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148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11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148화
장천운은 씁쓸한 표정으로 왕규를 째려보았다.
입을 반쯤 벌린 왕규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게 왜 말을 함부로 하십니까?”
“이, 이제…… 어, 어떡하지?”
“뭘 어떡합니까? 빌어봐야죠.”
“씨바, 해독시켜주지 않으면 나도 이대로 죽진 않겠어.”
“정말 죽고 싶습니까?”
장천운이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며 다그치자, 왕규의 목이 자라처럼 쏙 들어갔다.
말 한마디로 왕규를 자라목으로 만든 장천운이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노선배님, 손녀께선 회복 되셨습니까?”
곧 남사명의 대답이 들렸다.
“걱정마라. 이제 다 나았으니까.”
“정말 다행이군요.”
“곧 밤이 될 거다. 어두워지면 길을 찾기 힘들 테니 고생하지 말고 그만 가봐.”
“노선배님, 귀독마종의 다른 독도 한번 해독해보시지 않겠습니까?”
“뭐?”
“귀독마종이 여기 이 분에게 독을 복용시켰거든요.”
그 순간, 남사명이 불쑥 다시 나타났다.
“방금 뭐라고 했지? 귀독마종의 독에 중독되었다고?”
“예. 노선배님이 저번에 만든 해독제를 복용했는데도 해독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어쩌다 그놈을 만나게 된 거지?”
“뇌혈산이란 독을 알아보기 위해서 찾아갔습니다.”
남사명이 눈을 치켜떴다.
“뭐? 뇌혈산이라고?”
“예, 노선배님.”
“그 사악한 독은 왜 알아보려고 간 거냐?”
“그 일에 대해선 제 마음대로 말씀드릴 수 없으니 양해해 주십시오.”
“설마 뇌혈산을 얻으려고 간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닙니다. 귀독마종이 뇌혈산을 만든 적이 있는지, 만들었다면 언제 만들었는지, 그걸 알아보기 위해 갔던 것뿐입니다.”
남사명은 장천운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거짓이 아니라는 확신이 섰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뇌혈산은 만드는 방법을 안다 해도 절대 만들어서는 안 되는 사악한 독이다. 그 찢어죽일 놈이야 개의치 않겠지만.”
귀독마종에게 욕을 퍼부은 남사명이 왕규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리 와봐.”
왕규가 쭈뼛거리며 남사명에게 다가갔다.
남사명이 품속에서 송곳처럼 생긴 뾰족한 소도를 꺼냈다.
왕규가 멈칫하며 장천운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지미, 독을 알아보는데 왜 저런 걸 꺼내?’
장천운은 고개를 끄덕여서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
그때 남사명이 물었다.
“처먹었을 때 맛이 어땠지?”
“에…… 달짝지근했습죠.”
“팔 내밀어봐.”
왕규는 그 어느 때보다 두려운 마음으로 팔을 내밀었다. 오죽했으면 손가락이 중풍 걸린 사람처럼 달달 떨렸다.
남사명은 송곳처럼 뾰족한 소도로 팔목 부근을 인정사정없이 푹 찔렀다.
왕규는 입을 딱 벌렸지만, 생각 외로 고통은 심하지 않았다.
‘어?’
그의 눈이 동그래졌을 때 남사명이 뾰족한 소도를 빼더니 혀에 가져다 대었다.
곧 남사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사사몽혼귀독(四四夢魂鬼毒)?”
“무슨 독 이름이 그 따윕니까?”
“당가 놈이 붙인 이름이다. 그래도 독효는 아주 확실하지. 사십사일 이내에 해독을 못하면 잠복되었던 독기가 퍼지면서 온몸을 녹여버리거든.”
왕규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저…… 해독은…… 가능합니까?”
“이건 당가 놈만 해독할 수 있어. 저번에 내가 저놈에게 준 해독제는 성질이 달라서 복용해봐야 독의 뿌리를 뽑지 못해.”
“그, 그럼 저는……?”
“그거야 네놈 명이 짧으면 어쩔 수 없지.”
털썩.
무릎을 꿇은 왕규가 닭똥 같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남사명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살려주십시오, 독왕 어르신.”
“당가가 해독시켜준다고 안했어?”
“예? 그걸 어떻게……?”
“그놈이 사사몽혼귀독을 쓸 때는 시킬 일이 있을 때지. 아미 그 일만 해주면 그놈이 해독시켜줄 거다.”
“저, 정말입니까?”
“물론이지. 어차피 그 이후 다른 독에 당해서 한줌 핏물로 녹아 죽겠지만.”
“헉!”
왕규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독왕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지막 희망마저 없다는 뜻 아닌가 말이다.
“사실입니까?”
장천운이 다시 한 번 확인해보았다.
“내가 왜 너희들에게 거짓말한단 말이냐? 그래도 저놈은 내가 만든 해독제를 복용해서 백 일은 살 거다.”
그래봐야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다. 사십사 일이나 백 일이나!
“정말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어르신?”
남사명은 왕규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더니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킁, 마음 같아서는 고름처럼 녹아서 죽든 말든 신경 쓰고 싶지 않다만, 네놈에게 신세진 것도 있으니 한번 손을 써보마.”
“감사합니다.”
“대신 너도 나에게 줘야할 것이 있다.”
장천운은 남사명이 뭘 원하는지 알고 눈을 크게 떴다.
“아직도 제 피가 해독에 효력이 있는 겁니까?”
“일 년이 안 지났으니 전만은 못해도 그럭저럭 쓸 만할 거다.”
“그럼…… 몇 사발이나……?”
“두 사발만 받으마.”
“작은 사발이겠죠?”
끄덕끄덕.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남사명이 왕규를 내려다보았다.
“해독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러니 기대는 반만 해라.”
***
기문진 안쪽의 광경은 바깥에서 보던 것과 조금 달랐다.
특히 기문진을 통과하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사람이 통나무집 근처에 서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아! 저 여인이 초아인가 보군.’
하얀 얼굴, 호리호리한 몸매, 조금은 연약하게 느껴지는 인상이었으나 얼굴은 청초한 한 떨기 난꽃을 보는 듯했다.
사마경보다 나이가 한 살 많다고 했는데, 겉보기로는 오히려 두어 살 어리게 보였다. 아마도 여린 모습 때문인 듯했다.
“내 손녀인 초아다.”
“남초초가 손님을 뵈어요.”
“장천운입니다.”
남초초의 반달처럼 휘어진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 그럼 혹시 절독곡에서 할아버지를 도와주셨다는 분?”
“그렇습니다. 도와주었다기보다는 서로 거래를 한 거죠.”
그쯤에서 남사명이 말을 끊었다.
“초아야, 들어가 있어라. 이놈들하고 잠시 이야기 좀 해야겠다.”
“예, 할아버지. 제가 곧 차를 끓여 올 게요.”
남초초가 돌아서서 통나무집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한쪽 다리를 절룩거렸다. 아주 심하게 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천운은 가녀린 여인이 다리를 저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저릿했다.
‘저 아름다운 여인이 어쩌다…….’
그가 안쓰러워하는 표정으로 남초초를 바라보자, 남사명이 착잡한 어조로 나직이 말했다.
“독을 해독하긴 했는데, 여독을 마저 다 몰아내지 못했다. 그 바람에 한쪽 다리의 신경을 상하고 말았느니라.”
그 말을 들은 장천운은 남초초가 더욱 안쓰럽게 느껴지는 한편으로, 저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선천적이거나 다쳐서 다리를 저는 게 아니라 귀독마종의 독 때문이라고?
‘저 여린 여인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때 남사명이 물었다.
“놈이 어디에 살고 있더냐?”
“막부산에 살고 있다 합니다.”
장천운은 솔직히 말해주었다. 어쩌면 복수를 하겠다고 달려갈지 모르지만, 속이고 싶지 않았다.
“죽일 놈…….”
남사명은 욕만 퍼부을 뿐 그 이상 분노를 보이지 않았다. 의외였다.
“복수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장천운이 넌지시 묻자, 남사명의 주름진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곧 천천히 고개를 젓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역시 그놈의 가족을 모두 죽였다. 서로 피장파장이지. 이제 와서 그놈을 죽이겠다고 초초를 혼자 놔둔 채 떠나고 싶진 않구나. 그래서 말인데, 내 대신 네가 그놈을 처리해다오. 그리 해준다면 나 역시 네 부탁을 하나 들어주마.”
그것도 괜찮을 듯했다. 어차피 대답만 듣고 말 생각은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노선배님.”
***
다음 날부터 왕규는 독왕의 새로운 실험체가 되었다.
장천운은 남사명이 왕규의 독을 해독하는 동안 남초초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초초는 장천운이 하는 모든 이야기가 새롭기만 했다.
어린 시절 깊은 산속으로 들어온 그녀에게 이야기 상대는 조부뿐이었다.
그러잖아도 말이 거의 없는 남사명이 무슨 이야기를 얼마나 했을까.
그러다 보니 장천운에게 듣는 강호의 이야기가 마치 꿈속나라의 이야기 같았다.
장천운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가 겉모습만 두어 살 어린 것이 아니라 정신까지도 몇 살 어리다는 걸 알았다.
귀독마종의 독에 당해서 이 년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더욱 더 남초초가 안쓰러워진 그는 그녀를 스스럼없이 동생처럼 대했다. 남초초도 그게 편한 듯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장천운이 그녀에게 대놓고 말했다.
“앞으로 내 동생 해라.”
“동생요?”
“나도 혼자거든. 아니지, 동생이 하나 있긴 한데, 친동생은 아냐. 싫으면 안 해도 되니 부담 갖진 말고.”
남초초의 하얀 얼굴에 발그레하니 복사꽃 같은 홍조가 떠올랐다.
“정말 오……빠라고 해도 돼요?”
“동생이 되면 당연히 오빠라고 해야지.”
남초초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싫지는 않은 듯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게다가 반달처럼 휘어진 눈에 물기마저 고이자, 마치 복사꽃에 이슬이 맺힌 듯했다.
“고마워요…… 천운 오빠.”
장천운은 여동생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사마경이 알면 어떻게 나올까?
펄쩍펄쩍 뛰겠지? 아니면 어떤 방법으로든 남초초를 괴롭힐지도 모르고.
‘말하지 않으면 모르겠지 뭐.’
어차피 결정된 일이니 미련은 갖지 않았다.
그때 남사명이 불렀다.
“초아야!”
남초초가 눈가의 물기를 소매로 재빨리 찍어내고 대답했다.
“예, 할아버지.”
“약방 선반 위에 있는 호설산(濩雪酸)을 가져와라!”
“알았어요.”
남초초가 일어나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장천운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호설산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남사명이 시킨 심부름이라면 독과 연관된 물건일 게 분명했다. ‘산’자가 들어가는 걸 보니 독 자체일 수도 있고.
연약한 남초초에게 독 심부름을 시키다니. 차라리 자신을 시킬 것이지 말이야.
“초매, 위험하니 내가 갖다 드릴게. 호설산이 어느 쪽에 있지?”
“괜찮아요. 자주하는 일인데요 뭐.”
“자주한다고? 독 심부름을?”
“그럼요. 어릴 때부터 했어요.”
“정말?”
그때였다. 남사명이 장천운의 말을 들었는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치며 말했다.
“흥! 쓸데없는 걱정 마라. 강호를 다 뒤져도 초아보다 독을 잘 다루는 놈은 다섯도 안 될 거다.”
“…….”
그랬다. 남초초가 가녀리게 보이긴 하지만, 독에 관한 것만큼은 적수를 찾기 힘든 고수였다.
뿐만 아니라 기문진에 대해서도 해박했다.
그 독의 고수가 약방에서 작은 옥병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설산은 무척 독해서 실수로 몸에 묻기만 해도 살이 녹아요.”
장청운은 입을 살짝 벌린 채, 천진난만한 표정의 남초초를 바라보았다.
‘내가 너무 쓸데없는 걱정을 했나?’
저렇게 웃으며 살짝 독을 뿌리면 천하의 누가 당하지 않을까?
어쩌면 독인 줄 알면서 처먹는 놈이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