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242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03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242화
귀룡문 무사들은 조금도 서둘지 않았다. 무기는 여전히 단혈방도를 향한 채였고, 밟고 있던 자의 등에서도 발을 떼지 않고 고개만 돌렸다.
단혈방 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
만대평은 귀룡문 무사 중 한 사람을 알아보고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강 당주,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오?”
사십대로 보이는 중년 무사가 왕규와 만대평을 향해 다가왔다. 귀룡문의 건곤당 당주인 강상기였다.
등에 장검을 멘 그는 턱이 뾰족하고 눈매가 날카롭게 뻗어서 언뜻 봐도 성격 자랑 좀 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몰라서 묻나? 설마 요 며칠 동안 돌고 있는 소문을 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
“장강팔련에 대한 소문 말이오?”
“잘 아는군. 그렇다면 그에 대한 대답도 준비를 했겠군.”
“우리 단혈방은 장강팔련과 아무런 상관도 없소이다. 강 당주도 잘 아시잖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요즘 들리는 소문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수상해.”
“뭐가 수상하다는 거요?”
“본 문의 귀성호가 침몰한 것은 들었을 거야. 그런데 귀성호가 출항하기 전, 단혈방 애들이 선원들에게 시비를 걸었다고 하더군.”
“그거야 주기로 한 비용을 안 줘서…….”
“언제부터 비용 때문에 본문을 무시하게 된 거지?”
“누가 무시를 했다는 거요? 한 달 동안 비용을 주지 않은 게 너무 많이 쌓여서 조금이라도 달라고 한 것뿐인데.”
“그게 결국 본문을 무시했다는 말 아니고 뭔가? 우리가 언제 돈을 떼어먹었나?”
“선창 사용료만 안 준 게 아니오. 본 방이 운영하는 대월루에서 먹은 술값과 방값도 보름치나 안 주었소이다.”
“흥, 그래봐야 얼마나 된다고.”
많다. 은자로 따져도 삼백 냥이 넘으니까.
만대평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꾹 참았다.
“어쨌든 그 돈 때문에 일어났던 일이니 장강팔련과는 관련짓지 마시구려..”
“그럼 다른 걸 묻지. 요즘 흑월회 밑으로 들어갔다던데, 혹시 그들이 장강팔련과 관계있는 것 아닌가?”
“흑월회는 장강팔련과 아무런 관계가 없소.”
“그걸 어떻게 믿지?”
그때 왕규가 나섰다.
“사실이오. 얼마 전 장강팔련 때문에 죽을 뻔한 적이 있었소. 그들과는 웬수라면 몰라도 친구가 될 사이는 아니오.”
“당신은 누군가?”
“나 말이오? 내가 바로 흑월회의 회주요. 그런데 날 아쇼?”
왕규가 툭툭 쏘아붙이며 눈을 부라렸다.
대머리에 햇빛이 반사되어서 그런지 눈빛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이자가 흑월회 회주?’
기선을 제압당한 강상기는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아무리 하찮은 흑도무리라지만 무창의 흑도를 평정한 자 아닌가.
게다가 귀룡문의 당주 앞에서 큰 소리 칠 정도라면 한가락 한다고 봐야 했다.
“몰라봐서 미안하오. 나는 귀룡문의 강상기요. 귀하가 흑월회의 신임 회주인 왕만이오?”
“맞소. 내가 왕만이오.”
왕규는 가명을 썼다. 천자와 만자 중 하나를 골랐는데, 기왕이면 꽉 찬 만의 숫자를 이름으로 썼다.
“정말 장강팔련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오?”
“말했잖소. 웬수면 웬수지, 친구는 아니라고.”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
강상기 뒤쪽에 묵묵히 서 있던 중노인이 한마디 하며 앞으로 나왔다.
희끗한 머리카락과 수염, 이마와 눈가에 굵은 주름이 그어진 그는 나이가 오십대 초중반쯤으로 보였다.
그가 걸을 때마다 허리에 찬 면이 넓은 칼이 달랑거렸다. 칼집의 끝에는 작은 쇠구슬이 달려 있었는데, 쇠구슬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철그럭거리는 소리와 걸음걸이가 어우러져서 상대에게 묘한 압박감을 주었다.
왕규는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강한 기운을 느끼고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그거야 어려울 것 없지요. 며칠 안으로 장강팔련의 개새끼들 머리를 몇 개 떼어다 주리다.”
거침없는 왕규의 말투에 중노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네가 머리를 떼어올 때까지 우리보고 기다리란 말이냐?”
“저 객잔에서 기다리시구려. 단혈방에서 운영하는 곳이니까, 돈은 절반만 받으라고 하겠소.”
중노인의 입술이 비틀리며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나와 농담놀이라도 하자는 거냐? 흑도의 애송이들 좀 제압했다고 제법 간덩이가 부었군.”
“나는 최대한 예의를 차렸다고 생각하오만. 안 그렇소, 한 대협?”
중노인, 한평도는 왕규를 노려보았다.
일도단산(一刀斷山). 그게 바로 귀룡문의 장로이자 현 귀룡문주 한경도의 동생인 한평도의 별호다.
그는 칼질도 단호하지만, 성격도 끊고 맺는 게 확실한 걸로 유명했다. 하지만 평소 남 앞에 얼굴을 잘 보이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용케 나를 알아보는군.”
“내가 사람을 좀 많이 알고 있어서 말이오.”
“그럼 내 성격도 알겠군.”
“귀가 따갑게 들었지요.”
“그래? 다행이군.”
말이 끝남과 동시, 앞으로 발을 내딛던 한평도가 허리의 칼을 잡아 뽑았다.
쉬아아악!
칼바람이 대기를 가르며 왕규를 양단할 듯이 밀려갔다.
왕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옆으로 미끄러지며 검을 뽑았다.
한평도의 도세가 왕규를 따라서 휘어졌다. 공격할 때부터 그쪽으로 피할 것을 염두에 둔 듯했다.
왕규도 당황하지 않고 검을 내질렀다.
쩌저저저정!
귀청을 찢는 격돌음이 찰나에 대여섯 번이나 울렸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한평도와 왕규는 여전히 이 장 거리를 둔 채 마주 서 있었다.
격돌에서 손해를 봤는지 왕규의 안색이 약간 창백했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은 듯 표정은 밝았다.
반면 한평도는 표정이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도와 검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도가 중병인 것을 생각하면 약간의 이익은 이익이라 할 수도 없었다.
“제법이구나. 무창의 흑도가 머리를 숙일 만해.”
“일도단산의 도가 강맹하다는 걸 말로만 들었는데, 직접 대해보니 정말 대단하구려.”
“그 말은 내 칼을 조금 더 받아본 후에 해라. 살아남은 후에.”
한평도가 늘어뜨리고 있던 도를 천천히 사선으로 들어올렸다. 바람도 약한데도 옷자락이 강풍 앞에 서 있는 것처럼 펄럭거렸다.
왕규는 긴장한 표정으로 공력을 구성까지 끌어올렸다.
대머리가 된 대가로 공력이 증가한 덕분에 비등한 대결을 벌였다. 그러나 아직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내 검도 만만치 않을 거요.”
“어디 진짜로 그런가 보자!”
냉랭히 한소리 내지른 한평도가 몸을 훌쩍 날리며 왕규를 공격했다.
쉬아아악! 츠츠츠츠.
섬전 같은 도세가 허공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며 섬뜩한 소리를 뱉어냈다.
“못 보여줄 것도 없지!”
버럭 소리친 왕규는 전력을 다해서 한평도의 공격을 막았다.
정면 격돌은 최대한 피했다. 강맹한 도세를 막겠다고 검으로 부딪쳐가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귀룡문 무사들은 의외로 강한 왕규의 무공에 표정이 굳어갔다.
반면 단혈방과 흑월회 무사들은 흥분해서 심장이 벌떡거렸다.
왕규가 강하다 해도 일도단산 한평도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막하의 접전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불끈 쥔 그들의 주먹에 핏줄이 돋았다.
흑월회를 앞세워서 단혈방과 혈수문은 물론 무창의 흑도세력을 단숨에 휘어잡은 후 왕규가 말했다.
“앞으로 나를 따른다면, 무창에서만큼은 누구도 흑도를 우습게보지 못하도록 만들겠다.”
말로야 무슨 소린들 못할까.
그런데 어쩌면 그의 말대로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쩌저정!
고막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한평도와 왕규가 이 장여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둘 다 안색이 창백했고, 옷자락이 대여섯 군데씩 찢어진 상태였다.
“이름도 없는 놈에게 이런 꼴을 당할 줄은 몰랐구나.”
한평도가 분노의 눈빛을 쏟아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왕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충격을 가라앉히느라 대꾸할 여유도 없었다.
‘제길, 뭐 하느라 이렇게 늦게 와?’
흑월회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자신의 임무였다. 마무리는 곽교진과 호양청이 하기로 했다.
그들이 늦으면 부상을 각오해야만 한다.
“어디 다시 한 번 받아봐라. 이번에도 버티면 그대를 인정해주지.”
한평도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왕규를 보며 말하고 칼을 불끈 움켜쥐었다.
왕규도 이를 악물고 검을 들었다.
‘씨바, 차라리 내가 뒤에 나선다고 할 걸.’
그때였다.
“오랜만에 보는군.”
곽교진이 기가 막히게 때를 맞춰서 무사 십여 명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한평도가 곽교진을 알아보고 눈을 홉떴다.
“곽 형?”
“악주(鄂州) 포구에서 헤어지고 칠 년 만인가?”
“곽 형이 여긴 어쩐 일이오?”
“신세진 것이 조금 있어서 잠시 흑월회에 머물고 있네.”
“궁천도 곽 형이 흑월회의 일원이 되었단 말이오?”
한평도는 정말로 놀랐다.
한쪽에서 거만한 자세로 바라보고 있던 강상기도 궁천도라는 별호가 나오자 경악한 표정이 역력했다.
‘궁천도 곽교진이 왜 흑월회에 있는 거지?’
그때 문득, 두어 달 전에 발생한 사건을 떠올린 강상기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궁천도 선배가 장강팔련과 함께 곽양삼절을 쫓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는 유난히 ‘장강팔련’이라는 호칭에 힘을 주었다.
곽교진도 그 뜻을 간파하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는 아들의 복수 때문에 눈이 멀어서 그들의 도움을 거절하지 못했을 뿐, 흑월회는 장강팔련과 아무 관련이 없다.”
“지금 상황에서 그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을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이 곽교진이 비록 가끔 실수를 하긴 해도 헛소리를 지껄이며 살아오진 않았다.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믿지 마라. 강요하진 않을 테니까.”
“믿기 싫으면 믿지 마라? 너무 이기적인 말씀이군요.”
강상기가 냉소를 지으며 말하자, 곽교진의 회색빛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대에게 믿어달라고 한 말이 아니다. 사실이 그렇다는 거지.”
한마디로 ‘너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
자존심이 상한 듯 강상기가 눈을 치켜떴다.
“흥, 우리 귀룡문이 우습게 보이시나 본데, 곽 선배야 어떨지 몰라도 저들만으로는 우리를 막을 수 없을 거요.”
“글쎄. 두고 보면 알겠지.”
“한 장로님, 장로님께서 궁천도를 맡아주십시오.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한평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곽교진과 왕만이라는 자가 강하긴 해도 귀룡문 무사가 오십 명이나 된다.
자신과 강상기가 두 사람을 상대하는 동안 단혈방과 흑월회 무리를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을 듯했다.
평소의 그였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흔쾌히 허락했을 것이다. 그런데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등덜미를 짓눌렀다.
한평도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강상기가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본 문에 검을 겨누는 자는 모두 제거해라!”
무기를 든 귀룡문 무사들이 앞으로 나아가며 단혈방과 흑월회 무사들을 압박했다.
만대평은 당황한 표정으로 왕규의 눈치를 살폈다.
왕규는 검을 비스듬히 늘어뜨린 채 냉소를 짓고 있었다.
‘그 인간이 말한 대로 움직이는군.’
“평도, 정말 피를 볼 생각인가?”
곽교진이 노기를 억누르며 다그쳤다.
한평도의 눈빛이 흔들렸다.
바로 그때 강상기가 소리쳤다.
“놈들을 쳐라!”
그러고는 왕규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건곤당 무사들도 일제히 공격에 나섰다.
한평도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지위는 그가 높을지 몰라도 건곤당에 대한 지휘권은 당주인 강상기에게 있었다.
오히려 그는 칼을 쥔 손에 공력을 운용하며 자세를 잡았다.
“죄송하게 되었소, 오랜만에 곽 형의 칼 구경이나 좀 하지요.”
“자넨 오늘의 일을 후회하게 될 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