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157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25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157화
선등경이 워낙 강경하게 나가자 당초당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채응도도 더 이상 선등경에게 권하지 않았다.
때로는 자존심이 목숨보다 더 귀할 때가 있다. 선등경처럼 강호에서 위명을 떨친 고수일수록 더 그렇다.
그는 아마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공적인 귀독마종을 살려주었다는 말을 듣는 게 죽기보다 더 싫을 것이었다.
검을 움켜쥔 채응도는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당초당에게 다가갔다.
잘된 일이었다. 사실 귀독마종을 살려주는 건 그가 더 원치 않았다.
“당초당, 네놈의 운도 여기까지구나. 순순히 말할 때 해독약을 내놓도록 해라. 말하지 않으면 사지를 하나하나 잘라버릴 것이니라.”
당초당은 입을 꾹 다문 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세상에 겁날 것이 없던 그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지금은 두려움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불수는 없었다. 해독약을 준다고 해서 살려줄 놈이 아니라는 걸 그가 왜 모를까.
“나를 살려준다는 약속부터 해라, 채응도.”
“해독약부터 내놓아라. 그럼 고려해보지.”
“마혈을 풀어주면 주마. 손을 움직여야 해독약을 꺼내줄 것 아니냐?”
“혈도를 풀어달라고? 네놈을 어떻게 믿고?”
“해독약은 말로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절하게 배합하지 못하면 독의 활동성만 키울 뿐이다.”
“흥! 그럼 배합비율을 먼저 말해봐라.”
“배합은 나 외에 누구도 할 수 없다.”
채응도는 질문을 멈추고 일단 당초당의 품속을 뒤졌다.
색이 다른 네 개의 병과 작은 상자 등 십여 가지 물건이 품속에 들어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 물건들을 꺼냈다. 어디에 어떤 독이 묻어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독을 해독하려다 오히려 그가 중독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해독제지?”
“흐흐흐, 어디 알아 맞춰봐라. 단,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너는 물론 저 영감태기도 염라대왕을 만나러 가게 될 거다.”
채응도가 눈썹을 송충이처럼 꿈틀거리고는 검을 다리 쪽으로 가져겼다.
“결국 다리 하나가 잘려야 정신을 차리려나 보군.”
당초당이 다급히 소리쳤다.
“손의 혈도만 풀어주면 해독제를 배합해준다니까!”
“내가 네놈의 교활함을 모를 줄 아느냐?”
채응도는 검을 높이 들었다. 일단 다리 하나쯤 잘라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드디어 동생의 복수를 하게 되었구나, 이 악독한 놈!”
그때였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채응도는 당초당의 다리를 내려치려다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이 언덕 위에서 날듯이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달려오는 속도가 무척 빨라서 순식간에 거리가 가까워졌다.
적어도 절정 수준에 이른 경공을 펼치는 자들이었다.
‘누구지?’
66장: 무적장(無敵莊) 사람들
언덕 너머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고함치는 소리, 강력한 기파의 충돌.
장천운은 언덕 너머에 청각을 집중했다.
언뜻 ‘귀독마종’이라는 이름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쾌재를 부른 그는 경공을 펼쳐서 언덕을 넘어갔다.
언덕 위에서 바라보니 저 아래쪽 백여 장 떨어진 곳에 대여섯 명이 서 있었다.
무기를 든 그들은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조금 전의 고함친 소리대로라면 쓰러져 있는 자가 귀독마종인 듯했다.
그때 한 사람이 귀독마종을 향해 검을 쳐드는 게 보였다.
다급해진 장천운은 언덕 아래로 신형을 날렸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장천운은 채응도와 삼 장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서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를 따라오느라고 전력을 다한 왕규가 벌게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맞습니까?”
왕규가 분노의 눈길로 당초당을 보며 조롱하듯 말했다.
“당 늙은이가 맞네. 악독한 짓만 하더니 아주 꼴좋게 됐군.”
그를 알아본 당초당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네놈은……?”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은 몰랐을 거다. 때려죽일 늙은이. 그러게 마음을 곱게 써야지.”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이놈. 네놈은 내가 아니면 얼마 살지도 못할 텐데?”
당초당이 협박조로 다그치자, 왕규의 입술 끝이 길게 늘어졌다.
“늙은이 마음대로 안 될 걸? 염왕이 아직은 나를 데려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야. 늙은이가 내게 심어 놓은 독이 거의 다 해독되었거든.”
“뭐라고? 어떻게……?”
당초당은 정말로 놀란 듯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홉떴다.
한편, 장천운은 왕규가 당초당을 향해서 으르렁거리는 걸 놔두고 채응도를 바라보았다.
“귀독마종에게 알아볼 것이 있습니다. 손을 쓰기 전에 물어볼 기회를 주시지요.”
채응도는 장천운과 왕규가 귀독마종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자들이 누군데 귀독마종을 안단 말인가?
“그대는 누구냐?”
“저는 운천이라고 합니다.”
“어느 문파 사람이냐?”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서 제 마음대로 밝힐 수 없으니 이해해 주십시오.”
채응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당당한 말투나 흔들림 없는 표정, 눈빛이 맑은 걸 봐서 마도인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더 정체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궁금증을 풀겠다고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었다.
“그대가 누군지 몰라도 우리 역시 급하다. 지금 본 장의 어른께서 중독되셨다. 이놈에게 해독약을 얻어내지 못하면 목숨이 위험해.”
“그럼 겸사겸사 제가 이 자를 심문해서 해독약을 얻어내겠습니다.”
“그대를 어찌 믿고 어른의 목숨을 맡긴단 말이냐? 비켜서 있어라.”
“고문을 해보셨습니까?”
정파의 고수로 알려진 채응도다. 그는 정식으로 남을 고문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고통을 주는 정도뿐.
“해보진 않았지만 이놈의 입을 열게 할 자신은 있다.”
“최소한 고문하는 것은 제가 대협보다 나을 겁니다. 그 전에…….”
장천운은 말꼬리를 길게 끌며 선등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선등경의 입술은 조금 전보다 더 시퍼렇게 변한 상태였다.
“죄송하지만 노선배의 피를 조금만 저에게 주시지요.”
“내 피를?”
선등경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독의 성질을 알아보려는 것이니 몇 방울만 있으면 됩니다.”
“독에 대해 잘 아는가?”
“아주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남보다는 아는 게 조금 더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시나 괴상한 대답.
선등경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갈수록 독을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하긴 어차피 독으로 인해 죽어가는 목숨. 피 몇 방울이 대수랴. 그 피를 주고 의문을 풀 수만 있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그는 자신의 팔을 손톱으로 그었다. 칼날에 그어진 것처럼 살이 갈라지고 피가 뭉클거리며 흘러나왔다.
손바닥에 피를 받은 그는 장천운을 향해서 피 고인 손을 내밀었다.
“제가 전하겠습니다.”
옆에 서 있던 무사가 황급히 그의 앞으로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다.
장천운이 급히 그를 말렸다.
“독혈을 잘못 만지면 귀하도 중독될 거요.”
무사가 그 말에 멈칫했다.
장천운이 다시 말했다.
“검에 묻혀서 줘도 되오. 몇 방울만 있으면 되니까.”
그제야 무사는 검을 빼서 내밀었다. 선등경이 검에 손바닥의 피를 쏟았다.
장천운은 무사가 피 묻힌 검을 내밀자 손가락으로 피를 찍었다.
그러고는 사람들이 놀라든 말든 혀에 가져다 댔다.
싸한 맛과 함께 강렬한 독기가 느껴졌다. 일반 사람이라면 혀가 타는 고통에 구토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천하극독의 실험체가 되었던 장천운에게는 그저 싸한 맛 정도가 전부였다.
장천운은 피에 서린 독기운을 음미하고는 쾌재를 불렀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남사명은 독의 종류에 따라서 해독 방법이 달라진다고 했다. 그중에는 독왕인 그조차 해독하기 어려운 성질의 독이 있다고 했다.
왕규가 복용한 독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왕규는 그 점을 잘 알기에 초조한 표정으로 넌지시 물어보았다.
“왜 그런가?”
“저분께서 당한 독은 왕 선배가 당한 것과 성질이 다릅니다.”
“그래?”
“성질이 다른 독이라면, 굳이 귀독마종의 해독제가 아니어도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을 겁니다.”
그제야 장천운의 생각을 짐작한 왕규가 탄성을 터트렸다.
“아! 그렇군!”
장천운은 일단 품속에서 독왕의 해독단이 든 통을 꺼냈다. 선등경의 중독 상태가 심각해서 이러쿵저러쿵 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왕규가 침을 삼키며 쳐다보는 것을 못 본 척하고 통의 뚜껑을 연 후 해독단을 한 알 꺼냈다. 그러고는 반쪽을 잘라서 내밀었다.
“일단 이걸 복용하십시오.”
선등경이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뭔가?”
“해독에 효과가 좋은 약입니다. 적어도 노선배께 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대를 어찌 믿는단 말이냐?”
채응도가 의심과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장천운을 보며 말했다.
왕규는 속이 무척 쓰렸다.
“그게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기나 하쇼? 주면 고맙다고 할 것이지 말이야.”
채응도가 왕규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 정도에 움츠러들 왕규가 아니었다. 오히려 목에 힘을 잔뜩 준 그가 말했다.
“그거, 만금을 줘도 살 수 없는 귀한 거요. 그러니 믿고 드십쇼. 해독이 안 된다 해도 손해 볼 것은 없으니까.”
당초당과 왕규가 나눈 대화를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대화 내용 중에는 귀독마종의 독을 해독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뒤늦게 그 말을 떠올린 채응도가 선등경을 바라보았다.
“복용해 보시지요, 노사.”
어차피 선등경은 더 버티기가 힘든 상태였다.
장천운에게 해독단을 받아든 그는 망설임 없이 입안에 넣었다.
“흥! 그 따위 허접한 단약으로 내가 쓴 독이 해독될 것 같으냐?”
당초당이 코웃음 치며 소리쳤다. 조금 전과 달리 초조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왕규가 그를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늙은이, 저게 뭔지 알아? 저게 바로……. 독왕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해독단이야.”
당초당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뭐야? 남사명이 만든 해독단이라고?”
그뿐만 아니라 채응도와 선등경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 말을 먼저 하지 않았는가?”
채응도가 기대감과 야속함이 복합된 표정으로 장천운을 타박했다. 미리 말했으면 시간을 아낄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장천운에게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제가 말했으면, 믿고 바로 복용하셨겠습니까?”
채응도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해독단을 내밀며 독왕의 이름을 꺼냈다면 또 다른 의심을 했을 것이었다.
―저게 진짜 독왕이 만든 해독단일까? 가짜 아냐?
저 단약이 정말 독왕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해독단이라면 돈 주고도 사기 힘든 귀물이었다.
누가 그런 귀물을 처음 본 사람에게 선뜻 내민단 말인가?
장천운은 입을 닫은 채응도를 놔둔 채 당초당을 내려다보았다.
당초당은 초조함과 두려움 외에 분노마저 뒤섞인 괴이한 표정으로 이를 갈고 있었다.
왕규에게 복용시킨 독이 정말로 해독되었다면 지금까지 한 말 역시 거짓이 아닐 것이었다.
자신과 비교할 수 있는 독의 대가는 독왕 남사명과 천독수 당산중뿐이니까.
“독왕 늙은이의 해독단을 어떻게 네놈이 갖고 있는 것이냐?”
“궁금해 할 것 없소. 갖고 있을 만하니까 갖고 있는 것이오. 당신은 그보다, 어떻게 하면 참혹한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인지, 그 것이나 걱정하시오.”
장천운은 무심한 목소리로 나직이 말하며 당초당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