 고루거각이 통째로 얼어붙었다.

사람들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표정이 일제히 굳어버렸다.

사마경의 귀환이 몰고 온 겨울 태풍에 너무도 진한 피비린내가 실려 있는 것이다.

모두가 숨죽인 채 눈과 귀만 열어놓은 그 시각, 사마경은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던 자신의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매일 청소를 한 듯 아침에 나갔다가 돌아온 것처럼 깨끗했다.

그녀가 매일 봤던 물건은 모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없어진 물건은 거의 없었다.

달라진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문 쪽에 서 있는 장천운과 옆에 있는 유모도 많이 달라졌고.

그리고 이제부터는 더욱 많이 달라질 것이다.

피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까.

사마경은 한쪽 구석에 있는 서랍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침상 아래 구석진 곳에서 열쇠를 찾아낸 그녀는 자물쇠를 풀고 서랍장 문을 열었다.

서랍장 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매가 가늘게 떨렸다.

서랍장 안에는 한눈에 봐도 귀하게 여겨지는 물건들이 대충 던져놓은 듯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생일 때마다, 특별히 기념할 만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가 준 선물들.

받긴 했지만 아무리 귀한 물건도 사용하기 싫어서 처박아 놓았었다.

지금 생각하니 심장이 바늘로 찔러대는 것처럼 너무 아팠다.

‘죄송해요, 아버지.’

서랍장 안에서 물건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그 말을 계속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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