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153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20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153화
장천운이 발에 힘을 주려다 멈칫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혈을 안 풀어줬군.”
무표정한 얼굴로 지풍을 쏘아서 아혈을 풀어준 장천운이 다시 물었다.
“목적이 뭐지?”
장천운이 조등을 고문하는 동안 왕규도 쥐새끼 네 마리를 모두 잡았다.
사실 한 마리는 하마터면 놓칠 뻔했는데, 멍청한 놈이 조등이 있는 영산객잔으로 향했다.
아마 놈이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멈칫거리지만 않았으면 진짜로 놓쳤을지도 몰랐다.
장천운은 꼬리가 완전히 정리되자 강무산에게 지시를 내렸다.
“무산 형은 흔적을 깨끗하게 지우쇼. 머리카락 하나 남기지 말고.”
“걱정 말게. 놈들이 이곳에 나타난 적도 없는 것처럼 만들어 놓지. 시체도 걱정할 것 없네. 돌을 매달아서 장강 한가운데에 빠뜨릴 거니까.”
강무산은 겉보기와 달리 섬세하고 철저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인가? 여자에겐 약하고, 수하에게는 호랑이였다.
강무산이 객잔을 나가자 왕규가 넌지시 물었다.
“몰래 힘을 키우느니, 아예 무창을 집어삼켜서 새 문파를 만드는 건 어떤가? 귀룡문만 견제할 수 있으면 가능할 것 같은데.”
십이지부 중 하나인 귀룡문은 장강 건너에 있었다.
무창에 강력한 힘을 형성하면 그들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재주껏 해보쇼.”
“정말이지?”
“항주보단 못할지 몰라도, 무창도 괜찮은 곳입니다.”
왕규는 항주로 가서 새 문파를 만들자고 했다.
그 때문에 합비의 주루까지 손해를 보면서 팔고 장천운을 따라나섰다. 그러다 멱살을 잡혀서 여기까지 끌려왔지만.
그래도 어쨌든 무창에 새로운 문파를 만든다면 목적의 반은 달성한 셈이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근데 돈은 어떻게 조달하지? 문파를 만들려면 많은 돈이 필요한데, 구천성에 있는 내 돈이라도 가져오는 게 좋지 않을까?”
나름대로 일리 있는 걱정이었다.
그런데 장천운이 곧바로 해결책을 내놓았다.
“단혈방과 혈수문을 한 번 더 방문하죠. 지금 갔다 올까요?”
***
다음 날 아침, 장천운과 왕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무창을 출발했다.
어젯밤, 단혈방주 만대평과 혈수문주 오서를 만났다. 두 사람은 장천운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었다.
눈앞에서 장천운을 보지 않을 수만 있다면 마누라라도 넘길 것 같은 표정들이었다.
덕분에 생각했던 금액의 두 배를 약속 받았다. 무려 은자 이만 냥이었다.
단혈방과 혈수문, 양쪽 합해서 만 냥을 생각하고 ‘은자 만 냥은 있어야 하겠는데.’라고 했더니 각자 만 냥으로 알아들은 것이었다.
오서는 개과천선이라도 했는지, 더 필요하면 미리 말하라는 말까지 했다.
왕규도 이제 자금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아마 황석에 도착하려면 내일 오후나 되어야 할 거네.”
그가 강바람에 얼마 남지 않은 머리를 휘날리며 말했다.
목적지까지 가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육로를 통해서, 하나는 배를 타고 황석까지 내려간 다음 육로로 남하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배를 탔다.
무창 남쪽은 수많은 호수가 산재해 있었다. 육로의 거리가 가깝긴 하나 호수에 가로막혀서 빙빙 돌다보면 힘은 힘대로 들고, 시간 역시 더 걸리는 반면 배는 타고 있으면 알아서 가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탄 배는 화물과 선객을 동시에 나르는 상선이었다.
선원만 열 명이나 되는 제법 큰 배였다. 배가 크니 흔들림도 적어서 그만큼 편했다.
장천운은 선실 벽에 등을 기대고 품속에서 아버지의 일기장을 꺼냈다.
황석까지 가려면 빨라도 한나절은 걸렸다. 그 동안 시간도 보낼 겸 일기나 읽어볼 생각이었다.
오래 전에 읽어보긴 했지만 그때는 너무 어렸다. 어릴 때와 지금은 같은 내용이라도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지 않을까?
일기는 매일 적은 게 아니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씁쓸한 미소를 짓던 그의 표정이 어느 곳인가를 보면서 서서히 굳어졌다.
[운아가 어느새 여섯 살이 되었다. 누구를 닮았는지 너무나 똑똑해서 탈이다. 내가 가르치는 게 버거울 지경이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젊을 때 더 열심히 배울 걸…….]
어릴 적,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날 때마다 일기를 꺼내 읽었었다.
그때는 그 말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었다.
사실 의심할 내용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의 느낌은 달랐다.
―누구를 닮았는지…….
보통 부모는 자식이 똑똑할 때 대부분 ‘나를 닮아서…….’라고 자화자찬한다.
우둔하고 미운 짓을 할 때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저러지?’라며 남 탓을 하고.
그런데 똑똑한 자식에게 ‘누굴 닮아서’라고?
마치 남이 말하는 느낌이었다.
‘아냐,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인 거겠지.’
그럼 어머니에 대해서는 왜 아무 말도 없는 거지?
왜?
장천운은 허공에 초점을 두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버지에게 미안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사신 아버지이다. 자신의 말 몇 마디 때문에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셨다.
그런 아버지를 의심하다니.
‘후우, 내가 미쳤지.’
속으로 한숨을 내쉰 그는 일기를 덮고 품속에 넣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을까?’
***
유시 무렵, 배가 황강에 도착했다.
화물을 내린 배는 하룻밤을 그곳에서 보내고, 다음 날 아침에 또 다른 선객을 태웠다.
그런데 새로운 선객 중 세 사람이 장천운과 왕규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짙푸른 무복을 입은 그들은 나이가 사십대 초중반쯤 되었다.
등에 검을 맨 자가 제일 나이 들어 보였고, 갈색 편을 허리에 두른 자가 제일 어린 듯했다.
장천운은 그들이 지닌 심상치 않은 기운 때문에, 왕규는 그들의 정체를 알아챘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광양삼절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왕규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천운은 이채 띤 눈빛으로 세 사람을 주시했다.
광양삼절(光陽三絶). 그들은 강호에서 인정받는 절정고수들이었다.
호남제일 광양산장의 주요 고수로 주 활동지역은 동정호 인근의 장사와 악양이다.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황강에 나타나서 동쪽으로 가는 배를 탈 자들이 아닌 것이다.
배안의 선객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장천운과 왕규만이 아니었다.
광양삼절 관씨 형제들도 건너편 선실에 있는 장천운과 왕규가 신경 쓰였다.
아마 자신들의 일 때문에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한번쯤 정체를 알아봤을 것이었다.
그런데 황강을 출발한지 한 시진쯤 되었을 때였다.
뒤쪽에서 배 한 척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그 배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선장은 속도를 줄여라!”
상선의 선원들은 목을 길게 빼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날렵하게 생긴 배는 작았지만 속도가 무척 빨랐다.
바라보는 동안에도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선실에 있던 사람들까지 밖으로 나와서 그 배를 바라보았다.
배에는 십여 명이 타고 있었는데 서너 사람이 선수에 서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긴 수염과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뒷짐을 지고 있었는데, 어깨 위로 커다란 도의 손잡이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어? 궁천도 곽교진이잖아?”
왕규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말했다.
머릿속에서 뒷짐 진 자에 대한 정보를 막 끄집어내고 있던 장천운의 눈빛이 깊어졌다.
‘곽교진은 천하의 고수 서열을 따져도 백 위 안에 드는 절정고수다.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난 거지?’
의문은 또 있다.
곽교진은 어느 단체에 속한 자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동행한 자들의 모습을 봐서는 혼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제기랄, 장강팔련 놈들도 왔군.”
왕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장 대주, 혹시 우리를 잡으려고 온 것 아닐까?>
왕규가 전음으로 물었다.
장천운의 표정도 굳어졌다.
장강팔련은 금선장과 상권을 놓고 다투는 중이다. 구천성과 적이나 다름없는 세력.
자신들을 잡으러 왔든 아니든 만나봐야 반갑지 않은 자들이었다.
<좀 더 두고 보지요.>
장천운은 전음으로 대답하고 광양삼절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표정 역시 굳어 있었다.
‘혹시 저자들을 쫓아온 건가?’
그때였다.
“배를 강가로 이동해라!”
날렵한 배에서 또 다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상선의 선원이 겁도 없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배는 커서 강가로 가면 좌초될 수 있소이다!”
“흥! 이동하지 않으면 좌초되기 전에 부서져서 가라앉을 것이다!”
“저 깃발이 보이지도 않소이까? 이 배는 은월상단이 운영하는 상선이외다!”
은월상단은 장강 중하류 삼천리의 상권을 장악한 삼대상단 중 하나였다.
금선장과 장강팔련에 필적하는 힘을 지닌 남경 금천신문이 배후에 있으니 목에 힘이 들어갈 만했다.
하지만 상대는 은월상단이라는 이름에도 눈썹 한 올 끄떡하지 않았다.
“잔소리 말고 하라는 대로 해! 우린 장강팔련 총련주의 명으로 죄인을 잡으러 왔다!”
장강팔련이라는 이름이 나오고서야 선원들의 입이 닫혔다.
그리고 뱃머리가 서서히 우측 강변을 향해 틀어졌다.
선객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양민이라 해도 장강팔련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장강팔련은 총련주인 장강수왕 경화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강력한 힘을 지닌 수적에 불과했던 자들이다.
지금은 상단도 운영하며 나름대로 과거의 틀을 벗어나려고 하지만, 언제 어느 때 수적의 본능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최근 들어서 벌어지고 있는 금선장과의 싸움이 그 좋은 예였다.
구천성의 십이지부 중 하나인 금선장의 알짜배기 사업을 차지하기 위해서 도적처럼 칼을 들이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데?”
왕규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하며 머리카락이 대부분 빠진 머리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광양삼절을 쫓아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일단 지켜봅시다.>
한편, 광양삼절은 돌덩이처럼 굳은 표정으로 작은 배를 노려보았다.
그들은 궁천도 곽교진과 장강팔련 무사들이 배를 세우려는 목적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문제는 장강 한가운데여서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등평도수의 상승 경공을 펼친다 해도 건너기에는 장강이 너무 넓었다.
강가까지 가는 시간은 일각 정도.
그 안에 무슨 수를 내지 않으면 불귀의 객이 될지 모른다.
곽교진이나 장강팔련의 무사들도 그들의 강함을 알기에 무리해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자칫하면 적을 치려다가 자신들이 장강을 헤엄쳐 건너는 악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상선이 앞장서고 작은 배가 뒤따르며 강가로 다가갈 때였다.
광양삼절 관씨 형제 중 하나가 무거운 표정을 지은 채 장천운 쪽으로 다가왔다. 허리에 갈색 편을 두르고 있는 자였다.
그가 왕규를 보며 물었다.
“나는 관초라 하오. 노형은 어디서 온 분이오?”
왕규가 대답했다.
“우린 무창에서 왔소.”
“장강팔련과는 어떤 사이오?”
“철천지원수까지는 아니지만 그리 좋은 사이라고 볼 수도 없소.”
왕규의 말에 관초의 눈빛이 빛을 발했다.
“그럼 부탁하나 해도 되겠소?”
“우리도 갈 길이 급하오.”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그때 광양삼절 중 옆구리에 칼을 찬 자가 다가왔다.
그는 수염이 텁수룩하고 얼굴에 기다란 상흔이 있는 자로 관씨 형제 중 둘째인 섬양도(閃陽刀) 관각이었다.
“도와주신다면 적절한 대가를 치르겠소.”
“대가?”
왕규가 관심을 보이자, 관각이 작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돈을 원한다면 은자 백 냥을 드리겠소. 만약 다른 것을 원한다면 말씀해 보시오.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드리겠소.”
“그럼 먼저, 왜 궁천도가 광양삼절을 쫓는지 알려주실 수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