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208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92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208화
백발도인이 고개를 돌려서 말한 자를 바라보았다.
깨끗하게 다듬은 수염과 단정한 복장, 천장 산봉우리 꼭대기 호수처럼 깊은 눈, 사십대의 중년남자는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만큼 준수했다.
“자신 있느냐?”
“두어 명만 제거하면 사마경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습니다.”
“공손백도 장천운을 처리하지 못했다. 과대평가도 좋지 않지만, 과소평가는 더더욱 안 좋은 습관이야.”
“그래봐야 스무 살 넘은지 얼마 안 된 애송이입니다. 맡겨주시면 제자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백발도인은 한마디 더 해주려다가 입을 닫았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한번이라도 직접 대해보는 게 나을 때가 있다.
상대가 강하다면 좋은 경험이 될 것이고, 약하다면 이 기회에 제거하면 된다.
사형의 제자인 정도하라면 천하에서 적수를 찾기 힘든 실력에 머리까지 뛰어나니 적절히 알아서 처신할 것이었다.
“알았다. 대신 그 일에 대한 결과는 네가 책임져야할 것이니라.”
“예, 사숙.”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백발도인은 왼쪽 뺨에 점이 박힌 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전소, 네가 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다.”
“말씀하시지요, 진인.”
전소라 불린 중년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백발도인, 영산자가 별다른 표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파천회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가 있는 것 같다. 그자에 대해서 조사해봐라.”
“조사만 하면 되는 일입니까?”
“일단은. 너의 실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자의 정체와 능력을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니 조심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 * *
오시가 막 지났을 때였다.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던 경천단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단주, 공자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밖에서 들리는 흥분된 목소리에 독고태는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사실이냐?”
“예, 단주. 아직 일어나실 정도는 아닙니다만, 정신을 차린 것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벌떡 일어선 독고태는 급히 방을 나섰다.
독고태가 의약당에 도착했을 때, 독고민은 누워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민아야.”
독고태가 불렀다. 그제야 독고민이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아, 아버지…….”
“몸은 좀 어떠냐? 괜찮아?”
독고태는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밉던 곱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 되돌아왔다. 하거늘 어찌 태연할 수 있을까.
“내, 내 몸이 이상…… 왜…… 아버지…….”
독고민의 몸이 잘게 떨렸다.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일단 깨어났으니 곧 나을 거다. 너무 걱정 마라.”
“진기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며칠 만에 깨어나서 그런 거…… 민아야. 민아야?”
독고태가 다급한 목소리로 독고민을 불렀다.
독고민의 눈이 스르르 감기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는 데도 눈을 뜨지 않았다.
“송 당주,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송명선이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제 막 깨어나서 아직은 온전치 않습니다. 조금 자고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큰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며칠 지나면 괜찮을 겁니다.”
“후우우우, 그래? 어쨌든 수고가 많았어. 내 잊지 않겠네.”
“저…… 그런데…….”
송명선이 머뭇거리며 말꼬리를 길게 끌자, 독고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나?”
“독고 공자는 앞으로…… 공력을 이삼 할밖에 사용할 수 없을 것 같…….”
송명선이 다 말하기도 전에 독고태가 펄쩍 뛰었다.
“뭐라고? 공력을 이삼 할밖에 사용할 수 없어?”
“그나마 그 정도라도 사용할 수 있는 게 다행입니다. 하마터면 무공은커녕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사실이 그러했다. 그러나 뒷간 들어갈 때의 마음과 나왔을 때의 마음은 다른 법이다.
“말도 안 돼! 우리 민아가 왜? 아니지, 아냐. 지금은 그래도 나중에는 다시 무공을 다 되찾을 수 있겠지?”
그는 조급한 표정으로 두서없이 말하고 송명선을 바라보았다.
송명선은 착잡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마…… 제가 잘못 진맥한 게 아니라면…… 십 년이 지나도 힘들 겁니다.”
독고태는 송명선을 노려보았다. 꾹 다문 입 아래의 턱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방법은? 공력을 되살릴 방법은?”
“저로선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단주. 죄송하외다.”
바로 그때, 독고태의 고함에 정신을 차린 독고민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뭐, 뭐라고요? 그럼 제가 삼류무사 나부랭이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공자…….”
“말도 안 돼! 그럼 내가, 이 독고민이 병신이 되었단 말입니까? 그럴 순 없어! 그럴 수는 없어! 내 공력을 되살려 놔!”
독고민이 몸을 들썩거리며 소리를 내질렀다.
방을 기웃거리던 몇 사람이 화들짝 놀라서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차라리 죽이시오! 나는 병신으로 살기 싫으니까! 차라리 죽여……!”
독고태가 지풍을 날려서 독고민의 혈도를 제압했다.
고래고래 소리치며 몸을 일으키려던 독고민이 침상에 털썩 쓰러졌다.
독고민의 수혈을 제압한 독고태는 목이 꺾어질까 염려될 정도로 고개를 번쩍 쳐들고 천장을 노려보았다.
“그래, 그럴 수는 없지, 그럴 수는……. 우리 민아가 어떤 아이인데…….”
“단주…….”
송명선이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독고태를 달래려했다. 그러나 독고태는 그의 말이 귓전으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다시 고개를 내린 그는 차갑고도 어떤 결의에 찬 눈빛으로 독고민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입에서 칙칙하고도 고저 없는 목소리가 나직이 흘러나왔다.
“민아는 내가 데려가겠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민아를 예전처럼 되돌려 놓을 거야.”
송명선은 그를 막기 위해서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달싹였지만,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닫았다.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요. 기해혈이야 약간의 손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다른 혈도 세 개는 회복불능 상태가 되었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절대 모든 공력을 회복할 수는 없을 거요.’
그가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독고태가 수행해온 호위무사 중 하나에게 말했다.
“여승, 민아를 안아라.”
뒤에 서 있던 두 호위무사 중 하나가 나서더니 독고민을 안아들었다.
송명선은 막지 않았다. 지금은 막는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독고태는 호위무사가 조심스럽게 안아든 독고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걱정 마라. 이 애비가 어떻게든 네 몸을 본래대로 되돌려놓을 테니까.’
* * *
평범한 학자나 사용할 법한 수수한 방안. 넓이가 열두어 평 되는 방안 한가운데에서 독고태와 노인이 마주보고 서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독고민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는데, 눈을 감은 그의 가슴이 미미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수혈을 짚여서 잠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내가 찾기 전에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거늘…….”
노인이 노기어린 목소리로 독고태를 다그쳤다.
크지 않은 몸집, 하얀 머리, 구부정한 등.
하얀 눈썹 아래의 실처럼 가느다랗게 뻗은 눈만 아니라면 여느 시골 노인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독고태는 그런 노인의 다그침에 머리가 땅에 닿도록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숙부. 민아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 네 죄를 더 묻지 않는 것도 민아 때문이니라.”
“민아의 몸을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노인은 독고태를 노려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이전의 독고태는 욕망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욕망의 자리 한 구석에 또 다른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복수, 그리고 부정.
‘그래, 너도 결국은 아버지였구나.’
노인은 더 매몰차게 몰아붙이지 못하고 시선을 독고민에게로 돌렸다.
“민아는 네 아들이기도 하지만 내 손자이기도 하니라. 민아는 나에게 맡기고 돌아가 있어라. 그리고 내가 부르기 전에는 찾아오지 마라.”
“예, 숙부.”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민아는 다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거다.”
“감사합니다.”
“대신 민아를 치료하고 나서 당분간 내 곁에 둘 것이니 그리 알아라.”
그 동안 못미더워했던 민아를 왜 갑자기 곁에 두겠다는 걸까?
독고태는 잠깐 의문을 품었지만 곧 마음을 정리했다. 설마 숙조부가 손자에게 해가 될 일을 할까 싶었다.
“숙부님께서 그리 해주신다면 민아에게도 복이 되는 일인데 어찌 제가 안 된다 하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숙부님”
그때만 해도 독고태는 생각도 못했다. 숙부인 독고광이 무슨 뜻으로 독고민을 곁에 두겠다고 했는지.
* * *
사방이 검은 빛 일색인 석실의 중앙.
칙칙한 불빛 아래에 관처럼 생긴 커다란 나무통이 놓여 있었다.
나무통 안에는 붉은 액체가 가득 들어 있었고, 그 안에는 머리만 밖으로 내민 자가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다.
삐익.
어느 순간, 고요하던 석실 안에 짧은 피리소리가 울렸다.
촤아아악.
붉은 액체 속에 있던 자가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무표정한 얼굴, 거무스름한 안색, 칙칙한 눈빛. 나이는 사십대 중후반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자는 일어선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곧 두 장한이 그에게 다가가서 마른 천으로 그의 몸을 닦았다.
거무스름한 신체는 군살 한 점 없이 탄탄했다. 언뜻 보면 피부가 쇠로 된 듯해서 칼로 그어도 끄떡없을 것처럼 보였다.
두 장한은 나무인형을 닦는 것처럼 아무런 표정도 없이 사십대 남자의 몸을 세심하게 닦았다.
심지어 남성의 상징을 닦으면서도 눈빛에 변화가 없었다.
신체의 주인 역시 일절 미동도 하지 않았고.
괴이하다면 괴이한 광경이었다.
두 장한은 사십대 남자의 몸을 다 닦은 후 먹처럼 검은 흑포를 걸쳐주었다.
그들이 검은 천으로 된 허리띠를 다 묶고 물러서자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 됐으면 이쪽으로 오게.”
석상처럼 서 있던 사십대 남자가 그 목소리에 반응을 보이며 움직였다.
몸을 반쯤 돌린 그자는 소리가 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걸이는 무척 자연스러웠다. 묵묵히 서 있던 때의 그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다.
피리소리를 낸 사람은 장산이었다. 석실의 입구에 서 있던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십대 남자를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시간이 몇 달만 더 있었어도…….’
대법은 팔 할 정도의 성과를 보였다. 신체는 완벽해졌다.
나머지 이 할은 신체능력이 아닌 정신적인 문제였다. 서너 달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정신마저 온전하게 되찾을 수 있었을지 모르거늘.
‘성공 확률은 반반이지만 그래도 해볼 만했는데…… 후우, 아쉽지만 할 수 없지.’
천하는 이미 피의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했다.
몇 달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장산은 사십대 남자가 다가오자 말문을 열었다.
“몸은 어떤가?”
“괜… 찮… 아.”
어눌한 목소리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나지막한 목소리는 고저가 없어서 산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듯했다.
“어쩌면 더 나아지지 않을 수도 있네.”
“이 정도…… 됐…어.”
장산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가세, 소천.”
소천이라 불린 사십대 남자는 일말의 표정변화도 없이 장산의 뒤를 따라갔다.
앞서 걷는 장산의 눈에는 짙은 아픔이 드리워져 있었다.
‘소천,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네. 자네나 나나 누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그때 뒤에서 따라오던 사십대 남자가 말했다.
“그 아이…… 잘 있나?”
장산은 앞을 보고 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있네.”
사십대 남자는 더 묻지 않고 입을 닫았다.
장산도 말하지 않았다.
* * *
저녁식사를 마친 술시 무렵, 잠깐 볼일을 보고 무화원으로 돌아가던 유고원을 향해 삼십대 장한 하나가 다가갔다.
유고원도 그자의 접근을 느끼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구천성 안에는 아직도 삼 천 명에 달하는 무사가 있다. 살기를 드러내거나 행동으로 적대감을 내보이기 전에는 모두가 동료인 것이다.
‘뭔가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날 우습게보고 수작질 거는 거라면 사람 잘못 골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