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243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10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243화
곽교진이 무심한 어조로 말하며 칼을 뽑았다.
무거운 기운이 그를 중심으로 휘돌았다.
그의 뒤쪽에 서 있던 자들도 좌우로 흩어지며 귀룡문 무사들을 향해 맞서갔다.
왕유가 데리고 온 자들과 그들 삼십여 명은 모두 흑월회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복장만 같을 뿐 절반은 천은방의 무사들이었다.
특히 머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수염이 가득한 자는 느릿하게 움직였는데, 다름 아닌 장천운이었다.
한평도는 그들이 움직인 후에야 불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단순한 흑도의 무리가 아니다!’
처음부터 계산이 어긋난 셈.
그가 다급히 경고를 보내려 했을 때는 이미 귀룡문 무사들과 흑월회 쪽 무사들이 뒤엉킨 후였다.
게다가 곽교진이 그를 향해 칼을 뻗고 있었다.
“내 칼은 전과 달라졌다네. 보고 싶다면 보여주지.”
곽교진의 모습이 칼 뒤로 서서히 사라졌다.
막 소리치려던 한평도는 숨을 멈췄다. 부릅뜬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 순간만큼은 다른 어떤 생각도 나지 않았다.
손에 땀이 찬 그는 모든 공력을 칼 쥔 손에 집중시켰다.
곽교진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의 칼은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분명 궁천도법의 기수식이거늘……!’
한평도는 곽교진의 칼끝을 바라보며 한 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궁천도는 궁천도이되, 그가 아는 궁천도가 아니었다.
‘곽교진의 무공이 이 정도였던가?’
그 사이 귀룡문 무사들이 대낮에 날벼락을 맞은 참새처럼 쓰러졌다.
흑월회 복장을 한 천은방 사람들은 모두 간부급 고수들이었다.
귀룡문의 건곤당 무사가 흑도무리에게는 저승사자 같을지 몰라도 그들에게는 허수아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왕규를 상대하던 강상기는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후퇴를 알릴 새도 없이 반 수 가까운 무사들이 쓰러졌다. 게다가 그 자신은 왕규가 쏟아붓는 공격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왕규는 신이 나서 강상기를 몰아붙였다.
전이었다 해도 밀리지 않을 상대였다. 하물며 공력이 늘고 초식에서도 진전을 본 그다. 강상기가 비록 일류 중의 일류고수라 해도 왕규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건방진 새끼!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이 나대?’
죽여선 안 된다고 했다. 중상을 입히는 것도 자제하라고 했다.
장천운의 당부만 아니었으면 주둥이를 쫙 찢어줬을 텐데…….
대신 그는 강상기의 입 옆에다 칼집을 내주었다. 다시는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도록.
“크읍!”
신음을 삼키며 주르륵 물러선 강상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 옆에서 솟아난 피가 목을 타고 흘렀다.
왕규의 입꼬리가 슬쩍 비틀어졌다.
‘자식, 이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겠지.’
그때 장천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멈추시죠.”
왕규가 목에 힘을 주고 소리쳤다.
“모두 멈춰라!”
흑월회의 총회주이자, 무창 흑도의 주인이며, 활불인 그가 소리치자 흑월회 복장을 한 무사들이 뒤로 물러섰다.
귀룡문 무사 중 멀쩡히 서 있는 자들은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쓰러져 있거나, 온몸이 피로 물든 채 싸움을 포기하고 한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한편, 한평도는 안색이 회칠을 한 것처럼 창백했다.
그와 곽교진이 겨룬 것은 단 삼 초식. 굳이 많은 대결이 필요 없었다.
삼 초식 만에 내상을 입은 그는 칼을 잡은 손이 잘게 떨렸다.
“정말…… 굉장한 도였소. 곽 형의 도는 이제 천지를 쪼갤 정도가 되었구려.”
“낯이 뜨겁군. 내 도를 장난처럼 여기는 자들이 들으면 웃을 거네.”
“말도 안 되는 소리. 천하의 누가 있어 곽 형의 도를 무시할 수 있단 말이오?”
누가 있긴? 바로 옆에도 있잖은가?
곽교진은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삼키고 씁쓸한 표정으로 도를 거두었다.
싸움은 이미 멈춘 상태다. 장천운과 호양청이 나눈 이야기 속의 상황이 그대로 연출 되었다.
문득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에 갇혀서 능력자들의 무서움을 알지 못한다. 알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으니 믿으려하지도 않는다.
때로는 남보다 똑똑하다고 알려진 사람들이 더 단단한 벽에 갇혀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 능력을 지닌 능력자들이 있다.
그들이 엉뚱한 마음을 먹으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천외에 그런 괴물들이 있다고 했던가?’
장천운이 그들에 대해 말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그런 자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왕왕 우리가 짐작도 못할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네.”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맺은 곽교진의 귓전에 장천운의 전음이 들렸다.
<계획대로 귀룡문주를 청하십시오.>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곽교진이 한평도에게 말했다.
“가서 문주에게 전하게나. 흑월회는 정말로 장강팔련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문주를 한번 만나고 싶군.”
“형님을 말이오?”
“몇 가지 할 말이 있네. 아마 문주에게도 손해되는 일은 아닐 거네. 필요하다면 이 곽교진의 이름을 걸지.”
곽교진의 말 한 마디가 만근 바위보다 무겁다는 걸 잘 아는 한평도다.
그는 곽교진이 이름까지 걸겠다고 하자 토를 달지 못했다.
“알겠소. 가서 말씀드리리다.”
“수하들이 다친 것에 대해서는 미안하군.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인 것은 자네가 더 잘 알거네.”
“단혈방 사람들도 많이 다쳤으니 그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소.”
쌍방이 피해가 났다 하나 단혈방 쪽은 죄도 없이 당한 상태다. 따지고 든다면 단혈방 쪽이 더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만대평은 따지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입장에서는 귀룡문과 싸우고 이 정도로 끝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우리 단혈방 역시 오늘 일은 잊겠소이다.”
곽교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두 사람의 말대로 되었어.’
소름이 돋았다.
만대평의 대답 역시 장천운과 호양청이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딱 하나, 두 사람이 예상 못했던 것이 있었다.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든 강상기가 이를 으드득 갈며 말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지만, 다시 돌아와서 모조리 목을 쳐…….”
그러다 왕규에게 한소리 들었다.
“그 친구, 입이 찢어지고도 버릇을 못 고치는군. 아예 아무 말도 못하게 확 찢어버릴까?”
흠칫한 강상기는 입을 꽉 다물고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한평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실력에서도, 기세에서도 패했다. 완벽한 패배.
그런데 기분이 상하기보다는 묘한 떨림이 일었다.
‘도대체 무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96장: 불타는 대운사
침석산에서 백여 리 북쪽에는 건물 열두 채로 이루어진 도관이 있었다.
청운궁이라는 이름의 그 도관은 황궁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일반인은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곳이었다. 그 바람에 한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가는 사람이 적었다.
유월의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던 그 날도 도관 안은 한산했다.
그런데 한산한 외부와 달리 청운궁 중앙의 이층으로 된 고풍스런 전각 안에는 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방 안의 기다란 탁자 좌우에 석상처럼 앉아 있는 사람 중에는 서문주경도 있었고, 악조백과 제갈승우도 있었다.
놀랍게도 파천회의 최고위급 간부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저번 당하에서의 일 이후 너무 조용히 지냈습니다. 지금 강호에서는 구천성과 무림맹 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회주께서는 계속 이대로 지내는 것이 옳다고 보십니까?”
제갈승우가 상석을 바라보며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석에는 무인이라기보다는 어디 깊은 산속에서 도를 닦는 게 더 어울릴 법한 백의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 백의노인의 왼쪽에는 서문주경이, 반대편에는 장대한 체구의 초로인이 앉아 있었다.
제갈승우의 말에 백의노인이 시선을 들었다.
아마 강호의 노고수들이 백의노인을 봤다면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맙소사! 무제께서 파천회주였단 말이오?’하면서.
무제(武帝) 이천릉.
오왕 이전의 절대고수인 삼제의 일인.
천하 정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고수 중 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리고 이십 수 년 전에 모습을 감춘 후 우화등선했다는 소문마저 돌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도 할 말 있으면 해보게.”
이천릉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 청색 무복을 입은 중년 무사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의견을 내놓았다.
“사실 언제까지 숨어서 활동할 수만은 없는 일 아닙니까, 회주? 이 기회에 우리를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는 팔기주 중 청기주인 옥적수였다.
두어 사람이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구천성과 무림맹이 전쟁을 벌였으니 우리 파천회가 움직이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가 아닌가 합니다.”
“맞습니다. 저 역시 두 분의 의견에 찬성입니다.”
힘을 얻은 제갈승우가 다시 이천릉에게 물었다.
“혹시 저희가 모르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회주? 듣기로는 노야라는 분께서 본 회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걸 반대한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이천릉이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네 말이 맞네. 구천성과 무림맹의 전쟁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에 나서지 않고 있었던 거네.”
“예? 대체 어떤 일이 그 일보다 더 중요하단 말씀입니까?”
“세상에는 왕왕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지곤 하지. 지금도 강호의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일이 어둠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네.”
“허어, 그게 무슨 일인데 회주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서문주경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만한 그도 무제 앞에서는 말을 조심했다.
이천릉이 고개를 돌려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불쑥 물었다.
“서문 아우는 혹시 하늘 밖에 또 다른 하늘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늘 밖에 또 다른 하늘이 있다니요?”
“못 들어봤나 보군.”
서문주경은 정말로 답답했다. 뜬금없이 웬 천외?
탄식이 절로 나왔다.
“허어, 그거 참. 아니 진짜 도라도 닦으셨습니까? 왜 느닷없이 하늘 밖의 하늘을 논하시는 겁니까?”
“우형이 이십오 년 전에 왜 강호를 등졌는지 아나?”
“그거야 도 닦는다고 문밖출입을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졌기 때문이었네. 그것도 철저히 패했지.”
“……예? 그게 무슨 말씀……?”
서문주경이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그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앉아 있던 간부들 대부분이 놀라서 입을 반쯤 벌렸다.
“나는 그와 이십 초를 겨루었다네. 그게 내 한계였지. 그자와 싸우면서 버틸 수 있는 한계. 강호에서는 무제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사실 그때 패했었네. 솔직히 이십 초를 버틴 것도 운이 좋았지.”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천하의 누가 무제를 이십 초식 만에 패배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서문주경이 버럭 소리치고 고개를 흔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천릉의 말을 믿지 않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몇 사람은 천외라는 말이 나온 순간부터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셋이었네. 나는 그 중 두 사람과 싸워봤지. 그리고 두 번 모두 패했네. 이십 초식을 넘기지 못하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지 않아도 사실인 것은 변함이 없네.”
“그럼…… 정말로……?”
이천릉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지금까지와 달리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노부가 사실 파천회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은 그들과 싸우기 위해서였네.”
그러고는 표정이 굳은 사람들을 무심한 눈으로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