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144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17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144화
묘하게 빛나는 눈빛, 촉촉이 젖은 입술. 왠지 수상한 표정이다.
장천운은 사마경이 뭘 원하는지 알면서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머뭇거렸다.
<구천무령이 천장에 있지 않습니까.>
<괜찮아. 봐도 못 본 척할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하나?
장천운은 눈알만 굴려서 슬쩍 천장 한쪽 구석을 쳐다보았다.
철무의 전음이 들렸다.
<걱정 말게, 눈 감고 있을 테니까.>
내전에서의 호위에게는 철칙이 있다.
봐도 못 본 척, 봐서 안 되는 것은 보지 않아야 하고, 들어서 안 되는 것은 듣지 않아야 한다.
그래봐야 ‘눈 가리고 아웅’하는 셈이지만.
잠깐 사이, 사마경이 장천운의 코앞에 섰다. 고개를 들어서 올려다보는 눈빛이 젖어 있다.
나직이 말하며 다가오는 아름다운 얼굴, 은은히 밀려드는 황홀한 화향.
아마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의지로 그녀를 거부할 수 있는 남자가 있다면 결코 인간이 아니리라.
장천운은 감정이 이끄는 대로 두 팔을 뻗어서 그녀를 안았다. 구름이 안긴 듯 부드러웠다.
미소를 지은 사마경이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은은한 난향이 정신을 어질어질하게 만들며 밀려들었다.
***
우문각은 오랜만에 난을 쳐보았다.
그는 사군자 중 난(蘭)을 유독 좋아했다.
난은 충성과 절개의 상징이기도 하며, 깊은 산중에서 자라며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린다.
그는 한때 난을 닮고 싶었다. 난처럼 생활하고 싶었다. 총사 역할을 하는 비령각을 맡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맡은 일에 충실했다. 특별히 욕심도 부리지 않았다.
그런 마음에 변화가 온 것은 암중의 음모가 싹 터갈 무렵이었다.
변화의 폭은 크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 차이가 미미해서 변화한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작은 변화가 전체의 향방을 좌우할 때가 있다.
그는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철저히 이용했고,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구천성 핵심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욕심이라면 격변하는 구천성의 현 상황을 자신의 손으로 깨끗하게 마무리 짓는 것이다.
그 어떤 희생이 뒤따르더라도!
붓을 들어서 화룡점정처럼 난화를 그린 우문각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장천운이 귀독마종을 찾기 위해서 왕규와 함께 성을 나섰단 말이지?”
정유도 난에서 눈을 떼고 대답했다.
“예, 총사.”
“꽤 오래 걸리겠군.”
“적어도 이십 일은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붓을 내려놓은 우문각이 이마를 찌푸렸다.
“없을 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어쩌려고 그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단 말이냐?”
“저, 소성주께선 그가 돌아올 때까지 지하수련실에서 폐관수련을 하실 거라고 합니다.”
“그래?”
“예, 총사. 이번 전쟁을 겪으며 힘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는 핑계를 댈 생각이십니다.”
정유의 설명을 들은 우문각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눈빛이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눈동자가 마치 잠자는 먹빛 호수 같았다.
“교왕은?”
“장로원에 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나극이나 공손백이 아니라 언 장로와 함께 있습니다.”
“언동교?”
“예. 첩밀각의 자료에 의하면, 두 사람은 똑같이 상주 지역에서 이름을 얻었습니다. 전부터 잘 아는 사이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교왕이 성에 들어온 것은 절대 언 장로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겠지. 언동교가 부른다고 올 교왕이 아니야. 언동교와 교왕은 급이 달라.”
“만약 한 사람이 더 온다면 교왕을 부른 사람이 언 장로가 아니라는 게 밝혀질 겁니다.”
“한 사람이 더 온다고?”
“교왕에게는 아주 절친한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그가 살아 있다면, 교왕이 구천성에 있다는 걸 안다면 분명히 이곳으로 올 겁니다.”
우문각도 교왕의 친구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아! 환마(幻魔) 우곡 말이지?”
“예, 총사. 그런데 저…… 혹시 우곡에게 한 가지 괴이한 취미가 있다는 걸 아십니까?”
정유가 미묘한 표정으로 넌지시 물었다.
우문각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괴이한 취미라고? 뭔데?”
“그는 미인도를 무척 좋아하는데, 특히 야한 미인도가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훔친다고 합니다.”
“…….”
멈칫한 우문각은 아무 말도 않고 정유만 쳐다보았다.
묘한 표정이었다. 마치 ‘절대 그건 안 돼!’라고 외치고 싶은 표정.
정유가 시선을 한쪽으로 슬그머니 돌리며 말했다.
“아마 총사께서 갖고 계신 화문억의 명월나녀도(明月裸女圖)를 보면 미칠 겁니다.”
“……그래서?”
“그걸 미끼로 내놓으면…….”
“안 돼!”
61장: 조우(遭遇)
장천운이 왕규와 구천성을 나선 다음 날 아침.
장로원 공손백의 거처인 청묵전 내에선 서리가 내린 것처럼 차가운 냉기가 흘렀다.
“장천운이 구천성을 나가서 들어오지 않았다고?”
공손백의 나직한 목소리에 문인동의 표정이 굳어졌다. 목소리는 나직하지만 그 안에서 더욱 강한 노기가 느껴진 것이다.
“예, 주군.”
“놈이 밖에 나간 이유는 알아봤느냐?”
“소성주의 명을 받고 나간 것 같습니다.”
“사마경의 명령을 받고 떠났다?”
“소성주의 명이 아니라면 놈이 하루 이상 보이지 않을 리 없습니다.”
“무슨 명령일 거라고 보느냐?”
“대략 세 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세 가지라…….”
“첫째, 주군께 대항할 힘을 얻기 위해서 누군가를 만나러 갔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무림맹의 등장에 지부가 흔들리는 걸 막기 위해서 각 지부와 협상하러 갔을지도 모릅니다.”
“셋째는?”
“셋째는…… 주군의 약점을 잡을 수 있는 뭔가를 조사하기 위해서 성을 나섰을 수 있습니다.”
공손백은 입을 다문 채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문인동은 그의 입이 열리기를 말없이 기다렸다.
방 안에 사계와 호위무사들이 있었지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가 흘렀다.
그렇게 반각, 공손백이 눈을 치켜떴다.
단순히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고 눈썹이 꿈틀거렸을 뿐인데도 전각 안의 사람들은 숨을 멈췄다.
바닥에서 뭔가가 푸스스 소리를 내며 흘렀다.
바람, 먼지, 억눌린 긴장 역시.
그제야 사람들은 전각의 대기가 은연중 공손백의 무형기에 지배당한 상태였음을 깨달았다.
참으로 엄청난 일이었다. 대기가 어느 한 공간에 갇혔거늘, 그 안에 있던 절정고수조차 깨닫지 못하다니.
모두가 숨 막히는 경악을 참으며 바라보고 있을 때 공손백의 입이 열렸다.
“첫 번째나 두 번째는 신경 쓸 것 없다. 그 정도의 도전은 내 가슴을 뜨겁게 달궈줄 뿐이니까. 문제는 세 번째야.”
한기가 풀풀 날리는 어조로 나직이 말하는 공손백의 두 눈에서 살기가 넘실거렸다.
“나는 그딴 놈이 나의 뒷조사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울화통이 터져서 참을 수가 없다.”
“놈은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을 겁니다.”
문인동이 가까스로 입술을 떼고 말했다. 그 몇 마디 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빴다.
공손백은 입술을 비틀었다. 길게 늘어진 입술 끝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싸늘한 조소, 자신만만한 표정.
“물론이지. 어차피 찾아낼 것도 없으니까.”
“그래도 만에 하나의 경우를 생각해서 조처를 취할 생각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천하를 다 뒤져서라도 놈을 찾아내라. 사혼(邪魂)을 보내서 어디로 갔는지, 무엇을 하는지 철저히 알아내!”
문인동이 움찔하더니 즉시 고개를 숙였다.
“존명!”
공손백이 암중에 키운 조직은 모두 셋이다. 그 중 단혼객이 양지에서 활동한다면 사혼객은 음지에서 움직인다.
그리고 무혼객은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실치 않다.
문인동조차 무혼객이라는 이름만 들었을 뿐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 주 임무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다.
“모든 걸 조용히 끝내려 했거늘, 내가 다스릴 대지에 피가 흐르는 것을 원치 않았거늘…….”
나직이 뇌까리는 공손백의 눈에서 시퍼런 살기가 폭사되었다.
“어리석은 계집. 네가 끝까지 고집을 피운다면, 그 옛날 사람들이 왜 나를 구천대공자라 부르며 두려워했는지 알려주마. 후후후후.”
심장을 짓누르는 나직한 웃음소리. 그 웃음소리에서 풍기는 진한 피비린내.
마침내 구천의 대지에서 피바람이 부는가?
이번에 부는 피바람은 어떤 결과가 나오든 구천의 대지를 혈해로 만들고 말리라.
문인동과 사계 등은 핏빛 예감에 다시 숨을 멈췄다.
***
피 비린내 나는 전쟁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봄이 바짝 다가왔다.
파란 하늘에선 나른한 햇살이 쏟아지고, 갈팡질팡 불어대는 바람에서도 온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대별산맥을 넘어서 수주로 향하는 장천운과 왕규는 봄기운을 누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왕규는 이번 길에 목숨이 걸려 있었다.
‘독왕이 해독할 수 있으면 좋은데…….’
장천운은 두고 온 사람들이 걱정 되었다.
‘공손백이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돌아가야 해.’
그나마 구양명이 남아준 것이 다행이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각자의 고민을 하며 대별산맥을 넘었다.
그리고 구천성을 떠나온 지 사흘째 되던 날, 석양이 질 무렵 수주 인근에 도착했다.
이제 독왕이 사는 대홍산이 코앞이었다.
하지만 산으로 들어가기에는 늦은 시각. 거기다 독왕이 산다는 곳까지는 산속으로 백 리를 더 들어가야 했다. 말로만 들었을 뿐이어서 길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장천운은 대홍산 진입을 미루고 수주로 들어갔다.
“수주에서 하룻밤 지내고 아침 일찍 출발하죠.”
왕규도 밤에 험준한 산속 길을 걷는 것은 께름칙했다.
“그러세.”
수주의 용운객잔 안.
장천운과 마주 앉은 왕규는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남 선배라면 그 당 늙은이의 독을 해독할 수 있겠지?”
수주까지 오면서 그 질문을 열 번은 했을 것이다.
그래도 장천운은 착실하게 대답해주었다. 어쨌든 그를 귀독마종에게 보낸 사람은 자신이니까.
“할 수 있을 겁니다. 독왕이 괜히 독왕이겠습니까?”
“독만 해독하면 그 늙은이를 그냥…….”
왕규는 이를 갈면서 속으로 몇 번이나 귀독마종을 절구통에 넣고 찧어댔다.
‘제길! 처음 봤을 때 때려잡았어야 했어!’
그러지 못한 것이 무척이나 후회되었다.
그때 점소이가 요리를 가져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요리는 향기만으로도 배고픈 자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왕규는 침을 삼키며 젓가락을 힘차게 들었다.
“오호, 향기가 끝내주는군.”
하지만 장천운은 요리가 아닌 객잔 입구를 쳐다보았다.
몇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 무기를 찬 무사들이었다.
숫자는 여섯. 표정이 무겁게 굳은 무사 다섯이 가운데 서 있는 청년을 호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년을 호위하고 있는 무사들 모두 천은방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장천운이 중앙의 청년을 얼마 전에 본 적이 있다는 점이었다.
‘석청산에서 봤던 자가 분명해.’
장천운의 호기심을 자극한 청년은 천은방의 소방주 호양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