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2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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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93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228화
장천운은 우문각의 비밀무사인 묵조와 함께 소수로 적의 수뇌부를 제거하러 간다고 했다. 자신도 조금 전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아마 사마경의 납덩이같은 얼굴표정만 아니었다면 지금도 그렇게 알고 그러려니 했을 것이었다. 하다못해 출발하는 장천운이 사마경을 만난 후 사소한 지시만 받았어도 별 의문을 품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장천운은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고 떠났다. 사마경도 어두침침한 방안에서 떠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자신이 아는 한 정상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모르는 일이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말해줄 것이었다면 물어보기 전에 했겠지.
‘분명 내가 모르는 일이 있어.’
사마경은 목상처럼 앉아서 어둠 속 허공을 쳐다보았다.
장천운이 묵조원 넷과 함께 동마보를 떠났다. 겉으로 드러난 목적은 무림맹 수뇌부 암살이었다. 묵조를 내준 우문각도, 구양명도, 심지어 소연추조차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무림맹 수뇌부 암살보다 훨씬 더 위험한 길을 가게 될 것이었다.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십중팔구인 죽음의 길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절대! 나로 하여금 천운을 사지로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자들은 그게 누구든! 모조리 죽여 버릴 거야! 천 명이든, 만 명이든!’
그녀는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극에 달한 분노를 자양분으로 그녀의 가슴에서 살기로 뭉친 마화가 피어났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떠난 장천운도, 그 일을 주도한 무노인도. 그녀의 가슴에 피어난 마화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 * *
달마저 구름 속으로 숨은 밤.
장천운은 네 명과 함께 동마보를 나서서 북으로 향했다.
동행하는 네 명은 나이가 다양했다. 제일 젊은 자는 이십대 후반이었고, 나이가 제일 많은 자는 사십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묵조. 어둠 속에서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우문각의 그림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묵일, 묵삼, 묵사, 묵칠. 그게 그들의 이름이었다. 촌스럽게.
우문각은 그들의 본명을 말해주지 않았고, 자세한 소개도 하지 않았다.
장천운도 묻지 않았다. 알려주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묻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문각을 서운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도 몇 가지는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뀐 명령에 대한 것이었다. 사마경도 말하지 않는데 자신이 먼저 말해줄 이유는 없었다.
백 리 밤길을 쉬지 않고 달렸다. 어느 덧 축시를 넘어서 인시도 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먹물처럼 검은 대지 저 끝에 삐죽삐죽 솟은 검은 그림자가 보일 즈음, 장천운은 걸음을 늦추었다.
마침 근처에 개울이 있어서 잠시 쉬어가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여기서 일 각 정도 쉬었다가 출발합시다.”
장천운은 개울로 가서 두 손으로 물을 떠 마셨다.
시원한 냇물에 목구멍 가득하던 답답함이 씻겨 내려갔다.
“이보게, 장 대주.”
장천운의 뒤로 한 사람이 다가가며 불렀다. 덩치가 큰 삼십대 무사. 그는 묵삼이라고 했다.
“왜 그러십니까?”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가? 방향이 틀어진 것 같은데?”
“우린 이창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뭐?”
장천운의 말이 의외였는지 다른 묵씨 삼형제도 그에게 다가왔다.
“무림맹 수뇌부를 암살하는 게 임무라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그들을 죽이려면 이창으로 가야하지 않은가?”
장천운은 손의 물기를 털고 일어났다.
“임무가 바뀌었습니다.”
이번에는 사십대 중반의 묵씨가 말했다. 그가 바로 촌스러운 묵씨의 첫째, 묵일이었다.
“우린 총사에게 임무가 바뀌었단 말을 듣지 못했네.”
“임무는 총사가 아니라 소성주께서 내리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지휘자는 이 장천운이고요.”
묵일의 굵은 눈썹이 어둠 속에서 꿈틀거렸다. 기분이 상한 듯했다.
장천운은 그의 기분에 대해서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저에게 지휘 받는 것이 싫다면 돌아가십시오.”
“우리도 자네가 지휘할 거라는 말을 들었네. 그래서 조건을 걸었지.”
조건?
장천운은 그들이 내건 조건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총사는 그 다음 상황이 어떻게 흐를 것인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무슨 조건입니까?”
“그야 간단하네. 우리를 이기면 당연히 지휘할 자격이 있다고 봐야겠지.”
묵일이 말하며 자신의 검을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장천운은 그들의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군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기다렸다는 듯 묵씨 중 서른이 되었을까 싶은 자가 나섰다. 그는 키가 컸는데, 큰 키만큼이나 검도 길었다. 그가 묵칠이었다.
“제가 먼저 해보겠습니다.”
장천운이 그를 빤히 보며 말했다.
“혼자 말이오?”
“무슨 뜻인가?”
“스스로의 실력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거 아니오?”
“……?”
“하기야 한 사람씩 덤빈다면 나야 편하지요.”
장천운은 담담히 말하고는 자세를 잡았다.
묵씨들은 그때만 해도 단지 기분이 상했을 뿐, 잠시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자, 시작해볼까요?”
대결이 벌어진 시간은 일 각에 불과했다.
공방이 벌어진 초수도 네 사람을 다 합해서 이십여 초밖에 안 되었다.
그 짧은 시간, 묵씨들의 인생이 바뀌었다.
“그만 갑시다.”
장천운이 한마디 던지고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졸졸 따라가는 네 사람은 일각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귀신에 홀린 듯 반쯤 넋이 빠진 표정. 복장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듯 엉망이었다. 단 일각 만에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운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정신도 없었다.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은신술이 있다니.
그들이 상대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유령이었다. 절대경지에 오르지 못한 그들로서는 기운의 흐름도 알아낼 수 없었다.
상대가 보이지도 않고 기척의 흐름도 알 수 없으니 짐작되는 곳을 향해서 공격하는 수밖에.
결국 힘은 힘대로 빠졌고, 상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장천운은 이번 대결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환신술이 전보다 좀 더 완벽해졌어. 덕분에 죽음에서 살아 돌아올 확률이 일 푼쯤 늘어났군.’
나름 만족한 그는 저 멀리 어둠의 대지 끝에 솟아 있는 산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불길한 어둠으로 물들어 있는 저 산이 바로 자신의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곳이었다.
* * *
이창에서 서쪽으로 사십 리.
대별산맥 북단에 위치한 침석산은 거산준봉에 비하면 높은 산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산이 온통 삐죽삐죽 솟은 바위로 되어 있어서 약초꾼들도 들어가기를 꺼렸다.
천고의 기인으로 알려진 무우자가 만들었다는 은천궁(隱天宮)은 바로 그 침석산 동쪽의 계곡 안쪽, 절벽 아래에서 삼백 년 세월을 버티고 서 있었다.
은천궁 뒤쪽에는 커다란 동굴이 존재했는데, 어떻게 보면 동굴을 보호하기 위해서 은천궁을 만든 듯했다.
그리고 사실이 그랬다. 무우자를 추앙하던 사람들은 그가 마지막 십 년 동안 참선했던 은천동을 성지처럼 여겼다.
그들은 성지가 남의 발길에 훼손되는 걸 막기 위해서 은천동 입구 앞에 건물을 세웠다. 그것이 바로 역사 깊은 은천궁의 시작이었다.
그러다 구십여 년 전, 도인은 물론 은천궁의 식객과 손님들이 원인 모를 역병에 걸려 죽으면서 폐허가 되었다.
사람들은 은천궁이 하늘의 뜻을 어겨서 저주받았다며 근처에 가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심지어 불을 질러서 태워 없어야한다는 주장마저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십여 년 전, 상인으로 알려진 누군가가 폐허가 된 은천궁을 사들여서 보수작업을 했다. 그 후 관리하는 사람 몇 명이 은천궁에서 기거했다.
이창 인근의 사람 모두 그렇게 알았다.
봄기운이 만발한 사월 말, 저주받았다는 은천궁에 손님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소리 없이 은천궁 중앙 건물 지붕에 내려선 장천운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은천궁 내의 건물은 모두 다섯 채였다. 모두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풍스런 건물이었다.
원시천존을 모시는 은천관 좌우에 도인들의 수행법전이 있고, 왼쪽 담장 앞에는 외인들을 위한 객사가 있었다.
마당에는 화톳불이 피워져 있었는데, 경비로 보이는 자 둘이 낄낄거리며 농담 따먹기에 열중이었다.
장천운은 은천관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긴가?’
커다란 동굴이 지옥의 입구처럼 아가리를 벌린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구 위에는 용사비등한 글씨체로 ‘은천동’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고, 은천동 안쪽에선 붉은 기가 도는 은은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안쪽 어딘가에 화톳불이나 횃불이 있는 듯했다.
장천운은 잠시 동안 동굴 안쪽의 기척을 살펴보았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가보다.
설령 있다 해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사람이 있더라도 들어가야 하니까.
그는 망설이지 않고 은천동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묵씨들도 목줄에 매인 강아지처럼 그를 따라서 동굴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은천동 입구 근처의 동굴 벽에는 원시천존을 비롯한 도교의 신들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원시천존 조각은 높이가 일곱 자쯤 되었다. 온화한 표정은 세상 모든 것을 품안에 안은 사람 같았다.
도교의 교조이자, 그 유명한 도덕경을 지은 이이(李耳), 노자(老子)였다.
노자의 옆에는 또 다른 노인이 서 있었다.
장천운은 그 노인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그 노인이 바로 무우자(无愚子)였다.
하얀 수염이 가슴에 늘어진 무우자는 노인답지 않게 균형이 잡힌 몸매였다. 짚고 있는 지팡이는 땅을 짚고 있는 것인지, 허공을 짚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지팡이를 짚고 있는 것일 뿐인데도 기이할 정도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뒤에 서 있던 묵씨들은 남의 집에 들어와서 태연히 그림이나 감상하는 장천운에게 불만이 많았다.
저런 조각 처음 보나? 애송이는 애송이군. 들키면 어쩌려고 저리 태연한 거야?
그러나 인상을 구기는 것 이상 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못했다.
“이제부터 귀하들은 무조건 제 말을 따라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승부에서 패한 그들에게 장천운은 제일 먼저 누가 지휘자인지를 상기시켰다. 괜한 질문을 해서 구차한 꼴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장천운은 현기어린 벽의 조각을 보고도 불만이나 드러내는 그들을 보고 냉소를 지었다.
‘저 노인의 초상이 지닌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한 눈앞에 닥친 벽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을 걸?’
장천운은 묵씨들이 눈에 힘을 주고 얼굴 근육을 씰룩일 때, 몸을 돌려서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금빛을 뿜어내며 타고 있는 횃불이 십여 장 간격으로 벽에 꽂혀 있었다.
장천운은 세 번째 횃불이 나왔을 때 걸음을 늦추었다. 바로 그 세 번째 횃불 옆에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잠시 계단 아래를 내려다본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은 자연동굴의 경사면을 손질해서 계단처럼 만든 것이었다. 내려가는 길이 굴곡져서 아래쪽이 보이지는 않았다.
장천운은 아래쪽의 기척을 세심하게 살피며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칠십여 개쯤 내려가자 광장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곳이 나왔다.
높이는 대략 사오 장 정도, 높은 곳은 칠팔 장쯤 될 듯했다. 폭은 넓은 곳이 십사오 장이나 되었고, 길이는 삼십 장쯤 될 듯했다. 드넓은 동굴광장 사방에는 횃불이 열두 개나 꽂혀 있었다.
은천동 안에 이토록 넓은 동굴광장이 있을 줄이야.
장천운은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불길함이 온 몸으로 엄습했다.
여긴가? 자신이 죽어야할 곳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