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1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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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34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136화
“천운, 대봉문에 가서 내 말을 전하고 답을 받아와. 이곳은 걱정할 것 없어. 철무 아저씨와 구양 대협이 있으니까.”
장천운은 구양명을 바라보았다.
세 번째 약속이 끝났으니 더는 붙잡아둘 명분이 없었다. 그런데 구양명이 어깨를 슬쩍 추켜올리며 말했다.
“다녀오게. 어차피 약속은 소성주를 지키는 것 아닌가?”
아직 냉원상을 제외한 간부들은 그의 정체를 눈치 채지 못했다. 워낙 혼전이었던 데다, 오직 살상만을 위한 패도무공을 사용하다 보니 그의 무공을 제대로 알아본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철무의 존재 때문에 그의 모습이 가려진 면도 없지 않았다.
설마 천한마검 구양명이 또 다른 고수와 함께 사마경을 호위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장천운은 어렴풋이 구양명의 마음을 짐작하고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가 남는다면 사마경에 대한 걱정은 덜어도 될 듯했다.
“알겠습니다, 소성주. 전하실 말씀이 있으면 해보십시오.”
“신천검문이 무너졌으니 대봉문에게 그들을 대신하라고 해. 물론 충성서약도 받아야겠지. 만약 거부하면…… 대봉문이라는 이름이 강호에서 지워질 거라고 해. 아주…… 철저히 쓸어버릴 거니까.”
***
장천운은 그나마 성성한 대원들 중 다섯만 데리고 신천장을 출발했다.
사공명신과 두양양, 선우상, 구산, 철상문.
그들은 신천장을 나서자마자 서쪽을 향해 달렸다.
대봉문까지 거리는 백오십 리, 경공을 펼쳐서 달려가면 두 시진이면 갈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 대봉문을 향해 달리는 장천운의 표정이 왠지 어두웠다. 밤이어서가 아니었다.
‘뭔가 달라졌어.’
사마경이 달라졌다. 어느 정도 달라졌는지, 무엇이 달라졌는지 확실치는 않았다.
그냥…… 달라졌다.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따뜻한 감정이 서서히 차갑게 식는 걸까?’
가능성은 충분하다.
아버지를 오해하고 오랫동안 싫어했던 그녀다. 그 때문에 사실을 알고 나자 가슴이 남보다 더 아팠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아버지를 죽인 자들에 대한 원한도 더 큰 것이겠지.
‘아니면 사람이 죽는 걸 너무 많이 봐서?’
그럴지도 모른다. 단 며칠 사이 눈앞에서 수백 명이 죽지 않았는가 말이다.
피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법이다.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내장이 쏟아지고, 머리가 굴러다니는 전쟁터에서 누가 태연할 수 있겠는가.
세상 어려운 줄 모르고 어린 시절을 살아온 그녀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공손백과 나극을 상대로 한 신경전으로 그 동안 마음고생이 심해서 그럴 수도 있어.’
그 점도 이해가 간다. 아마 일반 사람이었다면 진즉 겁에 질려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쳤을 것이다. 정신이 돌아버렸을지도 모르고.
‘후우우우우.’
소리 없이 한숨이 나왔다.
장천운은 사마경이 너무 차가워지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오만하고 도도한 것 같아도 여린 마음을 지녔다.
그런 여자가 성격이 변해서 차가운 심성을 지니게 되면 정말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테니까.
그리 되면 불행한 삶을 살지 모른다.
장천운이 진심으로 염려하는 일은 바로 그것이다.
그녀가 불행해진다는 것.
‘소성주는 견뎌낼 수 있을 거야. 아니 견뎌내야 해. 다른 많은 사람을 위해서라도.’
자신을 위해서라도.
“대주.”
두양양이 그를 불렀다.
장천운은 그제야 상념을 떨쳤다.
“왜 그러시오?”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요?”
“별 것 아니오.”
“그런데 왜 그리 깊은 상념에 잠겼어요?”
“그냥 생각할 것이 좀 있었소.”
그러고 보니 두양양의 눈은 밤에도 각기 다른 눈빛이 구별되었다. 정말 특이한 눈이다.
사마경과 달리 열기가 느껴지는 눈빛.
‘소성주도 곽산에 있을 때는 저런 눈빛이었는데…….’
그런 눈빛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때 사공명신이 물었다.
“대주, 지금 삼십 리쯤 달렸는데, 방향은 맞아?”
장천운은 속이 뜨끔했다.
깊은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삼십리나 달려왔나 보다. 문제는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방향에 대한 생각마저 잊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구름 사이로 별이 보였다. 별도 안 보였으면 아마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했을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길을 잘못 들어서 그만큼 시간을 지체했다. ―그 당시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 시간 차이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좌측으로 조금 꺾어져야할 것 같군.”
장천운은 태연히 말하고 방향을 틀었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세 번에 걸쳐서 꺾어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양양은 관찰력이 유난히 뛰어나서 그가 세 번이나 방향을 틀었다는 걸 확실하게 눈치 챘다.
<하마터면 엉뚱한 곳으로 갈 뻔했군요.>
쓴웃음을 지은 장천운도 전음으로 물었다.
<어떻게 알았소?>
<저는 운남의 야생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죠. 그래서 하늘의 별과 달을 보고 방향을 추정해내는 기술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요.>
<운남의 야생에서? 그럼 가족은……?>
<일곱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 년 동안 혼자 지냈어요. 그러다 우연히 제가 사는 곳을 지나가던 사부님 눈에 띄었죠.>
당시 검성 백정천은 사문을 떠난 사제를 찾아가던 길이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숲속에서 두양양을 만난 그는 처음에만 해도 짐승처럼 살아가는 그녀를 불쌍해서 데려갔다.
하지만 곧 그녀의 뛰어난 자질을 알아보았고 자신의 직전제자로 삼았다.
<창궁무전 때문에 강호에 나온 것 같은데, 구천성에 이렇게 오래 있어도 괜찮소?>
<사실…… 창궁무전은 핑계였어요. 그냥 제가 사문을 떠나온 거죠.>
<왜……?>
달빛에 비친 두양양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오.>
장천운은 그녀에게 대답을 강요할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두양양이 말했다. 마치 가슴 깊숙이 묻어두었던 뭔가를 꺼내듯이.
<사형이…… 저를 원했거든요. 문제는 그 사형에게 이미 부인이 있다는 거였죠.>
장천운은 두양양에게 남모를 고충이 있었다는 걸 알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운남 오지에서 짐승처럼 살아온 그녀는 명문출신과 거리가 멀었다. 특이한 미모가 아니었다면 많은 괄시를 받고 자랐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특이한 미모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부인이 있는 사형이 그녀를 원했다는 것만 해도 그렇다.
장천운은 그 말만 듣고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나쁜 새끼!’
그런데 두양양이 넌지시 물었다.
<좀 전에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했어요? 혹시 소성주 때문에 그래요?>
장천운도 이번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소성주가 변한 것 때문에 걱정되어서요?>
이번에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너무 걱정 마세요. 소성주는 약한 사람이 아니에요. 약하긴커녕 무척 강한 여자죠. 경험만 쌓으면 앞으로 더 강해질 거예요.>
<그래서 걱정하는 거요. 너무 강해질까 봐…….>
***
장천운 일행이 그들을 만난 것은 남양을 삼십 리쯤 남겨놓았을 때였다.
덩치 큰 장한 넷이 멘 가마가 밤길을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구름이 어느 정도 걷히고 달빛이 밝지 않았다면 곰 네 마리가 가마를 등에 지고 걷는 걸로 착각했을지 몰랐다.
가마를 멘 자들 모두 그만큼 덩치가 컸다.
그 거한들은 가마를 멘 채 반대편에서 장천운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장천운은 그들을 바라보며 걸음을 늦췄다.
그 사이 빠르게 다가오던 가마도 속도가 느려지더니 장천운의 전면 삼 장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딸랑, 딸랑, 딸랑.
가마에서 방울소리가 울렸다.
밤공기를 타고 울리는 방울소리는 오싹한 느낌이 들만큼 맑았다.
“비켜라!”
가마를 멘 네 거한 중 전면의 우측을 맡고 있던 자가 눈을 치켜뜨고 다그쳤다.
맑은 달빛이 그의 눈동자에 반사되어서 차갑게 번뜩였다.
장천운은 고개를 틀며 가마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길이 좁긴 해도 비켜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비켜서지 않았다.
가마 안에서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심지어 구양명보다 더하면 더했지 뒤떨어지지 않을 듯했다.
가마에 타고 있는 자가 누구기에 저런 기운을 지녔단 말인가?
누군데 이 이른 새벽에 길을 재촉하는 걸까?
문제는 좋지 않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더구나 가마가 향하는 방향이 동쪽이다.
궁금증을 풀지 않으면 찝찝함을 계속 안고 가야할 터. 그는 일단 가마 속 인물의 정체를 알아보기로 했다.
“가마에 타고 계신 분은 뉘쇼?”
장천운의 질문에 가마를 메고 있던 거한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너는 알 것 없다.”
“알려주지 않겠다면 우리도 비킬 수 없소. 계속 가고 싶다면 당신들이 비켜가시오.”
“흥! 어린놈들이 겁이 없구나!”
“혹시 아오? 어디서 뭘 훔치고 도망치는 중인지.”
장천운이 억지나 다름없는 고집을 부리자, 사공명신도 한마디 거들었다.
“저 가마 속에 훔친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 말이 끝난 순간.
촤르르르.
가마의 전면이 위로 올라갔다. 달빛이 비추자 가마 안쪽이 반쯤 밝게 드러났다.
가마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장식도 화려했다.
그곳에 백색 곰이 한 마리 앉아 있었다.
사람을 닮은, 아니 늙은 곰을 닮은 사람이었다.
“재미있는 놈들이군.”
그 곰 닮은 노인이 장천운을 보며 말했다.
장천운은 미간을 좁히고 가마 안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강호인명록 안의 이름이 빠르게 나열되었다. 그 중에서 오래 전에 사라지다시피 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혹시……?’
그때 사공명신이 고개를 틀며 말했다.
“정말 괴상하게 생긴 노인네군. 그 돼지 같은 덩치를 들고 이동하려면 힘깨나 들겠는데?”
“잠깐……!”
장천운이 사공명신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을 때는 이미 ‘돼지’라는 말이 나온 후였다.
곰 닮은 사람, 곰 닮은 돼지 노인, 표현이야 어쨌든 덩치가 가마 안을 꽉 채우는 노인의 눈에서 붉은 광채가 번뜩였다.
“흐흐흐흐, 확실히 재미있는 놈들이야.”
순간, 가마 안에 있던 노인이 튕겨지듯 밖으로 나오는가 싶더니 허공을 날았다. 마치 폭발한 화산에서 바윗덩이가 튕겨져 날아드는 듯했다.
사공명신은 위험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눈 깜박할 사이 사공명신의 코앞까지 날아간 노인이 두 손을 뻗었다.
노인의 팔은 허벅지만큼이나 굵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고, 머뭇거림도 없었다.
콰과과과!
어둠을 부수며 단숨에 날아든 거대한 손이 사공명신을 덮쳤다.
“젠장!”
외마디 쌍소리를 내뱉은 사공명신은 다급히 몸을 틀면서 검을 뽑았다.
노인의 손만큼이나 빠른 그의 검이 어둠을 갈랐다.
퍼버벅!
아무리 다급하게 휘두른 검이라 해도 절정고수인 사공명신이 펼친 공격이다. 그런데 검에 적중된 노인의 손은 멀쩡했다.
오히려 떵! 하며 천공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사공명신이 정신없이 물러섰다.
사공명신을 물러서게 만든 노인은 재차 손을 쓰려다 멈칫하더니 땅에 내려섰다.
쿵!
단지 내려섰을 뿐인데 대지가 뒤흔들렸다. 마치 거대한 바위가 떨어진 듯했다.
땅에 내려선 노인은 이마를 찌푸리고 장천운을 쳐다보았다.
자신을 돼지라 표현한 놈을 잘근잘근 뭉갤 작정이었다. 그런데 재차 손을 쓰려는 찰나에 섬뜩한 기운이 날아들었다.
그 기운은 도검에도 끄떡없는 그조차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날카로웠다.
자신의 의지를 꺾은 기운의 주인은 바로 저놈, 자신을 처음에 막아섰던 어린놈이다.
“제법이구나. 노부를 멈춰 서게 하다니.”
장천운은 차가운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최근에 익힌 뇌정지를 펼치고도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 기껏해야 노인의 공격을 막았을 뿐.
그렇다고 실망하진 않았다. 상대의 정체를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노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포권을 취했다.
“오왕 중의 교왕(轎王)께서 세상에 다시 나오신 줄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