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214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00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214화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우문각이 흠칫하며 시선을 들었다.
장천운과 눈이 마주친 그의 이마에 골이 깊게 파였다.
모른다고 하면 그 동안 뭐했냐고 다그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는 걸 모두 말하자니 그 동안 왜 숨겼냐고 할 것이 뻔했다.
그는 일단 에둘러서 말했다.
“안 그래도 파천회에 대해서 파악한 바를 보고할 생각이었네.”
장천운의 입술 끝이 살짝 비틀렸다.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약 올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묘한 표정.
우문각은 가슴에 호두알만한 뭔가가 박힌 듯했다.
‘끄응, 빌어먹을 놈.’
하지만 지금은 사소한 일로 다툴 때가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 파천회의 움직임이 바빠지고 있었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의 지휘체계가 일반적인 문파나 단체와는 다른 것처럼 보인다는 거네.”
“뭐가 다르다는 거죠?”
사마경이 물었다. 질문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고 싶은 데도 참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 질문조차 함부로 해서는 안 되었다.
“파천회는 뜻이 같은 사람들이 모인 단체여서 회주에게조차 절대권력이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소. 그런데도 절대권력이 있는 단체처럼 아주 일사분란하고 철저히 계획적으로 움직이고 있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오.”
“회주가 누군지 아십니까?”
“알아내려고 해봤는데 철저히 비밀에 가려져서 쉽지가 않소.”
옆에서 지켜보던 장천운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만약 회주 외에 절대권력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요.”
“그렇다면 가능한 일이긴 하네만…….”
장천운의 질문에 대답하던 우문각의 눈이 가늘어졌다. 실처럼 가늘어진 그의 눈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설마……?”
“누군가가 배후에서 파천회를 실제로 지휘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겠지요?”
우문각이 고개를 느릿느릿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었군.”
“최대한 빨리 알아보셔야 할 겁니다, 총사. 전쟁이 시작된 이상 그들 역시 본격적으로 움직일 테니까요.”
* * *
그날도 운공을 하며 밤을 지센 장천운은 동이 틀 무렵 흑월대원들을 소집했다.
반각도 되지 않아서 무화원의 뒷마당에 흑월대원들이 늘어섰다. 이렇게 모두가 한 장소에 모인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흑월대는 사마경을 따라서 출정해야한다. 구천호령 중 이조가 밤새 호위를 책임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혁련기, 사공명신, 구산. 흑월대 삼조를 이끄는 세 사람은 긴장한 표정으로 장천운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적이 무림맹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요. 어쩌면 천하를 상대로 싸워야 할지도 모르오.”
담담한 장천운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흑월대원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으로 변했다.
긴장한 표정, 흥분한 표정, 암울하게 가라앉은 표정, 여자를 만나러 가던 길에 똥을 밝은 사람처럼 짜증난 표정 등등.
“젠장! 이제 진짜 전쟁이군.”
막소광이 구시렁거렸다. 두려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두려워하기는커녕 심심한데 잘 됐다는 표정이었다.
막소광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그랬다. 마치 싸우지 못해서 안달난 사람 같았다.
“지금이라도 흑월대에서 빠지고 싶은 사람은 나오시오. 이 장천운의 이름을 걸고,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보내주겠소.”
장천운은 그 말을 하고 반각을 기다렸다.
대원 중 무림맹과의 싸움을 어려워할 사람이 최소 서너 명은 있었다. 사공명신과 두양양이 그런 사람에 속했고, 방호 등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빠진다고 하면 섭섭해서 한두 마디 할지는 몰라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눈빛이 갈등으로 흔들렸다.
“열을 셀 동안 결정을 내려주시오. 하나, 둘, 셋…….”
장천운이 마지막으로 열을 세기 시작했다.
갈등이 일었던 사람들의 눈빛이 점점 고요해졌다. 마음을 정한 듯했다.
“……아홉, 열.”
‘열’소리가 나올 때까지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사공명신이 투덜거렸다.
“두 소저가 여기 있는 이상 나도 안 간다고 했잖소, 대주?”
방호도 한마디 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오, 이번 일은 무림맹도 잘한 것이 없는 것 같거든. 정정당당해야 할 무림맹이 언제부터 기습공격을 즐겨한 건지 모르겠소.”
말하는 동안에도 눈알이 따로따로 놀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누구도 그를 놀리지 않았다.
장천운은 피식 웃는 것으로 그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무심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나는, 이 장천운은 우리가 여기로 다시 돌아왔을 때, 지금 앞에 있는 사람 모두 이 자리에 있기를 바라고 있소.”
나직하면서도 힘이 실린 목소리가 대원들의 고막을 울렸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눈가가 시큰거렸다.
“물론 가야할 길이 험난할 거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모두들 잘 알 거요.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고자 하오.”
장천운이 대원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모두 최선을 다하시오. 최선을 다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으시오.”
그날 새벽의 무화원은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말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고, 일부 몇 명은 눈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명심하시오. 어떤 경우가 닥쳐도, 동료를 자신처럼 여긴다면 살아날 확률이 조금 더 높아질 거요. 만약 동료가 위기에 처했는데 보고만 있는 사람이 있다면, 특별히, 아주 특별히 신경 써서 사흘간 특별교육을 받게 될 거요.”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특별’자만 세 번이나 들어간 경고는 활활 타오르던 불길도 단숨에 꺼뜨릴 만큼 위력이 강력했다.
‘아예 패죽이겠다고 하지?’
‘다른 사람 대신 차라리 네가 죽어라, 그 말이잖아?’
‘씨발, 나 살기도 바쁜 판에 다른 놈까지 신경 써야 할 것 같네.’
‘어떤 새끼든, 그런 놈이 있으면 내가 죽여버리겠어!’
몇 사람이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장천운은 표정만 보고도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불만이 아닌 각오를 다지는 표정이었다. 정 때문이라기보다 특별교육을 받기 싫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그래도 나쁠 것은 없었다. 그만큼 살아날 확률이 높아질 테니까.
‘누가 이번 일을 계획했는지 몰라도 뜻대로는 되지 않을 거다.’
* * *
출정의 날이 밝았다.
층층이 짙게 낀 구름 때문에 해는 보이지 않았다. 장강의 습기를 품은 바람이 구천성을 휩쓸고 지나가자, 정문 좌우에 늘어선 서른여섯 개 깃발이 찢어질 듯 펄럭였다.
출정은 사시 초, 바람이 잠잠해질 즈음에 시작되었다.
예상 외로 조용한 출정이었다.
둥……! 둥……! 둥……!
고루에서 철기보 무사들의 원혼을 달래는 북소리만이 간간이 울릴 뿐, 누구도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천 명 넘는 무사가 입을 닫은 채 구천성을 빠져나가는 모습은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로 엄숙했다.
쿠르르르르르.
패왕거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정문을 통과했다.
장로와 호법이 탄 마차 두 대와 물품을 실은 마차 열두 대도 뒤따라서 구천성을 나섰다.
마침내 전쟁의 서막이 올라가고, 폭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번 폭풍은 지독한 혈우를 동반하게 될 것이다. 모두들 그걸 알기에 쇳덩이가 들어찬 듯 가슴이 무거웠다.
“사마경이 구천성을 나섰습니다.”
“사마경이 구천성의 주력을 직접 이끌고 이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출정한 무사는 모두 이천 정도로 추정됩니다.”
사마경의 움직임은 여기저기로 긴급하게 전해졌다. 무노인도 보고를 받았고, 천외삼성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리고 하루 후에는 무림맹의 본진에도 상세하게 전해졌다.
* * *
오군(五軍)으로 나누어진 이천 무사는 좌우로 이십 리 거리를 유지한 채 빠르게 북으로 이동했다.
사마경이 탄 패왕거는 중앙에서 전군을 지휘했다.
다음 날 오후, 유시 초쯤 패왕거가 정양현에 도착하자 십이지부 중 신양의 섭가장과 부양의 화검문, 박주의 용천방 칠백 무사가 합류했다.
이제 철기보까지 남은 거리는 이백 리 정도. 하루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여서 구천성 무사대는 정양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정양에는 구천성 예하의 세력인 운천장이 있었다. 크기는 크지 않았지만 이백여 명 정도는 수용할 수 있었다.
사마경과 장로, 호법, 그리고 흑월대, 백천대, 수혼대는 운천장에 머물고 나머지는 정양의 객잔에 숙소를 잡았다.
정유가 미리 사람을 보내서 큰 객잔 다섯 개를 통째로 빌려놓았기에 숙식하는데 큰 불편은 없을 듯했다.
사마경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간부회의를 열었다.
“군사, 하루 일찍 출발한 철기보 무사와 풍운산장 무사들은 지금 어디에 있죠?”
사마경이 묻자, 정유가 나서서 대답했다.
“그들은 지금 각산에 있습니다.”
정양에서 각산까지는 백이십 리 거리다.
“철기보의 생존자들이 각산에 있었다고 합니다. 부상자가 많은 데다, 철기보를 차지하고 있는 무림맹의 전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강해서 일단 부상자를 치료하며 본 성의 주력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번에는 진강이 물었다.
“현재 무림맹을 이끌고 있는 수장은 누군가?”
“소림사의 장로인 원공대사와 화산파의 영무자입니다. 그리고 제갈승조가 군사로 있습니다.”
“원공대사? 골치 아픈 자가 나왔군.”
원공대사는 불공 대신 소림무공을 발전시키는데 일생을 바친 승려다. 소림사의 전설인 공화대선사, 소림의 백년 미래를 책임질 거라는 젊은 고수 대운과 함께 소림사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고수.
소림사제자들은 평생 소림무공만 연구한 원공대사를 무불(武佛)이라고도 불렀다.
문제는 그의 성격이었다. 그는 자비보다 벌을 추구했다. 쓸데없는 자비는 죄만 키운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승려답지 않게 너무 냉정해서 소림사의 고승들이 그에게 중직(重職)을 맡기지 않았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강호의 사가들이 그를 무불무통, 무자비불이라 했을까.
어쨌든 그를 공격대의 선봉에 세웠다는 것만으로도 무림맹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허창에 있던 본진의 움직임은 파악되었나요?”
사마경이 물었다.
정유가 그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본진은 현재 루하까지 내려와 있고, 약 오백 정도의 지원군이 서평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창으로 접근하면 그들도 내려오겠군요.”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소수만 움직인다면?”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정유가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마경은 심심해서 던져본 질문이라도 되는 듯 고개만 끄덕이고 더 묻지 않았다.
회의는 한 시진 정도 이어졌다.
정유는 비령각의 일군사답게 질문이 떨어질 때마다 답변이 막히지 않았다.
해시 초, 회의가 끝나자 간부들이 모두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갔다. 우문각도 마지막쯤 일어나 방을 나갔다.
남은 사람은 사마경과 장천운, 소연추뿐.
구양명은 회의 시작 때부터 끝날 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전과 다른 모습이라 해도 간부 중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 몰랐다.
사실 사람들이 그를 몰라본다는 것 자체가 정상은 아니었다.
흑월대원들도 그의 정체를 알고 있고, 선등경과 용화성 일행도 그가 천한마검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사십 명에 가까웠다.
물론 그들에게 구양명의 정체를 밝히지 말라고 당부하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전부 입이 무거운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닌데.
“천운.”
찻잔을 내려놓은 사마경이 허공을 보며 장천운을 불렀다.
“예, 소성주.”
“흑월대 데리고 철기보에 좀 다녀와야겠어.”
장천운은 사마경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아까 그런 질문을 한 건가?
사마경은 그 눈길을 느끼고도 허공에서 초점을 떼지 않았다. 허공에 서리가 내릴 것처럼 으스스한 눈빛이었다.
“가서 한바탕 뒤집어놓고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