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1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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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34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103화
얼마나 지났을까, 이마를 찌푸린 채 겨우 분노를 다스린 공손백이 물었다.
“사제, 지금 호법전 상황은 어떻게 되었느냐?”
“주도권을 사마경에게 빼앗겼습니다. 암살미수 건에 대해서 혁련광과 방철산까지 방방 뜨는 바람에…….”
“정말 빌어먹을 일이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백리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손백의 말 몇 마디에 따라서 구천성의 밤이 달라질 것이다. 작심을 하고 명령을 내리면 전쟁이 일어날 테니까.
공손백은 굵은 눈썹이 미간에서 닿기 직전까지 잔뜩 이마를 찌푸렸다.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서너 번 두들기더니 짧게 말했다.
“사마경을 당분간 그냥 놔두어라.”
“오늘 일에 원한을 품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무리를 해서라도 오늘 결판을 내버리는 것이…….”
“어차피 그 아이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당분간 우진이에게 잘 지켜보라고 해.”
공손백이 툭 쏘듯 말했다.
조금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
백리호는 할 수 없이 자신의 주장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사형.”
“사제, 우문각이 완전히 마음을 돌린 것 같으냐?”
냉랭히 말을 뱉은 공손백이 백리호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사형. 지금이라도 제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공손백도 우문각이 자신을 배신했다면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문제는 우문각과 이런저런 사연으로 엮여 있는 고수들이 그 동안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다.
게다가 비령각의 조직 구성도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탄탄해서 제거하기가 쉽지 않았다. 단편적인 면만 봐도 사밀령과 첩밀각이 우문각의 수족처럼 움직였다.
제거하려다 실패하면 오히려 역공을 당할 가능성마저 있는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그를 제거하지 않고 끌어들이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 있었다.
사마경과 우문각의 연결고리가 되는 놈.
“우문각보다는 장천운이라는 놈을 먼저 제거해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그놈이 마음에 걸려.”
“알겠습니다, 사형. 그놈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백리호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두 사람은 오종과 배청이 장천운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오종이 자존심 때문에 자세히 말하지 않은 것이다.
***
흑월조와 수혼대가 호법전의 사건 현장을 장악했다.
암살사건으로 인해서 공손백도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사마경은 부상을 입었음에도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태상호법이 죽고 자신 역시 암살을 당할 뻔했는데 어찌 그냥 돌아간단 말인가.
장천운도 우문각도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싸늘한 표정의 그녀가 여철숭의 방문으로 다가가자, 장천운이 나서서 방문을 열었다.
방문 앞에 선 우문각이 말했다.
“방안으로는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소.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은 터라 증거가 훼손될 수 있어서 그러니 이해해 주시오.”
결국 사마경과 소연추, 우문각, 냉원상, 장천운 만이 안으로 들어가고, 혁련광과 방철산 등은 방문 근처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그나마도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발걸음 하나하나를 조심해서 옮겨야 했다.
방안에는 등잔불이 모두 네 개 있었는데, 달랑 하나밖에 켜져 있지 않아서 어두침침했다.
장천운은 먼저 나머지 등잔불 세 개에 모두 불을 붙였다.
방안이 환해지자, 바닥에 흥건한 핏물이 더욱 시뻘겋게 보였다.
핏물은 침상과 탁자 사이에 가장 많이 고여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오갔는지 발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여철숭은 본래 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듯 사람 형태의 핏자국이 탁자 아래에 선명했다.
“조사를 한다더니 엉망으로 어지럽혀놓기만 했군.”
냉원상이 냉랭히 말했다.
그의 말대로 사건 현장은 이미 훼손된 상태였다. 증거를 찾아서 내밀어도 아니라고 하면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사마경은 여철숭이 눕혀져 있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장천운이 그녀의 곁에서 여철숭의 시신을 살펴보았다.
“결국 나 때문에 돌아가셨군요. 죄송해요, 여 할아버지.”
그녀는 오랜 만에 여철숭을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무려 십여 년 만이었다.
“잘 아는 사람이 살해한 것 같습니다, 소성주.”
“거처에서 살해했으니 당연히 아는 사람이겠지.”
“아는 사람 정도가 아닙니다. 아주 친할 겁니다.”
“그래?”
사마경은 물론이고 소연추와 냉원상, 심지어 우문각도 장천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장천운은 전에도 남들이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짚어낸 적이 있었다. 남조연의 죽음 때도 그랬고, 육선기가 모함을 받았을 때도 그랬다.
모두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태상호법께선 일절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해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는 뜻이지요. 게다가 저항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만큼 근접해 있었습니다.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지금과 같은 시기에 아무 의심도 없이 바로 옆에 두지 않았겠지요.”
우문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말 대단한 놈이다. 한번 쓱 살펴본 것만으로 그런 추측을 하다니.
그때 장천운이 여철숭의 굳어진 왼손을 잡고 구부러진 손가락을 강제로 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우두둑 소리와 함께 손가락이 펴졌다.
손바닥에 혈선이 두 줄기 그어져 있었다.
“약 두 치 너비의 예리한 단검에 당했습니다. 그리고 태상호법과 범인은 제법 많은 말을 나누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지?”
사마경이 고통도, 슬픔도 잊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쳐다만 봤다.
방문 쪽에 서 있던 혁련광과 방철산조차 귀를 쫑긋 세웠다.
“손으로 단검을 잡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깊숙이 파고든 상태였을 겁니다. 어쨌든 그로 인해서 손바닥에 검날의 흔적이 남았습니다. 두 줄기이니 도가 아닌 검일 것이고, 흔적의 너비가 두 치 정도 되니 검날도 그 정도 될 겁니다.”
아주 간단한 추측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정말로 궁금해 하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손바닥에 난 두 줄기 흔적이 옆으로 쓸렸습니다. 깊게 난 흔적은 처음에 난 것 같고, 나중에 옆으로 쓸린 것은 범인이 재차, 조금 더 깊게 찔러 넣으며 비틀었을 때 난 검흔처럼 보입니다. 옆구리가 뚫린 상태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이야기가 끝나자 마무리를 지은 거죠.”
“처음부터 심장을 찌르며 비틀었을 수도 있잖아?”
“그랬다면 심장이 터져서 단검을 세게 움켜쥘 수도 없었을 것이고, 상처에서 난 피가 손목 쪽으로 흐르지도 않았을 겁니다.”
장천운이 여철숭의 손을 들어서 보여주었다.
손바닥에서 흐른 피가 손목 쪽에서 굳어 있었다. 단검을 오래 잡고 있지 않았다면 손바닥의 상처에서 그 정도의 피가 흘렀을 리 없다.
“보시다시피 태상호법의 손바닥은 무두질한 가죽보다 질기고 철판처럼 강합니다. 어지간한 검으로는 상처를 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첫 번째 흔적이 깊고 선명하게 나 있지요. 그만큼 상대의 단검이 예리하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천운은 말을 맺고 여철숭의 시신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정말 대단해. 한번 보고 어떻게 그걸 다 생각해 냈어?”
“어렵지도 않은 일인데요 뭐.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죠.”
그럼 다른 사람들은?
조금도 머리를 굴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자, 장천운은 슬그머니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저길 보십시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그를 따라서 바닥을 바라보았다.
장천운은 내심 안도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태상호법의 시신이 있던 흔적에서 오른손이 있던 곳을 보시면…….”
사람들의 시선이 자동으로 이동했다.
그곳에 뭐가 있는데? 그런 표정으로.
“보이십니까?”
사마경이 눈을 흘겼다.
“내 눈은 천운 눈만큼 안 좋으니까, 그냥 말로 해.”
“바닥에 긁힌 자국이 있죠?”
있었다. 말해주지 않았으면 찾지도 못할 만큼 작고 거친 흔적이.
더구나 누군가가 피 묻은 발로 밟아서 다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피가 마르지 않았다면 그것조차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범인을 알려주기 위해 태상호법이 남긴 거라고 보는가?”
우문각이 말했다. 자신도 하나쯤은 미리 말하고 싶었다. 호승심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확실히 특이한 눈을 가진 분이라 제일 먼저 알아보시는군요.”
‘이 자식이!’
거기서 왜 눈을 따져?
다행히 사마경이 질문을 던져서 그 일은 그냥 넘어갔다.
“그냥 가위표가 그어진 것 같은데, 이걸로 뭘 알 수 있지?”
“죽어가는 분이 얼마나 자세히 글자를 쓸 수 있었겠습니까?”
잘해야 서너 번 그을 수 있을까?
사마경이 흔적을 다시 노려보았다.
장천운이 탁자 위의 붓을 집어서 피가 굳은 부분을 문질렀다.
윗부분이 드러나면서 선이 하나 더 드러나자, 마치 우(又)자처럼 보였다. 그 위에 콩알만큼 작은 핏방울이 굳어 있었다. 바닥의 파인 곳에 피가 고여서 굳은 듯했다.
“소성주, 이것은 당분간은 우리만 알고 있는 것으로 하죠.”
“왜?”
“더 명확한 증거를 찾아서 꼼짝 못하게 옭아매지 않으면 강한 반발에 역효과만 날 수 있습니다.”
우문각도 그 말에 찬성했다.
“그건 장 조장의 말이 맞소, 소성주. 어차피 이것만으로는 살해범을 단정 지을 수 없소이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해. 대신 범인을 반드시 찾아내, 천운.”
“알겠습니다.”
***
사마경은 소천전으로 돌아가자마자 치료를 받았다.
공격을 받으면서 옷자락만 찢어진 게 아니었다. 깊진 않지만 등 쪽에 상처가 났다. 호법전에서 대충 싸매놓았는데 등에서 흐른 피가 엉덩이까지 흘러내렸다.
그녀에 대한 치료는 연송하가 맡았다. 그녀를 비롯한 이조는 강련곡 수련의 마지막 즈음에 간단한 의술도 배웠던 터라 치료하는 손길이 익숙했다.
사마경은 상의가 반쯤 내려져서 어깨의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도 장천운을 방안에 남게 했다.
백옥처럼 하얗고 윤기 나는 살결이 그대로 드러난 상태. 장천운은 돌아서서 치료가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천운, 그 암습자들, 백부가 보냈다고 생각해?”
사마경이 그의 등 뒤에 대고 물었다.
장천운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아닐 겁니다.”
“그럼 누가 보냈을까?”
“구천성이 안정되는 걸 바라지 않는 자들이겠죠.”
“그런데 어떻게 내가 호법전에 가는 걸 알았지?”
“소성주를 살해하려고 잠입했다가 호법전으로 가는 걸 보고 따라왔을 수도 있죠.”
“하긴 천운이 소리를 오죽 크게 질렀어? 아마 멀리 숨어 있었어도 들렸을 거야.”
“소성주도 큰 소리로 말했지 않습니까? 밤중이어서 그 정도 목소리면 십 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었을 겁니다.”
사마경을 치료하던 연송하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이 말싸움 할 때야?
“돌아서 있으니까 이야기 나누기가 불편해. 몸 좀 돌려봐.”
사마경이 투덜댔다. 하지만 장천운은 돌아서기 전에 먼저 연송하에게 물어보았다.
“송하야, 치료 끝났어?”
“이제 싸매기만 하면 돼요.”
“그럼 다 싸맨 다음에 돌아서겠습니다, 소성주.”
“전에 다 봤으면서 왜 그래?”
“제가 언제 봤습니까?”
“곽산에서 내가 목욕할 때 봤잖아?”
“그건…….”
보려고 해서 본 것이 아니다. 물을 뜨러 갔는데 사마경이 물속에 있었다.
“목욕하는 줄 모르고 아침이어서 물을 뜨러 간 거 아닙니까?”
“어쨌든 본 건 본 거잖아. 송하는 어떻게 생각해?”
“예?”
“볼 거 다 본 사람이 어깨 좀 본다고 뭐가 어때서 돌아서 있는 거야? 안 그래?”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연송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곳에서 돌아온 지 이제 이각밖에 지나지 않았다. 암살의 위협 와중에 어깨까지 베어진 상태고.
농담은커녕 분노를 삭여도 모자랄 시간이다. 그런데 철없는 소년소녀처럼 농담이나 하다니.
남들이 지금 하는 대화를 들었으면 뭐라고 할까?
정상으로 보지는 않겠지?
하지만 연송하는 그런 사마경이 안쓰럽기만 했다. 농담조로 말하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이제 갓 스무 살 된 여인이 죽음의 위협 속에서 강인하게 대처한다는 게 어찌 쉬운 일일까.
거기다 오늘은 암습까지 받아서 하마터면 죽을 위기를 겪었다. 그것도 자신이 주인이나 다름없는 구천성에서.
그녀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농담이라도 해서 가슴 속 깊숙한 곳의 공포를 몰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기가 힘드니까.
아마 장천운도 그런 마음을 알고 맞장구를 치고 있는지 모른다.
연송하도 넌지시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때는 고의로 본 것이 아니니 조장님 잘못이라고만은 할 수 없잖아요.”
“쳇, 누가 동생 아니랄까봐 천운 편만 드네.”
“그게 아니라…….”
“나도 동생 할까? 아까 천운이 전음으로 막 반말을 하던데.”
그에 대해선 장천운도 할 말이 있었다.
“그거야 말 한마디 더 하는 시간도 아까웠으니까 그랬던 것이죠.”
“이제 다 싸맸어. 돌아서.”
장천운은 무심코 몸을 돌렸다. 그러다 깜짝 놀라서 다시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