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286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88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286화
전무궁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나극만 상대했다.
“대장로, 이삼 일만 기다려주십시오. 죄가 없다면 풀어드릴 것입니다.”
“흠, 역시 전 당주의 철저함은 여전하군. 한데 상 장로에 대한 조사는 누가 맡고 있나?”
“오대 이조 조장인 비공이 맡고 있습니다.”
나극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호오, 상 장로를 직접 포박했다는 젊은 친구?”
“예, 대장로.”
“누군지 몰라도 대단하군. 아무리 상 장로가 병을 앓고 있다지만, 일개 조장이 장로를 무력으로 제압해서 잡아가두다니.”
“우리 구천성으로 봐서는 그런 친구가 들어왔다는 게 복이지요.”
“한번 만나보고 싶군. 지금 데려올 수 있는가?”
“죄송합니다. 임무수행 중이어서 한 시진은 더 있어야 돌아올 겁니다.”
“아쉽군. 할 수 없지. 그럼 다음 기회에 만나보는 수밖에.”
나극은 그쯤에서 차로 입술을 축이고 전무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노부는 전 당주의 충성심과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고 있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적이 되면 목을 쳐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이지.”
전무궁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 위의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 말은 협박이었다.
―나와 적이 되면 목을 치겠다. 내 편이 되어라.
그런 협박.
“시간을 줄 테니 잘 생각해 보게. 다만 오래 기다릴 수는 없네.”
“대장로…….”
전무궁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으려 하자, 나극이 손을 들어서 막았다.
“더 듣지 않겠네. 낙양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해서 현명한 결정을 내리길 바라겠네.”
그 말에 전무궁이 눈을 치켜떴다.
“설마……?”
“어제 몇 사람을 낙양으로 보냈지. 낙양에 도착하면 사흘을 기다리라고 했네. 그때까지 답을 보내지 않으면 안타까운 일이 벌어질 거야.”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맺은 나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돌아서기 전에 몇 마디 덧붙였다.
“엉뚱한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네. 그럼 사흘의 여유조차 없어질 테니까.”
나극이 장로들과 함께 돌아간 후 혼자 남은 전무궁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배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신의를 지키면 가족들이 죽는다.
강호를 동경한 자신 때문에 오랫동안 고생해온 부인과 자식들이.
문제는 상대가 마제 나극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존재.
‘여보, 도진아…….’
* * *
나극이 율검당을 방문한 그 시각.
장천운은 이조원들을 데리고 서문을 나섰다. 그와 동행한 사람은 이조의 정식 조원 중 강태와 산교를 제외한 일곱이었다.
사공명신과 저두심, 청목은 흑월대로 돌려보냈다.
그들에게는 흑월대로 돌아가더라도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함구하라고 했다.
세 사람은 입이 근질근질해도 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천운이 율검당에 있다는 건 기밀 중 기밀이다.
기밀을 유출하면 한 달간 특별교육을 각오하라고 했다.
세 사람 누구도 특별교육을 받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서문을 나선 장천운 일행은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북서쪽 산중에는 일반무사 수련장이 있었다.
그리고 수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십여 채의 커다란 이층 건물이 줄지어서 지어져 있었다.
전에는 수련생들의 거처로 사용하던 수련당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난 후부터는 구천성의 무사가 되기 위해 몰려온 무사들의 거처로 사용했다.
구천성에서는 그들을 다섯 개의 조직으로 분류했다.
전검대와 패룡대, 웅천대, 금호대, 선풍대.
일명 구천오대.
각 대는 약 이백여 명으로 구성되었고, 대주는 절정고수로 명망이 높은 인물을 기용했다.
율검당 복장을 한 장천운 일행이 수련당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눈이 그들을 주시했다.
구천성의 일원이 된 구천오대 대원들에게 율검당 무사는 부러움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장천운은 가장 왼쪽에 있는 전검대를 찾아갔다.
패룡대주 일검파산 동사광은 금룡장과 관련된 인물이었다.
금호대주인 비응신검 명호산은 모용예와 관련되었고, 선풍대주인 팔선귀 아청곽은 공손백의 사람이었다.
웅천대주 거웅일마 이광은 확실치 않지만 천외의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
결국 구천오대 중 전검대주 천기등만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성깔 좀 있다던데…….’
장천운이 율검당의 인명록에 적힌 천기등의 내력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전검대 무사들이 기거하는 건물에서 세 사람이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그들은 율검당 무사들이 오는 걸 보고 흠칫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
장천운 일행이 코앞까지 다가가자, 방에서 나온 자들 중 하나가 물었다.
“율검당에서 여긴 어쩐 일이오?”
“율검당 오대의 비공이라 합니다. 천기등 대주를 뵈러 왔습니다.”
묵묵히 서 있던 두 사람 중 건장한 덩치의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내가 천기등이네. 무슨 일로 나를 만나러 왔는가?”
각진 얼굴에 수염이 코밑을 덮고 눈이 부리부리한 자였다.
당장 전쟁터에라도 나갈 것처럼 날 선 기세를 지닌 자.
강호에서 싸움개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백혈전검(百血戰劍) 천기등이 그였다.
‘전검대라는 이름과 어울리는군.’
그게 천기등을 본 장천운의 첫인상이었다.
“새로 간부가 된 분들을 만나보는 것도 저희 일 중에 하나입니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다음에 보세. 지금은 수하들 수련 시간이어서 말이야.”
“직접 수련을 시키시나 보군요.”
“내가 하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는 놈들이 많거든.”
“그럼 일 각 정도만 시간을 내주시지요.”
“일각? 그 정도라면 뭐…….”
어깨를 으쓱한 천기등이 옆의 장한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이 먼저 가서 시작해. 곧 갈 테니까.”
“예, 대주.”
두 장한을 보낸 천기등이 고갯짓으로 방을 가리켰다.
“들어가세. 방안에 별 건 없지만, 흙먼지 마시며 이야기하는 것보단 나을 거네.”
장천운은 단승만 대동하고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천기등의 방은 그의 말마따나 별 것이 없었다.
열두 명이 앉아서 회의할 수 있는 탁자와 침상, 쌓아 놓은 침구류뿐. 그 흔한 족자하나 없었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천기등이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장천운도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몇 가지 물어보고, 솔직한 대답을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말해보게. 이 천모는 대답을 안 하면 안 했지, 대충 얼버무리거나 거짓말 하는 걸 싫어하네.”
“저도 그런 분이라 들었습니다. 그럼 묻지요. 대주께선 소성주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말인가?”
“대주께서도 구천성이 소성주와 대령주의 세력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걸 아실 겁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 그 말입니다.”
천기등의 눈빛이 싸늘하게 번뜩였다.
갑자기 찾아와서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는 장천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나를 시험하겠다는 건가?”
“뭐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율검당의 위세가 대단하다는 건 알지만, 이 천기등을 너무 무시하는 것 같군. 일개 조장이 그런 식으로 묻다니.”
“그럼 다르게 물어볼까요? 대주께서는 소성주님과 대령주께서 대판 싸울 경우 어느 쪽 편을 드시겠습니까?”
보다 더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어지간한 사람은 대답하기 곤란할 정도.
천기등도 어이가 없는지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그가 이마를 와락 찌푸리며 말했다.
“이 천기등이 비록 싸움을 좋아해서 싸움개라는 소리를 듣지만, 이익 때문에 신의와 맹서를 저버리는 개새끼는 아니네.”
구천성에 들어올 때 충성을 맹서했다.
사정이야 어떻든 지금의 주인은 소성주 아닌가.
결국 소성주를 향한 맹서를 한 셈이다.
“정말 소성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까?”
“나는 두 번 대답하는 것도 싫어하네. 그런데 자네에게 그런 질문을 할 능력이 있는지 궁금하군.”
짜증을 내듯 말한 그의 눈에서 불꽃이 이글거렸다.
감히 일개 조장 따위가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묻다니!
모욕을 당했다 생각한 듯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장천운은 그의 분노를 간단하게 옆으로 돌렸다.
“여기 이 친구가 저를 대신해서 능력을 증명해드릴 겁니다.”
한쪽에 묵묵히 서 있던 단승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뭘 해?’
천기등도 장천운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냐?”
“이 친구는 저희 이조 부조장입니다.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으면 이 친구를 상대해보라는 말씀이지요.”
천기등이 눈을 치켜떴다.
치욕적인 말이었다.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저 따위로 말을 한단 말인가!
탕!
원목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려친 그가 벌떡 일어섰다.
“네가 지금 나에게 모욕을 주겠다는 거냐! 내 너를 두들겨 팬 후 전 당주께 끌고 가서 사과를 받아내고 말겠다!”
단승의 가늘어진 눈이 방향을 틀어서 천기등을 향했다. 동시에 ‘훗!’하는 실소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누굴 패? 당신이 저 인간을 패? 미쳤군.”
홱, 고개를 돌린 천기등이 눈을 부릅떴다.
“뭐야? 이놈들이 어디서……!”
“당신이 저 인간의 몸에 작은 자국이라도 내면 내가 장을 지지겠어.”
“이……!”
“아마 마제 영감도 저 인간을 패려면 쉽지 않을 걸?”
“뭐라?”
“아니지, 젠장! 어쩌면 저 인간이 마제를 팰지도 모르겠군.”
천기등의 눈에는, 혼자서 북 치고 나팔 불 듯 투덜대는 단승이 미친놈처럼 보였다.
율검당 이조 조장이 마제 나극를 팬다고?
농담도 그 정도면 농담이 아니라 미친놈 헛소리였다.
“오늘 일진이 사나우니 제정신 아닌 놈들의 헛소리에 귀만 더러워졌구나.”
그 말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단승도 어디서 개가 짓느냐는 듯 신경 쓰지 않았다.
젊은 놈들이 갑자기 찾아와서 다그쳤으니 당연히 화가 나겠지.
문제는 뒤에 덧붙인 몇 마디였다.
“얼굴은 계집처럼 반반한 놈이 미친년처럼 헛소리나 지껄이다니.”
순간, 단승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눈에서도 차디찬 한광이 번쩍거리며 쏟아졌다.
“그 말, 삼초만 받아내면 봐주겠어. 하지만 받아내지 못하면, 개소리 지껄인 걸 후회하게 될 거야.”
“네놈이 어디서…….”
와락 구겨진 얼굴로 분노의 일갈을 내지르려던 천기등의 입술이 달라붙었다.
앞에 있던 단승의 기세가 찰나의 순간에 달라졌다.
온몸의 신경과 근육이 바짝 당겨지며 바늘로 콕콕 찌른 것처럼 경고를 보냈다.
‘뭐, 뭐야, 이 자식?’
하지만 강호에서 내로라하는 싸움개, 백혈전검 천기등이 그딴 정도에 굴복할 리 없었다.
후다닥 정신을 추스른 그는 다급히 공력을 운용해서 단승의 기세에 맞섰다.
그 사이 장천운은 태연히 걸음을 옮겨서 자리를 피해주었다.
단승에게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죽이지 마라는 말도, 손에 사정을 두라는 말도.
어차피 단승의 삼검을 받아내지 못할 자라면 중요한 일을 맡길 수도 없으니까.
번쩍!
쉬아아악!
쩌저정!
단승의 검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게다가 무쇠도 자를 정도로 위력적이었고, 찰나에 방향을 네 번이나 바꿀 정도로 변화도 심했다.
천기등은 세상에 그런 검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상대의 쾌검을 상대했다.
단 삼 초식을 상대하면서 상처가 다섯 군데나 났다.
그 중 한 군데는 제법 깊어서 줄줄 흘러나온 피에 옷자락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그래도 어쨌든 삼 초식을 모두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상대에게도 작은 상처를 선물했다.
싸움개가 그냥 얻은 이름이 아니라는 걸 알려준 것이다.
‘어때, 이놈아!’
상처를 입고도 속이 시원했다.
단승은 삼초 공격을 펼친 후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한번 말을 내뱉은 이상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운이 좋군.”
“흥! 네놈의 칼이 빠른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모가지 걸고 싸우면 너도 팔다리 하나쯤은 버릴 생각을 해야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