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2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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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07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206화
백리우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어쩌면 우리가 가장 좋은 조건이지 않느냐?”
백리우진이 호위무사대 중 하나인 백천대 대주다. 사마경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자.
백리호가 욕심을 부릴 만했다.
그러나 백리우진은 즉답을 회피했다.
“그래서 더 감시가 심합니다.”
“그건 네가 알아서 떨쳐내야지. 그 정도도 못한다면 어찌 내 뒤를 이을 수 있겠느냐?”
은근한 다그침.
백리우진은 속에서 묵직한 덩어리가 올라오는 듯했다.
뒤를 잇는다?
몇 년 전이었다면 그 말을 조금이나마 믿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당신의 달콤한 말 뒤에는 항상 독이 숨어 있었지. 나는 이제 당신의 말을 믿지 않아.’
그러나 겉으로는 일정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숙부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면 어떻게든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하하하.”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백리호가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네가 손을 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지켜주마.”
단,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다.
물론 백리우진도 모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숙부.”
그때 문득 든 생각. 백리우진은 백리호의 표정을 살피면서 넌지시 물었다.
“저번에 숙부께서 말씀하신 대령주의 무서움이 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알면 이번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백리호의 눈빛이 찰나 간 흔들렸다. 눈이 가늘어졌다. 갈등이 그대로 드러났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표정변화.
백리우진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지금은 다른 때와 상황이 달랐다. 음모가 성공하면 최소한 구천성의 이인자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었다.
문인동에게 밀리고 종리성학에게마저 옆자리를 빼앗긴 백리호가 본래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
‘당신은 말할 수밖에 없을 거다.’
속으로 열쯤 세었을 때에 백리호의 입이 열렸다.
“좋다, 말해주마.”
심호흡을 한 그는 자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방이거늘 그의 눈빛에는 원인 모를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은 지독한 두려움이었다.
“사형이 혼자서 지금의 힘을 이루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사람들은 대장로 나극이 있었기에 공손백이 장로원에서 세월을 키웠을 거라 생각하고 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공손백이 장로원에 칩거한 것부터가 계획적이었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다.
“아마 사마중천의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십여 년 전에 이미 구천성의 주인이 바뀌었을 거다.”
백리우진은 상상도 못했던 말에 눈이 커졌다.
“대령주 뒤에 누가 있기에…….”
“나도 그들의 정확한 정체는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사형조차 한 수 양보할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백리호의 말끝이 살짝 떨리는 듯 느껴졌다.
백리우진은 경악한 한편으로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혹시 숙부가 욕심을 내는 게 대령주의 오른팔이 아니라…… 그들과의 관계?’
얼마든지 가능한 추측이다.
‘그렇다면 나라고 해서 욕심을 내지 말란 법은 없겠지.’
* * *
연녹색 자기 찻잔에서 은은한 다향이 피어나는 방안.
밖에서 대나무잎이 스치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리는 와중에 무 노인의 노기 섞인 칼칼한 목소리가 촛불을 흔들었다.
“백기주가 문인동과 개별적으로 접촉을 했다고?”
“그랬나 봅니다.”
“서문주경의 허락을 받은 일이겠지?”
“그랬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 친구, 쓸데없는 욕심을 냈군.”
무 노인의 주름진 이마가 깊게 파였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큰일 때문만이 아니다. 작은 사건이 눈덩이처럼 커져서 한 나라를 패망의 구덩이로 몰아넣을 때가 부지기수다.
천하를 놓다 다투는 대계도 작은 실수하나로 실패하곤 한다.
특히 상부에 보고도 없이 욕심을 내서 진행하던 일이 잘못되면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백기주 제갈승우가 이번에 한 일도 마찬가지다. 어설프게 진행한 계책이 실패함으로써 사마경의 힘이 단단해졌다.
아직 호불호를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자신의 계획에 균열이 생긴 것만은 분명했다.
“무림맹은 어떻게 하고 있느냐?”
“안휘성 쪽은 집결을 마치고 무림맹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허창 쪽도 무사의 숫자가 오천으로 늘어났습니다. 예정대로라면 이삼일 안으로 움직임이 시작될 것입니다.”
“구천성도 곧 움직이겠군.”
“그럴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놈들도 움직이겠지?”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흐으음, 어쨌든 약간의 착오가 있긴 했지만 큰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은 것 같군. 그나마 다행이야.”
무 노인이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다시 찻잔을 잡자, 장산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노야, 두 번째 계획을 본격적으로 시작해도 되는지, 회주께서 답을 달라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지금 모용문태가 그 일을 맡고 있지?”
“예, 노야.”
북천도왕(北天刀王) 모용문태. 오왕 중 도왕으로 불리는 전대의 절대고수. 그가 파천회의 부회주 중 한 사람일 줄이야!
강호에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또 한바탕 시끄럽게 들썩일 것이었다.
“예정대로 시작하라고 해. 그 친구라면 실수하진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노야.”
무 노인은 장산의 말을 들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장산, 만약에 말이다. 애지중지하던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경우가 닥쳤을 때, 너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
흠칫한 장산이 눈을 들었다.
“노야…….”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말로 그래야만 하는 경우가 생길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가까운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대계를 완성할 수 없는, 그런 더러운 경우 말이다.”
그토록 침착하고 깊이 모를 호수처럼 고요하던 장산도 바로 대답을 못했다.
시선을 돌린 무 노인이 답을 재촉하듯 장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둘 중 단 하나의 길만 선택해야 한다면?”
장산은 타오르는 촛불을 멈춰 선 눈으로 한없이 쳐다보았다.
갑자기 촛불이 흔들렸다. 어디선가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가 보다. 아니면 숨을 너무 크게 쉬어서 방안의 공기가 거세게 흔들렸던지.
“노야…… 저는…….”
눈을 든 장산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대들보에 적힌 두 글자가 누런 불빛을 받아서 선명하게 보였다.
대의(大儀).
오늘 따라 그 글자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진다.
“저는…… 맹서한 대로 대의를 따를 것입니다.”
“어려운 선택을 강요해서 미안하구나.”
“노야께서 구해주신 순간부터 제 몸과 마음은 이미 노야의 것입니다. 그러니 미안해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직은 실망하거나 너무 아쉬워할 것 없다. 최대한 그런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하면 되니까.”
장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천하를 꿰뚫어보는 무 노인이 한 말이다.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자신을 위로하려는 목적도 없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맞장구쳐주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지요.”
무 노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꺼풀 속의 두 눈이 무채색으로 가라앉았다.
“며칠 후 그를 깨울 것이니 준비해 두도록 해라.”
흠칫한 장산이 눈을 들어서 무 노인을 바라보았다.
“너무 일찍 깨우는 것 아닐까요?”
“지금 깨운다 해도 제 능력을 발휘하려면 시간이 열흘은 더 필요해. 나중에 깨우면 기회가 와도 그의 능력을 활용할 수 없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아마 그도 사정을 알면 이해할 거다.”
* * *
밤이 깊은 자시 말.
독왕의 해독단을 복용한 장천운은 운공요상을 하며 독기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모용예가 복용시킨 독은 주기적으로 발작하는 독이어서 당장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만큼 그조차도 찝찝했다.
찝찝한 것은 제거하는 게 상책.
장천운은 아예 독을 제거하기로 작정했다. 그가 독을 제거한다면 모용예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일 것이었다.
‘난 남의 노리개가 되는 걸 무지 싫어하거든.’
다행히 독왕의 해독단은 그에게 최적화 되어 있었다. 그의 피가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쪽 구석에 뭉쳐있던 독기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흥, 모용예. 너는 내가 독왕의 해독단을 갖고 있다는 걸 생각도 못했을 거다.’
아무리 지독한 독이라 한들 독왕의 흑명지독이나 백령혼만 할까?
한 시진쯤 지나자 그의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얼마나 지독한지 삼 년 썩은 똥통 속에 빠진 사람을 끌어안은 듯했다.
중화된 독기가 배출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악취 풍기는 독약을 저항도 못해보고 복용했다니.
‘크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울렁거리는군. 대체 무슨 독을 먹인 거야?’
그러나 장천운은 운공을 멈추지 않았다.
두 시진이 지났다. 악취가 조금씩 약해졌다.
코가 냄새에 익숙해진 걸까?
원래 똥통 옆에서 살다 보면 썩은 똥냄새도 친근하게 여겨지는 법이다.
아니면 독기가 거의 다 빠져나온 건가?
그럴 지도 몰랐다.
이 정도 악취를 풍겼으면 됐지 뭐.
몸속에서 이상 반응이 일어난 것은 그때쯤이었다.
기해혈 저 밑바닥에서 기이한 떨림이 일었다. 떨림은 점점 커지더니 기해혈을 진동시켰다.
‘이건 또 뭐지?’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기분 좋은 전율 정도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전율이 너울처럼 퍼졌다.
위로 치고 올라간 기운은 임맥을 진동시키며 관통했고, 밑으로 내려간 기운은 회음에서 잠시 멈췄다가 징검다리를 건너듯 훌쩍 건너가서 등줄기의 독맥을 타고 솟구쳤다.
전율이 앞뒤에서 동시에 일었다.
눈을 감은 그는 절반쯤 무아의 경지에 빠져서 구륜심법을 운용했다.
아니 운용한다기보다 알아서 움직이는 구륜심법의 길에 몸을 맡겨놓았다.
어느 순간, 시간의 흐름이 정지되었다. 정신도 몽롱했다.
일각이 지났는지, 하루가 지났는지, 열흘이 지났는지 시간을 구분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몸 상태도 정확하게 판단내릴 수 없었고.
그나마 정신을 잃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끼이이이.
문이 슬그머니 열리고,
“윽! 이게 무슨 냄새에요?”
안으로 들어오던 연송하가 코를 쥐어 싸며 이마를 잔뜩 찌푸렸을 때도 그는 제정신이었다.
‘이제 근무가 끝났나 보군.’
그런데 머릿속에서 쿵! 하는 천둥소리가 들렸다 싶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설마…… 아프다고 앉아서 일 본 건 아니죠?”
아마 연송하가 째려보며 그 말을 안했다면 그대로 정신을 잃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영원히 깨어나지 못한 채 사람들이 그렇게 가고 싶어 안달하는 천당으로 직행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는 정신을 잃지 않아서, 천당 대신 인상을 잔뜩 쓴 채 째려보는 연송하의 눈길을 마주볼 수 있었다.
‘아무리 냄새가 좀 난다고 해도 그렇지, 앉아서 쌌냐는 말을 어떻게 해? 그것도 여자가.’
장천운이야 불만이 많았지만, 연송하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솔직히 숨 쉬는 것도 힘들었다. 아마 ‘오빠’만 아니었다면 방문을 박차고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녀는 장천운 주위를 둘러보다 뭘 봤는지 코를 쥐어 싼 채 눈초리를 치켜떴다.
“어휴, 진짜 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