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107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73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107화
종리성학과 문인동, 사계 모두 표정이 굳어졌다.
본래 천은방을 움직이려 했던 목적은 단순했다.
그들을 이용해서 내부의 적을 쳐내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겠다는 것.
그런데 그 목적이 더욱 무섭게 변질되었다.
‘아예 지금 정리하시겠다는 건가?’
종리성학은 공손백의 눈빛을 보고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두 눈 깊은 곳에서 폭발하기 직전의 분노와 살기가 들끓고 있었다. 여차하면 그 폭발이 자신의 몸마저 삼킬지 몰랐다.
“알겠습니다. 즉시 주군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
백리호는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많이 끼고 찬바람까지 불어서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날씨만큼이나 기분도 찝찝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의 뒤에 서 있던 백리우진은 뜬금없는 질문인데도 담담하게 대답했다.
“대령주께서 한방 맞으셨습니다. 자의든 우연이든, 설마 사마경의 미모에 사람들의 마음이 저리 흔들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셨겠지요.”
“그러게 죽일 수 있을 때 죽였어야 했어.”
“숙부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니 앞으로가 중요합니다.”
“네 말이 맞다. 그래서 사형도 계획을 앞당겼지. 아마 곧 피바람이 불 거다. 장천운이 사마경 옆에서 떨어지면 그 자리를 네가 차지해야 한다.”
“장천운만 사라지면 사마경도 저번처럼 저를 내칠 수 없을 겁니다.”
“이번 일의 결과에 따라서 사형이 너를 중용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될 거다.”
“최선을 다해서 숙부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백리우진이 자신 있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겉으로야 백리호를 위해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속에서는 또 다른 욕망의 불씨가 자라고 있었다.
‘나를 위해서라도.’
문득 사마경의 얼굴이 떠올랐다. 차가운 그의 눈에서 열기가 피어났다.
‘그딴 놈에게 너를 뺏기진 않을 거다.’
그때 백리호가 고개를 돌려서 그를 직시했다.
“명심해라.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걸. 그건 너도, 나도 예외가 아니니라.”
“예, 숙부.”
***
구름이 점점 짙어지더니, 유시 초가 되자 멀리서 눈이라도 내리는 듯 허공이 뿌옇게 변했다.
“날씨 참 빌어먹게도 을씨년스럽네.”
투덜거리며 방으로 들어가려던 구산은 저만치서 걸어오는 여인을 보고 눈이 황소 눈만큼 커졌다.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갑자기 맑은 봄날처럼 느껴졌다.
차가움마저 느껴지던 바람이 갑자기 훈풍으로 변했다.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걸어오는 여인이 가끔 꿈속에서 나타나 그의 애를 태우던 류화였던 것이다.
그녀는 꿈속에서 봤을 때보다 실물이 훨씬 더 아름다웠다.
더구나 수혼대의 딱딱한 복장이 아닌, 여인에게 어울리는 하늘하늘한 녹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몸매도 전보다 훨씬 성숙해졌고.
그녀를 바라보는 구산의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쿵쿵거리며 뛰었다.
‘흐으, 저 가슴 봐. 정말 예쁘단 말이야.’
바라보는 동안 코앞까지 다가온 류화가 구산을 째려보며 가볍게 코웃음 쳤다.
“흥! 왜 그런 엉큼한 눈으로 쳐다봐?”
“음, 하, 하, 하. 오랜만이다, 류화. 어쩐 일이야?”
“신경 끄시지. 너 보려고 온 것 아니니까.”
류화가 톡톡 쏘아댔지만 구산의 미소는 더욱 짙어져만 갔다.
“그럼 누구 보려고 왔는데?”
“장천운.”
“우리 조장?”
“그래. 어딨어?”
“그야 임무수행 중이시지.”
“쳇, 아직도 소성주와 있나보군.”
“급한 일이면 내가 데려다주지.”
“됐네요.”
툭 쏘아붙인 류화가 구산을 흘겨보고는 몸을 돌렸다.
“어? 벌써 가는 거야?”
“가긴 어딜 가? 오늘부터 여기서 근무하게 될 거야.”
류화가 짜증을 내며 투덜거렸다.
아버지가 수혼대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천운과 함께 강련곡에서 수련했다는 게 이유의 전부였다.
사실 그녀도 장천운과 만나는 건 싫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바라던 바였다.
자신을 무시하던 그를 치마폭에 감싸놓고 자신의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문제는 목적이었다.
장천운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것.
아마 그 임무만 아니었다면 그녀도 구산의 말에 친절히 대답해주었을지도…….
‘흥, 소성주처럼 까칠한 여자가 뭐 그리 좋다고 딱 붙어서 다니는 거야?’
그때 뒤에서 구산이 말했다.
“류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다른 놈들은 몰라도 우진이란 놈하고는 가까이 지내지 마.”
류화가 홱 고개를 돌렸다.
“무슨 뜻이지?”
착잡한 표정의 구산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돌아오자마자 너에 대해 알아봤다. 별의 별 소문이 다 났더군. 처음에는 많이 화가 났어. 쫓아가서 물어볼까 생각해보기도 했지.”
“이……!”
“하지만 난…… 상관하지 않기로 했어. 넌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여자거든. 아직도 좋아하고.”
류화가 눈을 치켜뜨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몸을 날리며 주먹을 뻗었다.
구산은 충분히 피할 수 있는데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이 들은 소문은 조금 전 말한 것보다 훨씬 더 심했다. 심지어 매일 밤 딴 남자를 유혹해서 방으로 끌어들인다는 소문마저 있었으니까. 철저히 아닌 척해서 많은 사람이 모를 뿐.
그런데 자신이 대놓고 말했으니 얼마나 창피할까.
-류화의 마음이 풀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한 대 맞아주리라!
그런 마음이었다.
퍽!
정통으로 가슴을 얻어맞은 구산이 주르륵 뒤로 밀리더니 벽에 부딪쳤다.
류화가 씩씩거리며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구산을 노려보았다.
“멍청이! 그래서 넌 안 돼!”
“네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아.”
“정말……!”
“그래도 백리우진은 만나지…….”
퍽!
이번에는 정통으로 턱을 맞았다.
억지로 안 피한 것이 아니었다. 얼굴을 맞으면 표시가 날 테니 피하려 했다.
여자에게 얻어맞은 자국을 남기고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뭐, 때린 사람이 류화라면 이해해줄지 몰라도. 활짝 핀 모란꽃 같은 류화 앞에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남자는 거의 없으니까.
구산도 류화의 쌍심지 켠 눈을 본 순간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치켜 뜬 모습이 너무 예뻤다. 온몸이 짜릿해서 주먹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데 아무리 여자라도 무공을 익힌 주먹이다.
입술이 찢어진 듯했다. 피 맛이 짭짤하다.
혹시 턱뼈가 나간 건 아닐까?
‘끄응, 주먹질만 익혔나?’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류화의 주먹질에 나가 떨어졌을까? 문득 그런 엉뚱한 의문이 들었다.
‘그나마 공력을 싣지 않아서 다행이군.’
공력을 실었다면 입술이 아니라 턱이 묵사발 났을 것이다.
“이 멍청아! 내가 그런 말을 몇 살 때부터 들은 줄 알아?”
류화의 날선 목소리가 비수처럼 고막을 파고들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강련곡에 들어왔을 때도 그 비슷한 소문을 들었던 것 같다.
“아홉 살 때부터 들었어. 알아? 사람들은 나보고 남자를 잡아먹는 요물이 될 거라고 했지. 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았어. 왜 그런 줄 알아?”
구산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나오는 게 보였다. 구경거리가 생긴 걸 반기는 표정들이다.
특히 은명객이라는 것들은 실실 웃으며 신나 있다.
“엄마가 그런 말 듣는 걸 매일 보면서 자랐거든.”
그랬나?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사람들은 엄마가 아버지 없을 때 다른 남자들을 몰래 방으로 들인다고들 했어. 어때? 돼지도 많이 듣던 말이지?”
많이 들었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더욱 많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엄마를 믿었지.”
‘대단하군. 화정선자(花精仙子)가 결백하다는 걸 믿다니.’
화정선자는 류화의 어머니다. 구산도 그녀에 대한 소문을 류화에 대한 소문보다 배는 더 많이 들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그녀를 구천성 제일의 요부라고 할까.
“그리고 나도 믿어, 이 멍청한 돼지야. 아버지가 없을 때는 내가 항상 어머니와 함께 잤거든.”
결국 화정선자와 관련된 소문은 거짓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구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퍽!
다시 한 번 류화의 주먹이 구산의 배에 꽂혔다.
“욱!”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졌다.
“이야! 명치에 제대로 꽂혔네.”
“멋진 여잔데?”
“이봐, 아가씨. 그 아래쪽 다리 사이를 쳐 봐.”
류화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 구산을 노려보았다.
“멍청이 돼지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그런데 구산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실실 웃었다.
화정선자가 아니라면 류화도 아니다.
그걸 안 것만으로도 오늘 맞은 것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류화, 백리우진이 얼쩡거리면 거길 쳐버려.”
퍽!
류화는 마지막 결정타를 ‘그곳’에 날리고 홱 돌아섰다.
‘멍청이 돼지! 거기만 크지 대가리가 비었어.’
***
구산이 사타구니를 붙잡은 채 게거품을 물고 있을 때, 장천운은 우문각을 만나고 있었다.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장례가 끝난 후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소성주께선 일단 거처를 구천무원으로 옮길 겁니다.”
“그래, 그게 좋겠군.”
“대령주나 대장로 쪽에서도 이의를 제기하진 못할 겁니다. 어쨌든 임시라 해도 성주는 성주니까요.”
“그 다음은?”
“좀 쉬어야죠.”
우문각이 장천운을 노려보았다. 놀리는 것처럼 들렸나보다.
장천운도 피하지 않았다. 우문각의 눈이 기이해서 머리가 어질어질하긴 해도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입니다.”
“태상호법과 공 호법 살해사건은 그냥 놔둘 거냐?”
“율검당이 열심히 조사하고 있잖습니까?”
“그들이 밝혀내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 텐데?”
“그럼 총사께서 하시죠.”
“아직은 내가 직접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잘 알잖느냐?”
“그럼 어떡합니까? 제가 들쑤시고 다니면 대령주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아예 제거하겠다고 매일 살수를 보낼지도 모르죠. 총사께서도 ‘소성주를 놔두고 어딜 싸돌아다니느냐.’라고 야단치실 거고요.”
빈정거리는 말투.
우문각의 눈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장천운을 흔들지 못했다.
“으음, 확실히 컸어.”
“몇 번이나 죽을 뻔했죠. 그래도 악착같이 살아났더니 얻는 게 있더군요.”
입을 꾹 다문 우문각의 이마에서 굵은 주름이 꿈틀거렸다.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구천성에서도 다섯을 넘지 않았다.
장천운이 그 안에 들 만큼 강해졌다는 뜻이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생각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 아주 엉큼한 놈이어서 숨기고 있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닐 것이다.
“솔직히 말해봐라. 소성주께서는 복수만 하고 말 생각이시더냐,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으시더냐?”
“그건 소성주님께 직접 물어보시죠.”
“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보지 않았단 말이냐?”
“제가 호위무사라는 걸 잊으셨습니까? 호위무사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시는군요.”
“너는 이제 단순한 호위무사가 아니다.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아무리 커봐야 호위무사는 호위무사죠.”
“끄응, 빌어먹을 놈.”
이번에는 장천운이 우문각 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은명객을 보내주신 것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엉뚱한 면이 있긴 해도 쓸 만한 사람들이더군요.”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구나.”
“설마 골치가 아파서 저에게 떠맡기려고 보내신 건 아니죠?”
“싫으면 돌려보내라.”
“솔직히 말씀해 보시죠. 그 사람들, 왜 저에게 보낸 겁니까?”
장천운이 재차 묻고 뚫어지게 쳐다보자, 우문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너와 잘 어울릴 것 같더군.”
“어째 듣기가 좀 그런데요? 결국 저나 그 사람들이나 다를 게 없다는 뜻 아닙니까?”
“안 그러냐?”
“저는 그들에 비하면 매우 정상적인 사람이죠.”
“죽을 줄 알면서도 사령주를 놀려댔던 네가?”
“그때야 그 길밖에 없었으니까요.”
피식, 웃은 우문각이 정색하고는 말을 돌렸다.
“대령주도 이제 소성주의 아름다운 얼굴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진 않겠지?”
장천운도 표정이 심각해졌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졌군요.”
“너무 일찍 앞서나갔어.”
“어쩔 수 없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소성주의 얼굴을 정말 못생긴 얼굴로 바꿀 수도 없잖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좌우간 대령주가 위기감을 느낀 이상 장례가 끝나면 본심을 드러낼지 모른다. 소성주께 최대한 조심하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은명객 외에 또 숨겨놓은 사람이 있으면 미리 알려주시죠.”
“더는 없다.”
“정말입니까?”
“내가 왜 너에게 거짓말을 한단 말이냐?”
장천운은 우문각의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등을 의자에 기댔다.
“정말로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해봐라.”
“그 나이에 왜 혼자 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