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2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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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9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203화
두 사람의 절대 공력이 삼 장의 거리를 두고 충돌했다.
장천운의 입술이 푸들푸들 떨리며 일그러졌다.
고막이 터지기라도 한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몸 내부에서는 세포 하나하나가 전율의 경련을 일으키며 아우성쳤다.
쿠구구궁.
뒤늦게 천둥소리가 울렸다.
주르륵 물러서는 장천운의 발밑에 발자국 모양의 깊은 구덩이가 파였다.
머리카락은 산발해서 사방으로 흩날렸고, 장포도 걸레쪽처럼 찢기고, 소매 부위는 아예 가루가 되어버렸다.
백의장포인은 오 장 밖에 내려선 후 힘겹게 세 걸음 물러섰다.
그의 얼굴도 묘하게 틀어져 있었다. 커진 눈이 믿을 수 없는 일을 목격한 사람처럼 잘게 떨렸다.
“어이가…… 없군. 손우곤이 놓친 것도 이해가 돼.”
“정말…… 대단한 무공이야. 대령주도…… 당신만큼 강하지는…… 않을…….”
안간힘을 쓰며 몇 마디 내뱉은 장천운이 스르르 기울어졌다.
중심을 잡아보려 했지만, 발도 움직이지 않았고 마음만 앞설 뿐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말 빌어먹을 일이군.’
퍽.
얼굴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때는 이미 정신을 잃어서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였다.
백의장포인은 장천운이 쓰러진 후에야 비틀거렸다. 목구멍 안에서 피비린내가 풍겼다.
심호흡을 해서 흔들린 진기를 가라앉힌 그는 장천운을 향해서 우수를 뻗었다.
장천운이 그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왔다.
“네놈은 아직 공손백을 모르는구나. 하긴 그의 무서움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직이 몇 마디 내뱉은 그는 장천운을 옆구리에 끼고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기척도 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끄응.”
신음을 흘리며 눈을 뜬 장천운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손가락 하나도 꼼짝할 수가 없었고 몸만 욱신거렸다.
얼굴도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는데, 어릴 적 몽둥이에 얻어맞았던 때와 느낌이 비슷했다.
문득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을 떠올린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조금 강해졌다고 너무 자만했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천행이군.’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면 이미 목숨이 끊어졌을 것이었다. 그런데 살아 있는 걸 보면 죽일 생각은 아닌 듯했다.
‘맞아,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지.’
할 말도 있다고 했다.
백의장포인의 말을 떠올린 그는 눈알을 굴려서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을 살펴보았다.
너무나 평범한 방이어서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을까?
방문 밖이 캄캄한 걸 보니 아직 동이 트지 않은 듯했다. 아니면 며칠이 지났을 수도 있고.
만약 하루 이상 지났다면 사마경이 자신을 찾겠다며 구천성 일대를 뒤집어 놓았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구천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든가, 아니면 아직 하루가 지나지 않았다는 뜻.
덜컹.
방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한 사람은 백의장포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여인이었다. 이제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
“깨어났군.”
‘혈도나 풀어주시죠.’
장천운의 속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백의장포인이 손가락을 튕겼다.
송곳이 목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과 함께 말문이 트였다.
콜록, 콜록.
두어 번 기침을 한 장천운은 백의장포인을 노려보았다. 목이 뻐근하긴 해도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과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구십니까?”
“내 이름은 고완이다.”
장천운은 기억을 모조리 뒤져봤지만 그의 이름을 찾아내지 못했다.
“내 정체를 알아내려고 고민할 것 없다. 바깥세상에서 나를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러나 고완이 별호를 말했다면 바로 알아들었을 것이었다.
천비서생(天秘書生).
이십 년 전에 홀연히 사라진 절대고수. 그는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별호만큼은 수많은 강호인들의 뇌리에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사라지기 전까지 천하에서 제일 신비한 고수였으니까.
“천하가 정말 넓긴 넓군요. 대령주와 나극 대장로에 못지않은 고수를 하루에 둘이나 만나다니.”
“세상에는 알려진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양지 저편에는 묵묵히 자신을 갈고 닦는 일에만 전념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지.”
“천외에 있는 사람들처럼 말입니까?”
고완이란 자의 눈빛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천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느냐?”
“그저 수박 겉핥기 정도죠.”
“함부로 접근하지 마라. 그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자들이니라.”
그들? 왠지 말투가 묘하다.
“마치 그들과 일행이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아니라고는 하지 않겠다. 다만 그들과 같은 뜻을 지니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지.”
함께 지내긴 하는데 뜻이 같지는 않다는 말.
천외의 이단아인가?
어쨌든 그런 말을 들은 이상 선택의 폭이 좁아졌다고 할 수 있었다.
비밀을 폭로할 우려가 있으면 곧바로 목을 칠 테니까.
“괜히 들은 것 같군요.”
“역시 눈치가 빠른 놈이군.”
고완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말이 미소를 지은 것이지, 눈을 보면 섬뜩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차가웠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혈도를 풀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너의 실력을 높게 사서 그에 맞게 제압했으니까.”
장천운은 입맛이 썼다.
그의 실력 정도면 어지간히 막힌 혈도는 뚫을 수 있었다. 그래서 고완이란 자와 여인 모르게 혈도를 풀어보려 했는데, 그마저도 생각하고 혈도를 제압한 듯했다.
“그런데 왜 저에게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너는 좀 특별한 놈 같거든.”
“이용할 가치가 있어 보이는 놈이라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이 그러니까. 어쨌든 내 제안을 하나 하마. 받아들인다면 네 무기를 돌려주지.”
고완이 두 손을 들어서 흔들었다. 오른손에는 현월이 들려 있고, 왼손에는 무복 속에 감춰져 있던 연검이 있었다.
둘 모두 무척 아까운 무기였다. 특히 연검은 사마경의 선물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귀한 무기도 신외지물일 뿐.
“제가 비록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지만, 남에게 이용당할 만큼 멍청한 놈은 아닙니다.”
“나도 너에 대해서 들을 만큼 들었다. 너는 설마 네 근처에 있는 사람 중에 천외의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있을 지도 모르지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비밀이 있는 법인데, 제가 어찌 그들을 속속들이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장천운은 겉으로야 태연히 대답했지만 가슴은 싸늘하게 식었다.
“안다니 다행이군. 어떻게 하겠느냐?”
“저는 원래 손해보는 장사는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공평하게 주고받을 수 있다면?”
순간적으로 장천운의 눈빛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그렇다면 고려해볼 여지가 있겠지요.”
“너는 지금 고집을 피울만한 처지가 아닌 것 같다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 성격이어서요.”
“그거 하난 마음에 드는군.”
“일단 귀하의 이야기를 들어본 다음에 결정하지요.”
고완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서 여인을 바라보았다.
“어떠냐?”
“정말 이자가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요?”
여인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장천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은 이놈보다 나은 자를 찾을 수가 없구나.”
“실력이야 태사령이나 조부님께 내상을 입혔을 정도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마음은 어떤지 모르겠군요.”
“그 동안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그렇게 나쁜 놈 같진 않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죠.”
장천운은 자신을 불신하는 여인의 말에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얼굴도 사마경보다 못생긴 게 마음씨도 고약하군. 그럼 나는 나쁜 놈이고, 너는 좋은 년이냐?’
사실 사마경만은 못해도 미인소리를 충분히 듣고도 남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하지만 장천운의 눈에는 밉상으로만 보였다.
장천운이 속으로 화를 삭이고 있는데, 여인이 그를 보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가느다랗고 짙은 눈썹이 실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사마경이 이자에게 푹 빠졌다고 하더군요. 자칫하면 생각지 못한 곳에서 피해를 볼지도 몰라요.”
“그 정도 위험이야 감수해야겠지.”
“차라리 이자를 제어할 수 있도록 혈도에 금제를 가하는 건 어떨까요?”
장천운은 여인이 더욱 미워졌다.
자신을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들겠다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혈도를 제압하면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없을 텐데.”
“그럼 만성독을 복용시켜서 함부로 배신하지 못하게 해놓는 것은요?”
“흐음, 그것은 괜찮은 생각 같구나. 혈도를 제압하는 것보다는 움직임이 자유로울 테니까.”
뭐? 독을 먹여?
장천운은 눈을 치켜뜨고 고완을 노려보았다.
“공평하게 주고받자면서 독을 먹이겠다니, 아주 특이한 성격이군요.”
“그만큼 중요한 일이어서 그런다.”
“저 여자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귀하의 제안을 받아들이죠,”
“흠, 그래?”
그때였다.
여인이 손가락을 툭, 튕겼다.
장천운은 반사적으로 피하려 했지만 마음과 달리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컥!’
목에 지풍을 맞은 그는 입을 쩍 벌렸다. 아혈이 짚이면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여인이 다시 뭔가를 튕겼다.
콩알보다 조금 큰 단환이 입안으로 들어오더니 목구멍에 박혔다.
장천운은 뱉어내려 했지만 단환은 순식간에 녹아서 목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역겨운 냄새와 씁쓸한 맛이 동시에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독의 기운을 느낀 그는 분노한 표정으로 여인을 노려보았다.
여인이야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았지만.
“너무 걱정할 것 없어요. 몇 가지 일만 처리하고 나면 해독제를 드릴 거예요. 물론 거절한다면 해독제도 없지만요.”
‘독한 년!’
“화가 나도 당신이 선택할 길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러니 화를 풀고, 어떻게 하면 빨리 일을 마칠 수 있는지, 그거나 열심히 연구하세요.”
여인은 담담히 말하고는 장천운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장천운은 씩씩거리듯 두어 번 숨을 크게 쉰 후 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자, 저 분은 분명히 공평하게 주고받는다고 했다. 그럼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지?”
여인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누구나 지금 같은 상황이면 둘 중 한 가지 행동을 취한다.
화를 내던가, 아니면 겁에 질린 표정을 짓던가.
여인은 장천운이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조금 전의 표정만 해도 폭발하기 직전이었으니까.
그런데 잠깐 사이 분노를 가라앉히고 태연히 묻는다. 그것도 낮게 깔린 목소리로 ‘여자’라고 부르면서.
여인은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장천운을 바라보았다.
“천외에 대해서 당신이 궁금해 하는 걸 알려드리죠.”
“내가 묻는 건 뭐든?”
“알고 있는 거라면.”
여인과 고완이란 자는 천외와 관련이 깊은 자들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뜻밖의 곳에서 실타래가 풀릴지도 몰랐다.
“좋아, 그럼 하나만 더 묻자.”
“물어봐요.”
“이름이 뭐지?”
자신에게 강제로 독을 먹인 여인의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중에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생각지 못한 질문인 듯 여인의 입술 끝이 위로 올라갔다.
“제 이름은 모용예에요.”
이름을 말해준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나중에 사람이 찾아갈 거예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때 말해주죠. 그런데 다음에 만날 때는 함부로 반말하지 않았으면 해요. 당신보다는 내가 한 살 더 많거든요.”
장천운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상황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되새겼다.
‘모용예…… 언젠가는 이 빚을 갚아주마.’
그리고 독을 먹인 여인을 존대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 * *
눈을 뜬 장천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노인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흠칫한 그는 노인을 노려보았다.
자세히 보니 산 사람이 아닌 토상이었다.
‘산신당인가?’
구천성 인근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도 가끔 산신당을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고완이란 자와 여인이 자신을 제압해서 산신당에 버려둔 듯했다.
어쩌면 근처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가볍게 소주천을 해서 진기를 다스린 그는 현월과 연검을 챙긴 후 산신당을 나섰다.
저 멀리 동쪽 산 너머의 하늘이 밝아지고 있었다.
백리우진은 최근 들어서 구천멸혼수를 익히는 일에 전념했다. 수련도 내부에서 하지 않고 성 밖 수련장을 이용했다.
그날도 새벽수련을 하기 위해 수련장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눈에 익은 사람이 북문 쪽에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응? 저건 장천운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