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232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01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232화
무 노인은 장산을 씁쓸한 표정으로 쳐다보고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눈길을 돌렸다.
‘하아, 나인들 어찌 마음이 편하겠느냐?’
수십 년 동안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그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온 것만 해도 족히 열 번은 될 것이다.
그만 어려움이 있었던 게 아니다. 그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그를 안다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당해야 했다. 심지어 가족 삼대가 모두 몰살당한 경우도 있었다.
친구도 죽고, 자식처럼 여겼던 제자도 죽고, 자신의 손발이 되어주었던 수하들도 모두 죽었다.
하다못해 무창의 흑도인들도 그가 근처에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백 명 넘게 죽음을 당했지 않은가.
그에 비하면 장천운의 일은 그저 조금 안타까운 일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서 냉정하게 결정을 내릴 때만 해도 대의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가슴이야 아프겠지만 그 정도쯤은 견딜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에게는 장천운의 생사보다 천외에 숨어서 세상을 농락하는 자들을 무너뜨리는 일이 열 배는 더 중요했으니까.
그런데 막상 장천운의 죽음이 눈앞에 닥치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대의를 위해 살아온 수십 년 세월에 회의감이 들 지경이었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한 걸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텅 빈 가슴에 황량한 바람이 휘도는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일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장천운 때문에라도, 반드시 목적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오기와 절박함이 가슴에 단단하게 뭉쳤다.
손자나 다름없던 장천운의 희생을 헛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희생된 장천운에게 잘못을 비는 것은 나중에 저승에 가서 해도 될 일.
무 노인은 이를 악물고 감정의 격류를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광채가 없는 무심한 눈으로 장산을 보며 말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저들을 흔들 거다. 삐끗하면 십년공부 공염불이 될 것이니, 냉정하게 마음을 가라앉혀라.”
장산도 원망은 일단 가슴 저편에 접어두었다.
“알겠습니다, 노야.”
“먼저 사마경에게 선물을 보내라. 그리고 그들의 정체를 알려줘라.”
* * *
그날 저녁, 사마경은 서신과 물건 하나가 들어있는 봉투를 받았다. 누가 놓고 간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봉투를 열어본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었다. 봉투 속에서 작은 물건 하나를 꺼낸 그녀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버지…….”
사마중천을 마신총에 안치할 때 자신이 관에 넣었던 물건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물건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물건은 어머니가 남긴 옥가락지였으니까.
그녀는 아버지의 저승길이 외로울까 봐 어머니의 옥가락지를 넣어주었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손으로 돌아왔다.
서신과 물건을 보낸 자가 아버지의 시신을 빼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누굴까? 누가 아버지의 시신을 빼냈을까?
사마경은 떨리는 손끝을 겨우 진정시키고 마저 서신을 꺼냈다.
서신에는 짧은 몇 마디 경고문만 적혀 있었다.
[우리의 뒤를 쫓으려 하지 마라. 경고를 무시하면 네 아비를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대신 장천운을 죽인 자들이 누군지 알려주마. 그들은…….]
사마경은 서신을 다 읽고 고개를 들어서 허공을 노려보았다.
‘역시 천외였어.’
그들의 힘은 그 끝이 어딘지 알기가 힘들 정도였다.
알고도 공격할 수 없는 자들.
자칫하면 그들을 제거하기는커녕 구천성이 무너질 것을 걱정해야 하는 미증유의 거력을 지닌 자들.
그런데 파천회는 천외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들에 대한 것은 극비에 속한 내용인데.
파천회는 천외의 세력을 알면서도 왜 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을까?
파천회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파천회 무사들이 은천동 밖에서 천외의 고수들을 공격한 것은 뭐란 말인가.
‘만약 정말로 파천회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가 있고, 그자가 천외에 대해서 측근 외에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외부에 소문이 나지 않은 사실은 설명이 된다.
문제는 왜 알리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또한 그 배후의 정체가 더욱 의문일 수밖에 없다.
‘그자는 천외뿐만이 아니라 우리 구천성도 잘 알고 있어.’
그때 문득 든 생각.
사마경은 손에 들고 있던 옥가락지를 내려다보았다.
‘그자는 이 옥가락지가 어머니 것이었다는 걸 알고 보냈을까?’
전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옥가락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아는 사람들도 대부분 죽었다.
만약 알고 보낸 거라면, 옥가락지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 중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
그가 바로 파천회를 배후에서 움직이는 자라는 말이 된다.
‘당신은 누구지?’
92장: 날 용서하지 마라
다리가 수십 개나 달린 이름 모를 벌레 두 마리가 장천운의 코앞에서 들어갈 건지 말 건지 망설이고 있었다.
따뜻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동굴(?)은 제법 깊었다. 크기도 그들이 알을 낳고 보금자리로 삼기에 적당했다. 이 동물이 썩으면 한 동안 먹이 걱정을 할 필요도 없으니 일석이조였다.
걱정되는 것은 이 동물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이틀이나 기다렸는데 아직도 죽지 않다니. 빨리 좀 죽지 말이야.
벌레 중 수컷이 가느다란 발을 하나 들어서 콧속을 휘저어봤다.
별 반응이 없었다. 아마도 죽어가고 있는 듯했다.
-좋아, 한번 들어가 보자.
벌레가 결심을 굳힌 듯 콧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때였다.
주위가 느닷없이 밝아졌다. 흠칫한 벌레는 머리를 빼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횃불을 든 노인이 죽은 듯 쓰러져 있는 장천운 곁에 내려섰다.
깜짝 놀란 수컷벌레는 암컷벌레를 챙기지도 않고 혼자서 정신없이 도망쳤다. 하여간 수컷들이란…….
“여기 있었군. 이런 곳에 처박혀 있으니 못 찾지.”
노인은 횃불을 저어서 벌레를 쫓아내고는 장천운의 몸 상태를 살펴보았다.
틈바구니에 빠져서 십여 장이나 떨어지고, 급경사 삼십여 장을 구른 몸이다.
이곳에 떨어진 후 이틀 동안 이 상태 이대로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살아 있는 듯 희미한 숨결이 지독하리마치 끈질기게 이어져 있다. 참으로 질긴 목숨이다.
하지만 숨이 이어져 있는 것이 전부다. 기경팔맥이 뒤틀린 데다 내장도 충격을 받았고, 혈맥도 제멋대로다.
게다가 외상마저 심해서 살아난다 해도 일상생활을 하기가 힘들 듯하다. 그나마 팔다리 부러진 곳이 없는 게 다행이라고나 할까?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쯔쯔쯔,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망가졌군.”
칼칼한 목소리로 혀를 찬 노인은 장천운의 품속을 뒤졌다.
제법 많은 돈이 든 주머니와 대나무 통 하나, 작은 함이 나왔다.
“헐, 이게 웬 떡이람?”
돈주머니를 열어본 노인이 이를 드러내며 실소를 지었다. 해골처럼 바짝 마른 얼굴에 이까지 드러내자 진짜 해골과 별 차이가 없었다.
노인은 대나무통과 작은 함도 열어보았다.
대나무통 속에서는 제법 약다운 냄새가 났다. 그런데 작은 함에서 나는 냄새는 머리가 띵할 정도로 독했다.
“크으, 지독한 냄새군. 완전히 썩은 약 같은데, 왜 이런 걸 갖고 다녀?”
인상이 구겨진 노인은 함을 다시 닫으려다가 멈칫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대나무통 속의 단환 하나와 함 속에 든 단환을 꺼내더니 장천운의 입에 밀어 넣었다.
“어차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게 생겼는데, 약이 좀 썩었으면 어때?”
품속에 넣고 다닐 정도면 아주 엉터리 약은 아니겠지.
팍 썩었어도 약효는 있을지 모르잖아?
살릴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썩은 쥐똥도 먹일 텐데 뭐.
그런 마음이었다.
게다가 대나무통 속의 약도 함께 먹였으니 둘 중 하나는 효과를 볼지도 몰랐다.
“이놈아, 저승에 가더라도 나를 원망하진 마라.”
단약을 억지로 복용시킨 노인은 자신의 진기를 사용해서 단약이 뱃속까지 들어가게 했다.
그러고는 장천운을 어깨에 메고 일어났다.
“염라대왕이 데려갈 거면 진즉 데려갔을 텐데, 지금까지 살아있는 걸 보면 네놈도 아직 죽을 팔자는 아닌가 보다. 흘흘흘.”
그러잖아도 해골처럼 생긴 노인이 이 빠진 웃음을 흘리자 기괴한 표정이 되었다.
오른손으로 횃불을 든 노인은 왼손으로 장천운이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고 바닥을 찼다.
순간, 장천운을 어깨에 멘 노인이 거짓말처럼 오 장 높이의 경사면 위로 훌쩍 날아서 올라갔다.
그 후로도 노인은 급경사를 평지 걷듯 걸어서 틈바구니를 빠져나갔다.
* * *
정원에 형형색색의 온갖 꽃이 가득하다.
하지만 마음이 심란한 여인은 아름다운 꽃의 향연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아아아아. 일이 이상하게 되었어.”
한숨을 길게 내쉰 여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 있었군.”
뒤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여인은 다가오는 초로인을 보고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알아보셨어요?”
초로인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직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정말로 죽었을까요?”
여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공격으로 죽지 않았다 해도…… 곧 죽겠지. 해독단을 복용하지 못할 테니까.”
여인, 모용예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너무했던 걸까요?”
“자책할 것 없다. 너로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쨌든 계획이 조금 어긋나긴 했어도, 예정대로 우리 쪽 사람들이 구천성에 들어갔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자.”
“예, 그래야겠죠.”
나직이 대답한 모용예의 눈빛이 흔들렸다.
고완은 모른다. 자신이 자책하는 이유가 꼭 일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저, 제가 직접 구천성에 들어가 볼까 해요.”
“네가 직접?”
흠칫한 고완의 표정이 굳어졌다.
모용예는 못 본 척하고 자신의 생각만 말했다.
“남들은 목숨을 걸고 뛰는데 저만 안전한 곳에 있는 것도 좀 그러잖아요.”
“그래도 너무 위험해.”
“어차피 이 일에 끼어든 순간부터 외줄에 올라선 상황이에요.”
“으음, 네 마음이 정 그렇다면 할 수 없다만…… 어쨌든 구천성에 들어가면 조심해야 한다.”
“너무 걱정 마세요. 최대한 조심할 테니까요.”
모용예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하지만 긴장감과 기대감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잘하면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녀의 마음은 이미 장원을 떠나 구천성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 * *
동마보 별원을 순찰하던 백리우진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사마경의 방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갔지?’
며칠 째 장천운이 보이지 않았다.
하루 이틀이라면 ‘비밀작전을 수행 중인가보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흘째다. 이 중요한 시기에 사흘이나 자리를 비우다니.
더구나 사마경의 표정도 사흘 전부터 한겨울 북풍한설보다 더 차가워져 있었다. 말을 붙이기가 힘들 정도.
혹시 비밀작전에 나갔다가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가령 제 실력만 믿고 날뛰다가 뒈졌다든가 말이다.
‘그럼 더 이상 바랄 게 없는데…….’
그는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서 몇 사람에게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개중에는 흑월대 대원도 있었다.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조금 안다는 자들도 그저 소성주의 명을 받고 작정 수행 중이라는 말만 반복할 뿐.
귀신 낯짝 같은 막소광은 ‘술병 났나 보지 뭐.’라고 엉뚱한 소리나 해댔다.
대주가 사흘 동안 안 보이는데도 두양양과 연송하를 제외하고는 걱정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미친놈들. 장천운이 죽지 않는 불사신이라도 되나?
‘좌우간 나에게는 기회라 할 수 있다. 그 자식이 없을 때 최대한 점수를 따야 해.’
사마경에게만 점수를 따려는 게 아니었다. 잘 보여야 할 사람이 하나 더 있다.
‘대령주도 이곳의 상황을 알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거다.’
안휘에 가 있는 공손백에게도 이곳의 상황이 속속 전해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경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일은 모를 가능성이 컸다.
공손백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때 전해준다면 자신의 가치는 올라갈 수밖에.
‘일단 숙부의 자리부터 차지해야 해. 그리고 그 후에…….’
백리우진의 눈에서 욕망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그때 누군가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순찰 중이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