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195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07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195화
정유는 짧은 토를 달려다가 우문각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달라졌다고 한 것은 우문각의 말과 의미가 달랐다.
며칠 전만 해도 차갑고 도도하기만 했던 소성주였다. 때로는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강하게 밀어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요 며칠 본 그녀는 전보다 더 차분해졌고, 함부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마치 가슴 깊숙한 곳에 뭔가를 감추어 놓은 듯했다.
소성주의 그러한 변화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리둥절할 정도.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그러나 확실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미리 말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 정유는 화제를 돌렸다.
“파천회가 조용한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총사.”
“아마 조용히 기다리면서 기회를 노리려 할 거다.”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나직이 말한 우문각이 눈을 들었다.
“이번 무림맹과의 전쟁에는 나와 우경도 동행한다. 비조와 첩밀각의 정보망을 최대한 가동시켜라.”
정유는 흠칫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예, 총사.”
비조와 첩밀각을 동시에 최대로 가동시킨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일이 잘못되어서 자칫 양쪽이 한꺼번에 당하기라도 하면 반전을 꾀할 수 있는 기회마저 잃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번 전쟁에 사활을 걸었다는 뜻.
그런데 왜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한 걸까. 문제는 그 답답함의 원인이 총사 때문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아직도 총사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있기라도 한 걸까?
‘알 만큼은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문득 든 생각.
고개를 든 그가 물었다.
“혹시 묵조도……?”
우문각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그들을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자신은 훌쩍 컸는데 그들은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숫자도 셋이었고, 장소도 그때 봤던 그곳, 절벽 위였다.
“와봐! 오늘은 누가 죽는가 보자!”
고함을 내지른 장천운은 전력을 다해서 혼천수라권을 펼쳤다.
검이 있으면 더 좋을 텐데, 아쉽게도 오늘따라 옆구리에 검이 달려 있지 않았다.
빌어먹을!
콰아아아아!
절벽 위에 기의 폭풍이 몰아쳤다.
모래처럼 산산이 부서진 바위가 솟구치면서 하늘이 누렇게 변했다.
그런데…… 빌어먹게도 손발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마치 어릴 적 꿈을 꿀 때, 호랑이가 쫓아와서 도망가려고 했지만 발이 땅에서 잘 떨어지지 않았던 그런 느낌이랄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환귀자의 환술도 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정말 미칠 일이었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단 말인가!
“으아아아아!”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내지른 그는 미친 듯이 두 손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
금룡신군의 공격은 하늘과 땅을 뒤집어 놓을 것처럼 강맹했다.
고오오오오!
청산자의 검은 하늘을 꿰뚫고 바위산을 당장 두 쪽 낼 듯했고, 암천신마의 소리 없는 장력은 온몸을 빨래 쥐어짜듯이 짓눌렀다.
그러나 자신도 과거의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피하고 맞받아치는 사이, 그의 손에 검이 나타났다.
‘좋았어! 이제 제대로 한번 해보자!’
쾌재를 부른 그는 천뢰검법을 펼쳤다.
콰르르릉!
귀청을 울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가공할 검세가 해일처럼 밀려가더니 건너편에 있는 제법 큰 산을 통째로 갈라버렸다.
‘맙소사!’
입이 딱 벌어지는 광경.
하지만 세 노인은 옷자락 하나 찢어지지 않은 채 그를 동시에 공격했다.
콰과과광!
쏴아아아아아!
장천운은 다시 전력을 다해서 검법을 펼쳤다. 지금까지 한 번도 펼쳐본 적이 없는 초식이었다.
자신이 펼치면서도 어떻게 펼칠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가공할 위력에 하늘과 땅이 동시에 갈라지는 듯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무공으로도 세 노인을 막을 수 없었다.
서걱.
기분 나쁜 소리, 등골이 오싹한 느낌과 함께 검을 든 손이 잘려서 허공으로 튀었다.
‘젠장!’
콰직!
왼쪽 다리가 으스러지면서 피안개를 뿌리며 사라졌다.
‘빌어먹을!’
그 후 배에 구멍이 뻥 뚫리고, 붕 떠서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전과 같이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으아아아, 씨이이이이바아아아알!”
“……바아아아알!”
벌떡 일어난 장천운은 어둠을 노려보았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주먹을 얼마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을 뚫고 손등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상반신을 일으킨 그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머릿속에서 맴맴 돌고 있는 검의 궤적과 진기의 흐름이 사라질 듯했다.
콰당!
“대주, 무슨 일이오?”
사공명신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을 때도 가까스로 집중을 유지했다. 문이 열리면서 시원한 밤바람이 밀려들자 오히려 정신이 더 맑아지는 듯했다.
그런데…….
“젠장! 대주, 왜 비명을 지르고 그래? 못 볼 거라도 봤어? 깜짝 놀랐잖은가!”
뒤따라 들어온 막소광이 투덜거리며 다가오자, 겨우 남아 있던 잔상이 흩어져버렸다.
어떻게 떠올린 초식인데. 팔이 잘리고, 다리가 으스러지고, 배에 구멍이 나면서 겨우 얻은 초식인데!
스윽, 고개를 돌려 막소광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서 시퍼런 귀화가 넘실거렸다.
진짜 귀신처럼 생긴 막소광조차 그 눈빛에 질려서 주춤주춤 물러섰다.
“어? 왜…… 그래, 대주?”
장천운은 막소광을 상대로 조금 전에 얻은 검초를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비록 반쪽자리로 전락해서 하늘과 땅, 둘 중 하나밖에 쪼갤 수 없을 듯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막소광의 몸을 두 쪽 내는 데는 조금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씨바, 왜 나만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슬금슬금 물러선 막소광이 문까지 다가가서 중얼거렸다.
“후우우우.”
장천운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막소광을 쪼개버리려던 생각을 철회했다.
“아무 일 없으니까, 그만 가보쇼.”
“정말 괜찮겠소?”
사공명신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장천운의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했다.
장천운 같은 고수가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저런 모습이란 말인가?
“꿈을 꾸었을 뿐이오. 아주 오래전에 꾸었던 꿈을 다시 꾸었소. 이제 다시는 꾸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개꿈인가 보군.”
장천운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기분 더러운 경험을 하루에 두 번이나 하고 싶지도 않았고.
“일어난 김에 대원들과 수련이나 해볼까?”
방문 밖에서 엿듣던 막소광은 간이 툭 떨어졌다.
사공명신도 가슴에서 찬바람이 불었다.
그는 자신이 급히 달려온 이유를 최대한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주, 독고민이 뇌옥에서 쓰러졌소.”
“쓰러져요?”
“피를 토하고 쓰러졌는데, 목숨이 간당간당한 것 같소.”
***
술시(戌時) 무렵.
장천운이 도착했을 때 뇌옥에는 대여섯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벽호당주 서호도 있었는데 초조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장천운이 묻자, 서호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모르겠네.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그러려니 했는데, 아무래도 독에 당한 것 같네.”
장천운은 독고민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바닥에 대고 엎어져 있었는데 안색이 푸르스름했다. 두 손은 바닥을 긁은 듯 손가락이 구부러져 있었고, 손톱은 반쯤 빠져서 너덜너덜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입 주변에 거무스름한 피가 흥건하게 고여서 마치 피바다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듯했다.
극렬한 고통을 겪은 모습.
“간수가 함부로 손댔다가 독에 중독되었어. 그래서 독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올 때까지 건드리지 말라고 했네.”
독고민 앞에 선 장천운은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고개를 옆으로 반쯤 돌린 독고민의 핏발선 눈이 부릅떠져 있고, 악다문 이가 피로 물든 상태였다.
손을 뻗은 장천운은 검지로 피를 찍었다. 그러고는 남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든 말든 혀에 가져다 대었다.
피에서 신맛과 싸한 맛이 동시에 느껴진다. 전에 몇 번 경험했던 맛과 비슷한 느낌이다.
‘지독한 독이군.’
문득 한쪽 구석에 뒤집어져 있는 그릇이 보였다.
일어선 그는 그릇이 있는 곳으로 가서 뒤집어진 그릇을 집어 들었다.
“왜 그러나?”
서호가 뒤로 다가와서 물었다.
장천운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릇에서 쏟아진 것처럼 보이는 음식찌꺼기를 엄지와 검지로 집었다.
그가 더러운 음식찌꺼기를 입으로 가져가자 바라보던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서호 역시 잔뜩 인상을 쓰고 입술을 씰룩거렸다.
‘제놈이 무슨 전문가라고……’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뇌옥으로 몇 사람이 더 들어왔다.
율검당의 신임 당주인 전무궁과 독고태, 그리고 두 사람을 수행하고 온 것으로 보이는 네 사람까지.
밖에는 더 많은 사람이 있는 듯했다.
전무궁과 독고태만 옥방으로 들어오고, 나머지는 밖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민아!”
독고태가 핏속에 쓰러져 있는 독고민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허겁지겁 독고민에게 다가간 그가 손을 뻗으려 하자 장천운이 제지했다.
“멈추십시오!”
멈칫한 독고태가 장천운을 돌아다보았다.
그가 멈추고 싶어서 멈췄다기보다는 강력한 무형의 힘에 의해서 멈춰진 것이었다.
그 힘의 주인은 장천운이었다.
“왜 막는 거냐?”
“독에 당했습니다. 자칫하면 단주께서도 독에 중독될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예전을 생각하면 그냥 놔두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독고태의 힘이 필요했다.
“뭐? 독이라고?”
“예, 단주. 독고 공자는 독이 섞인 음식을 먹고 중독되었습니다.”
독고태는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았다.
“어떤 놈이……. 무슨 독인지 알아냈나?”
“독의 종류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극독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독고태가 이번에는 서호를 노려보았다.
뇌옥은 벽호당 책임이다.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중독되었다면 서호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독고민을 가둔 서호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던 독고태는 쌓였던 분노를 곧바로 쏟아냈다.
“서 당주!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민아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이다니?”
서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저도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단주.”
“모른다고?”
“제가 설마 독이 든 음식을 독고 공자에게 고의로 주었겠습니까?”
반발하듯 되받아친 서호가 쌓인 불만을 장천운에게 쏟아냈다.
“장 대주가 독을 잘 아는 것 같군. 그럼 무슨 독인지도 알겠나?”
천하의 극독을 밥 먹듯 복용하긴 했어도 독의 종류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전문가는 아니다.
그래도 독왕의 극독을 복용하면서, 또한 독왕의 거처에서 지내며 나름대로 독에 대한 지식을 쌓은 그였다. 남초초가 재잘거리며 말해준 것도 제법 되었고.
그는 그때 배운 지식 두어 가지를 써먹었다.
“피에서 시큼한 냄새가 날 정도면 상당히 강력한 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 손을 댔다고 바로 중독된 걸 보면 피부 접촉조차도 위험합니다. 무슨 독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제가 봤을 땐 광물에서 추출한 독처럼 보입니다.”
죽어가는 아들에게 손도 대지 못하는 처지가 되자, 독고태는 남아 있던 분노를 마저 쏟아냈다.
“서 당주, 왜 민아를 오늘 풀어주지 않았나? 소성주께서 풀어주라고 한 말을 자네도 들었을 텐데?”
“안 그래도 내일 아침에 풀어줄 생각이었는데…….”
“내일? 오늘 풀어주기만 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서호로선 불만이 많았지만, 독고민이 중독되어서 목숨이 위험한 판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반드시 범인을 찾아내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잡아야지! 하지만 범인을 잡는다 해서 민아가 괜찮아지는가!”
독고태가 악을 쓰듯 소리치며 서호를 몰아붙였다.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대해본 적 있는 서호다. 독고태의 다그침에 화가 나는 데도 이를 악문 채 참았다.
‘제기랄. 하필 출정을 앞두고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그때 독고민이 눈을 치켜뜨고 몸을 들썩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