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2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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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93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263화
“소성주…….”
“구천성의 성주 자리를 원한다면 넘겨줄 수도 있어요. 그 정도면 조건으로써 나쁘지 않잖아요?”
쿵!
하늘 위의 달이 머리 위로 떨어진 듯했다.
충격적인 말에 몸이 굳은 우문각은 눈을 부릅떴다.
오죽했으면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단, 제가 바라는 일을 마무리 지은 다음의 일이지만요.”
“으으음.”
끝내 우문각의 입에서 나직한 침음이 흘러나왔다.
“제가 바라는 일이 뭔지, 현명한 숙부라면 모르지 않을 거예요.”
“선대 성주님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것 아니오?”
“맞아요. 어차피 그 일을 처리하다 보면 성의 일도 마무리 되지 않겠어요?”
우문각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소성주, 내 전에 소성주께서 선대 성주님과 닮았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시오?”
“그러셨죠. 저야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요.”
우문각은 쓴웃음을 지은 채로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아니오, 소성주는 정말 선대 성주님을 빼닮았소.”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선대 성주님도 본인이 결정한 사항에 대해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밀어붙이셨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바로 지금의 소성주처럼. 하긴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천궁마신은 강호에 나타나지 못했을 거요.”
“그런가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제가 누굴 닮았냐가 아니라 숙부의 대답이에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우문각은 사마경의 두 눈을 직시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전보다 더 편해진 듯했다. 대답도 쉽게 나왔다.
“뒤에 누가 있든 이 우문각은 구천성 비령각의 각주요. 소성주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따를 거요. 그 어떤 명령보다 우선해서 말이오.”
비록 돌려서 말하긴 했지만, 배후에 누군가가 있기는 있다는 말이었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라도 사마경의 말에 따르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마경도 그 말뜻을 바로 알아듣고 답을 재촉했다.
“정말 그럴 마음이라면 처음의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주세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문각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사마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기이한 안광이 흘러나오던 눈동자도 그때만큼은 고요했다.
천장이 억만근 바위에 짓눌려서 천천히 내려오는 듯했다.
사마경이 소리 없이 숨을 다섯 번쯤 세었을 때, 우문각의 입에서 착잡함이 배인 목소리가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소성주, 나도 알려주고 싶소. 하지만 내가 입을 열면 그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거요. 소성주를 제거하든가, 아니면 제압해서 꼭두각시로 만들던가.”
사마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우문각의 다음 말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전대 성주께 사실을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오.”
“…….”
사실일까? 정말 그래서 숨겼던 것일까?
자신의 욕망 때문이 아니고?
사마경이 혼란한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데 우문각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되면 결국, 소성주는 원하는 일을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오. 전대 성주의 시신을 찾는 일도, 구천성을 바로잡는 일도.”
“…….”
“그래도 원한다면…… 말씀드리겠소.”
* * *
구름이 잔뜩 낀 아침.
팽팽한 긴장감으로 숨조차 쉬기 힘든 남궁세가에 한 통의 서찰이 전해졌다.
서찰의 주인은 공손백, 수신자는 남궁력이었다.
“이 내용이 사실일 거라 보시오?”
남궁력은 서신에서 고개를 들고 앞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백정천과 사공관을 비롯한 정파연합의 수뇌부 여덟 명이 침중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서찰의 내용은 짤막했다.
[남궁력과 백정천, 사공관에게 고한다!
십 년 간 구천성에 대항하지 않고 영천 서쪽을 침범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 공격을 멈추고 육안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대항하겠다면, 오늘 남궁세가를 쓸어버리고 남천신문과 황산검문까지 멸문 시킬 것이다! 미시까지 결정을 내려라!]
“놈도 사마경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외다.”
사공관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현재로서는 그 외의 이유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우리가 거부했을 때요.”
남궁력이 핵심을 짚었다.
모두가 입을 다문 채 굳은 표정으로 서신을 노려보았다.
참으로 비참한 일이었다.
거부하자니 멸문을 각오해야 하고, 받아들이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구천성이, 공손백이 그리도 강할 줄은 몰랐네. 참으로 한탄스럽군.”
백정천이 신음을 흘리듯 말했다.
모두가 공감하다 못해 처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십 년을 준비했다. 이 정도면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더구나 무림맹 본진이 움직이면 저들의 주력이 그곳으로 빠져나갈 터, 자신들이 패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 해야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인지, 그것만 고민했을 뿐.
그러한 자만심의 결과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떠들며 다정하게 이야기 나누었던 형제들, 제자들, 동료들을 천 명 넘게 잃었다.
그러고도 밀려서 남궁세가에 웅크린 채 배수진을 치고 있다.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탈할 지경.
“가주께서 결정을 내리시게.”
남궁세가의 원로인 남궁하가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구천성에 대한 복수의 기치를 높이 들고 건곤일척의 결전을 벌이고 싶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아마 아무리 피해가 커도 승산만 높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길 수만 있다면!
하지만 승리의 확률은 삼 할도 되지 않았다. 패하면 수백 년 가업이 송두리째 구천성에 넘어갈 것이다.
그거야말로 공포였다.
살아 있으면 십 년, 이십 년 후에라도 복수를 할 수 있거늘.
남궁력은 입술을 깨물고 백정천과 사공관을 바라보았다.
백정천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을 기다려도 늦지 않다고 했네. 까짓 거, 못 기다릴 것도 없지.”
사공관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남궁 형의 결정에 맡기겠소. 대신, 이후로 그들도 십 년 동안 영천의 동쪽을 욕심내지 않겠다고 약조하라 하시구려.”
남궁력의 핏발 선 눈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좋은 말씀이오. 공손백도 더 이상의 피해는 원치 않을 거요. 그렇다면 그 조건 역시 마다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오.”
영천은 합비와 육안의 중간지점이라 할 수 있다
구천성의 권역이 오십 리 정도 동쪽으로 늘어나고, 그 외에는 전쟁 전 상태로 돌아가서 구천성을 향해 검을 들지 않겠다는 서약이 더해지는 정도다.
굴욕적이긴 해도 무작정 굽히지 않았다는 명분은 세울 수 있다.
백정천과 남궁세가의 원로들, 남천신문의 두 장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로선 그 이상의 방안이 없었다.
결국 남궁력이 결론을 내렸다.
“알겠소이다. 그럼 그렇게 답을 보내도록 하겠소.”
그때 문득, 공손백이 이를 갈며 하던 말이 떠올랐다.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었지. 사마중천은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결국 네놈들은 다른 사람의 손바닥 위에 앉은 파리 목숨에 불과했느니라.”
이를 악문 남궁력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가 한 이야기, 사실일까?’
자신이 말한들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공손백의 성정과 당시의 일을 떠올려보면 그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할 수만도 없었다.
‘혹시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도 그 때문에……?’
선친인 남궁낙이 죽기 전에 그를 불러서 말했다.
세상의 저 뒤편에는 아무도 모르는 힘이 있다고.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고.
“명심해라. 만약 그들이 나타나면 세가의 문을 걸어 잠그고 그들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라.”
그들이 누군지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두렵다며. 언젠가는 알게 될 거라며.
그날 이후 그는 그 일을 잊었다. 선친께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다 보니 잠시 헛소리를 한 것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면 헛소리가 아니었던 것일지 모른다.
‘한번 자세히 알아봐야겠군.’
* * *
유진생은 오시(오전11시~오후1시) 초에 명령서를 받고 강련곡을 나왔다.
율검당에 도착하자 전무궁이 패를 하나 내밀었다.
“이제부터 자네는 율검당 제 오대의 대주네. 수하는 모두 삼조 삼십 명을 둘 수 있네.”
그 후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방이 배정되고, 대원들에 대한 임명 권한도 유진생에게 주어졌다.
강극효의 수족들이 대부분 제거된 터라 전무궁의 결정에 반대하는 중간간부는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일대는 소성주의 출정을 따라갔고, 이대는 대령주를 따라갔다. 사건사고는 어디든 있으니까.
남아 있는 대는 삼대와 사대, 그리고 당주의 친위대 뿐.
그들 역시 불만이 없었다.
대가 하나 더 생긴다면 자신들의 일이 줄어들 테니까.
게다가 유진생 같은 고수가 합류한다면 위험부담까지 나누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유진생은 일단 경험이 많은 무사들로 일개 조를 편성했다.
나머지 이개 조는 편성을 미루었다.
율검당은 머릿수만 채운다고 해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일조 조장은 강도청. 당주 직속 친위대 조장으로 전도유망한 이십대 후반의 청년무사였다.
그는 십 년 전에 강련곡의 수련생이었다.
당시에도 유진생이 교관이었는데, 그에게 ‘유 마두’라는 별명을 붙인 장본인이 바로 강도청이었다.
비록 들키는 바람에 제대로 찍혀서 남보다 배는 더 고생했지만.
유진생이 일조장으로 그를 뽑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자신 앞에 서면 고양이 앞의 쥐가 될 수밖에 없는 자. 한마디로, 부려먹기 딱 좋은 사람이 바로 강도청이었다.
“도청.”
“옙! 교관…… 아니 대주님!”
빳빳한 자세로 서 있던 강도청이 힘차게 대답했다.
십년이 지나도 그때의 ‘정신적 외상’은 어디로 도망가지 않은 듯했다.
“객당의 신입무사 대기처에 가면 어제 들어온 비공이란 자가 있을 거다. 가서 데려와. 일행이 있으면 함께 데려오고. 만약 심사받으러 갔으면 천경전으로 가봐.”
“옙!”
“그리고…… 옛날 일은 잊어라. 내가 뭐 너를 미워해서 그랬겠냐?”
강도청은 갑자기 눈자위가 찡해졌다.
지난 십년 동안 꿈속에서 유마두의 얼굴이 백 번도 넘게 나타났을 것이다. 그때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벌떡 일어나서 이를 갈았다.
매일 주먹을 움켜쥐고 다짐도 했다.
-실력을 키워서 언젠가는 반드시 복수를 하고 말겠다!
그런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자 반가운 생각부터 드는 건 또 뭐란 말인가.
그래도 이를 악물고 참았다.
쪽팔리게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동기들이 안다면 놀림거리가 될 테니까.
유진생의 눈에는 그 모습이 꼭 반항기 가득한 아이처럼 보였다.
‘자식, 십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속에 맺힌 것이 안 풀어졌나? 남자새끼가 쪼잔하게…….’
어쨌든 자신이 괴롭힌 것은 사실이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만 가봐.”
“옙.”
강도청은 절도 있게 포권을 취하고 방을 나갔다. 방문이 닫힐 때까지 바라보던 유진생은 이마를 찌푸렸다.
‘사사건건 반항하면 아무 것도 못하는데…….’
할 수 없다.
당분간은 옛날의 유마두로 돌아가는 수밖에.
* * *
미시(오후 1시~3시) 말, 무사 셋이 굳은 표정으로 객당에 들어섰다.
남색 무복에 남색 무사건. 율검당 무사들이었다.
그 중 서른쯤으로 보이는 무사는 소맷자락에 검은 줄이 두 줄 그어져 있었다.
조장이라는 뜻.
탄탄한 체격의 그가 객당을 쓱 둘러보고 말했다.
“누가 비공이냐?”
“나요.”
장천운이 담담히 말하며 나섰다.
“같이 온 사람들은 없나?”
“있소. 어이, 단승, 강태, 산교.”
장천운이 부르자 단승과 강태, 산교가 앞으로 나왔다.
강도청은 그들을 슬쩍 둘러보고 고갯짓을 했다.
“따라와라.”
장천운이 강도청을 따라서 율검당으로 들어가자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았다.
새로 생긴 오대의 대주가 강련곡의 악명 높은 ‘유 마두’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자식들, 재수 없게 걸렸군.’
대부분 그런 표정이었다.
사람들이 안쓰러워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동안 장천운 일행은 강도청을 따라서 유진생의 방으로 들어갔다.
“대주, 말씀하신 애들을 데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