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27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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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99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278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름도 있겠군.”
이번에는 장천운이 미소를 지었다.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비공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어린놈이 배짱도 좋구나. 노부에 대해 잘 알면서 이곳을 찾아오다니. 죽음이 두렵지 않더냐?”
“이미 한 번 죽은 사람인데 다시 죽는다 한들 두려울 게 뭐 있겠습니까?”
“허허허허, 때로는 죽어본 사람이 더 죽는 걸 두려워하니라.”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는 게 더 이익이라는 걸 현명하신 신군께서 모를 리 없으실 텐데, 왜 제가 두려워하겠습니까.”
“살려두는 게 더 이익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익인지 날 납득시켜보아라.”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얼마 전에 청산자 어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흐으음. 그래?”
콧소리를 내는 금룡신군의 두 눈에서 금빛 광채가 순간적으로 번쩍였다.
“저에게 당신의 사람이 되라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싫다고 했지요.”
금룡신군의 입술이 미미하게 틀어졌다.
“호오, 그렇게 말했는데도 그 친구가 그냥 보내주더냐?”
“도를 닦으셔서 성격이 좋으실 줄 알았는데, 도와 성격은 상관이 없나 봅니다. 당신이 갖지 못하면 남도 줄 수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곧바로 손을 쓰시더군요. 하마터면 붙잡힐 뻔했는데, 운이 좋아서 도망칠 수 있었지요.”
“허허허허허.”
금룡신군은 정말로 기분이 좋은 듯 눈가에 주름까지 만들어가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아마 손우곤이 있어서 그 모습을 봤다면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을 것이다.
“맞다. 도와 성격은 상관이 없지. 어떻게 보면 노부보다도 더 욕심도 많고 성격이 모난 늙은이야.”
기분 좋게 웃고 난 그는 청산자를 욕심 많고 모난 성격의 치졸한 늙은이로 만들어버리고는 한마디 추가했다.
“잘했다. 아마 그 친구의 사람이 되었다면 고생 좀 했을 게다.”
“저도 그럴 것 같아서 거부했지요.”
“그런데 그 일과 노부에게 이익이 되는 것과 어떤 상관이 있느냐?”
“당연히 상관이 있지요. 그분이 밖으로 나왔다는 건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그러겠지.”
“저를 없애기 위해서 힘을 소모하는 것과 놔두고 써먹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이득이겠습니까?”
금룡신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네 말이 맞다. 아무래도 놔두고 써먹는 게 이득이겠구나.”
“그럼 일단 뒤와 옆에 있는 사람들을 물려주시지요.”
금룡신군의 눈가에 짙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를 지키는 십삼사 중 열과 금룡호법 넷이 금선전을 은밀하게 호위하고 있었다.
그들의 존재를 눈치 챈 것만 해도 장천운의 능력이 자신의 예상보다 더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하긴 청산자의 손에서 멀쩡하게 벗어난 놈 아닌가.
“너무 걱정 마라. 저 아이들은 내 명령이 없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으니까.”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 모르는데, 진정 저들이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금룡신군은 대답을 미루고 장천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일순간,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이 진공 상태가 된 것만 같았다.
장천운은 급히 구륜심법을 운용했다.
잠깐 마주쳤을 뿐인데도 눈알이 타는 듯했다. 몸의 모든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혈맥의 곳곳이 막혀서 몸이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도 아니고, 일반적인 내공의 기운과도 달랐다.
그나마 곧바로 공력을 운용해서 잠깐의 충격으로 그쳤지, 조금만 늦었어도 상당한 타격을 입을 뻔했다.
청산자가 보여준 경천의 기세에 결코 뒤지지 않는 가공할 미지의 능력!
천외삼성의 무서움을 다시 한 번 몸으로 깨달은 장천운은 주먹을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들을 넘어설 수 있단 말인가.’
놀란 것은 금룡신군도 장천운 못지않았다.
그는 청산자가 왜 장천운을 놓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새파란 놈이 태천금룡신기를 정면에서 받아내고도 꼿꼿이 서있다니.
“모두 물러가 있어라.”
십삼사와 금룡호법들은 그의 말에 의문을 달지 않고 방에서 멀어졌다.
무형의 압박이 해소된 것을 느낀 장천운이 다시 포권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신군.”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금룡신군이 옆집 할아버지처럼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이 늙은이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닐 것이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느냐?”
“전에 서신으로 제안했던 부분에 대해서 확실하게 매듭을 지으려고 왔습니다.”
“매듭이라…… 어디 말해봐라.”
“아마 신군께서는 구천성의 대령주인 공손백에 대해서 저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래, 알지.”
“그렇다면 그의 마음이 변했다는 것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변했다?”
“그는 이제 완벽함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전보다 더 무서워졌지요.”
장천운의 말에 금룡신군이 조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공손백이 들으면 뒤통수가 폭발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사람들 눈에는 그가 대단해 보일지 몰라도, 노부의 눈에는 치기어린 아이로 보일 뿐이니라.”
“공손백만 보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공손백과 그의 뒤에 있는 사람을 더해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금룡신군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얼굴 가득 떠올랐던 조소도 사라졌다.
공손백의 뒤에 누가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였다.
그 둘의 이상과 마음이 합쳐졌을 때의 위험함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럴 가능성이 적어서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 뿐.
둘은 성격도, 추구하는 바도, 행하는 방법도 달랐으니까.
금룡신군은 차갑게 가라앉은 금안으로 장천운을 응시했다.
“어디 네 생각을 자세히 이야기해보아라.”
한편, 방 밖에 있던 단승과 사공명신은 솜털이 올올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열린 방문을 통해서 건너편 노인을 본 순간 숨이 턱 막히고, 온몸이 오그라드는 듯했다.
아마 장천운이 노인의 모습을 가리고, 문이 바로 닫히지 않았다면 내상을 입었을지도 몰랐다.
세상에 어찌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말인가!
그 이후로도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억지로 움직인다면야 못 움직일 것도 없지만, 목숨을 내걸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그들을 짓눌렀다.
결국 두 사람은 석상처럼 선 상태로 반 시진을 버텨야 했다.
누가 보화를 가슴 가득 안긴다 해도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시간.
이를 얼마나 악물었는지 턱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렇게 지쳐갈 때쯤 방문이 다시 열리고, 장천운이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장천운이 나오고 방문이 닫히자,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휙 돌아섰다.
이곳을 촌각이라도 빨리 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장천운이 말했다.
“식사하고 가라는데…….”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장천운의 말을 잘라먹었다.
“배 안 고프네.”
“속이 안 좋으니 그냥 가지.”
사실 장천운도 식사 생각이 없었다. 긴장으로 굳었던 심신을 풀기 위해 던진 말일 뿐.
‘노인네들이 왜 자꾸 엉뚱한 욕심만 내는 거야?’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금룡신군도 청산자처럼 은근히 그를 설득했다.
자신을 따른다면 대가없이 도와주겠다면서.
어떻게 보면 그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 그를 자신의 계획대로 끌어들이는 일보다 더 힘들었다.
주먹을 쥐고 있어서 안 보이지만, 그의 손 안은 땀으로 흥건했다.
‘그래도 운이 좋았어. 손우곤이 있었다면 일이 복잡해졌을지 모르거늘…….’
* * *
장천운은 율검당으로 돌아가자마자 전무궁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전무궁은 장천운의 이야기를 듣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적을 끌어들여서 적을 쳐야 하는 상황.
자칫하면 늑대를 잡겠다고 호랑이를 끌어들인 꼴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차피 이쪽도 호랑이, 저쪽도 호랑이다.
더구나 저쪽 호랑이는 또 다른 호랑이와 같은 굴을 썼다.
잘못 되어도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어차피 더 손해 볼 것도 없는 상황이니까.
“좋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맞불을 놓았으니 열심히 부채질이나 할 생각입니다.”
바위처럼 굳어 있던 전무궁의 얼굴이 금이 갔다.
웃음이었다.
정말 묘한 놈이다.
이놈하고 말하다 보면 모든 게 쉽게 느껴진다.
더 어이없는 것은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이다.
자식뻘도 안 되는 놈인데.
‘그러고 보니 도진이는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군.’
정말 오랜만에 이십 수 년 동안 보지 못한 아들이 떠올랐다.
아들의 나이도 벌써 서른이 넘었다.
그 아들도 이제 자식이 있을 것이다.
아들일까, 딸일까? 지금 몇 살이나 되었을까?
문득 손자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남들이 자식보다 손자가 더 사랑스럽다고 떠벌일 때마다 주책없는 늙은이라고 쏘아붙였는데…….
“그 전에 당주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장천운의 말에 상념이 깨진 전무궁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험험, 그래? 뭐냐?”
“돈 좀 주십시오.”
* * *
방으로 돌아간 장천운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저두심과 진구를 보고 씩 웃었다.
아무래도 사공명신이 말한 것 같다.
“뭘 그렇게 봐?”
저두심이 한 대 칠 것처럼 움켜쥐고 있던 주먹으로 눈을 훑었다.
“제기랄, 역시 너였군. 살아있을 줄 알았다니까.”
진구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원리원칙에 충실했다.
“원칙대로 하면 한 대 패야 하는데, 오늘은 참겠수.”
다른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단승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알만 굴렸다. 그럴 때는 진짜 눈치도 없었다.
장천운도 말해주지 않았다. 알면 귀찮아질 테니까.
“그건 그렇고, 두심 형. 전에 호법원의 경비무사 하나가 총호법 돌아가시던 날 이상한 광경을 봤다고 했지?”
“어? 호법원의 경비무사? 아! 백삼이 형?”
백삼은 호법원을 조사할 때 저두심이 만났던 경비무사다.
무창 말투를 쓰는 게 이상해서 저두심이 물어봤더니 고향이 무창 근처라 했다.
그날 이후 저두심은 그를 가끔 만났다.
“백삼이 형은 왜?”
“만나보려고.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줘.”
* * *
저두심이 백삼을 데려온 것은 신시 무렵이었다.
장천운은 백삼의 앞에 대뜸 금덩이를 내놓았다.
백삼은 탁자에 놓인 금덩이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족히 열 냥은 될 듯했다.
간덩이가 크다고 정평이 난 그도 놀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거금이었다.
“이, 이게 뭐요?”
“뭐긴 뭐요? 돈이지.”
“그러니까…… 이 돈을 왜……?”
“왜는 왜요? 가지라고 준 거지.”
“아니, 그러니까, 이 돈을 왜 저에게…….”
“필요할 거 같아서.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고 들었소. 약이 굉장히 비싸서 치료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하던데. 내가 잘못 알았소?”
“그, 그건…….”
백삼의 몸이 잘게 떨렸다.
어머니가 고질병에 걸린 지 벌써 삼 년 째다. 일 년 전에야 병명을 알았다.
병명을 알면 병을 고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약값이 너무 비싸서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호법원 경비무사의 녹봉이라고 해봐야 은자 두 냥. 그것도 많이 받는 셈이었다.
하지만 약은 한 달 분이 은자 스무 냥이나 했다.
뒷돈을 챙기면 어떻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호법원에서 일하다 보면 가끔 뒷돈이 생길 때가 있으니까.
그러나 뒷돈도 약값을 댈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총호법이 살해당한 후 분위기가 급랭해서 한 달에 한 냥 챙기기도 힘들었다.
방법은 하나뿐.
도둑질을 하는 수밖에.
하지만 도둑질하다 걸리면 그나마 두 냥도 날아가 버린다.
어머니의 약값은커녕 부인과 어린 자식의 생활비조차 대줄 수가 없게 된다.
그뿐이 아니다.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모자간의 정을 끊고 목숨마저 끊을지 모른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지만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병 때문에 고생은 하시겠지만 몇 년은 더 사실 테니까.
“아마 이 돈이면 일단 일 년 정도 약값을 댈 수 있을 거요.”
“도대체 왜 이런 거금을……?”
“당신 목숨을 사려고. 이건 계약금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