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28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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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88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285화
공손백의 차가운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노부의 예상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청산자와 금룡신군도 나올 거네. 어쩌면 이미 나왔을지도 모르고.”
나극의 말에 공손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얼마든지 가능한 예측이었다.
그리고 사실이라면 대책을 세워야 했다.
“한번 말씀드려보지요.”
* * *
구천무원으로 돌아간 사마경은 자정이 다 돼가도록 잠을 자지 않고 의자에 앉아서 차를 마셨다.
그 바람에 연송하와 소연추도 방을 나갈 수가 없었다.
연송하는 부상이 아직 완쾌되지 않았는데도 야간 호위를 맡고 있는 중이었다.
류화가 부친인 화금당주 류징의 죽음 때문에 며칠 자리를 비운 것이다.
“아가씨, 그만 주무세요.”
소연추가 넌지시 말했다.
고개를 돌린 사마경이 슬쩍 한마디 던졌다.
“누구 만날 사람 있어?”
“예? 아, 아뇨.”
사실 사마경이 자면 구양명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사마경도 최근 들어 부쩍 가까워진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모르지 않았다.
“나는 괜찮으니까, 유모는 가서 쉬어.”
“그래도…….”
“송하도 가봐.”
“소성주님.”
“가야 나도 잘 거 아냐? 구천호령이 있으니 걱정 말고 가보라니까?”
사마경이 뾰족한 투로 말했다.
조금은 억지였다.
다른 때는 항상 그녀가 먼저 자고 소연추와 시비가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소연추도 반박하지 않았다.
“저, 그럼……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여자가 사랑을 알면 챙기는 사람도 달라지는 법이다.
결국 소연추가 연송하를 슬며시 끌고 먼저 방을 나갔다.
피식, 실소를 지은 사마경은 고개를 쳐들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일각쯤 지나가 슬슬 짜증이 났다.
‘근데 왜 여태 안 와?’
그때였다. 속으로 구시렁대는 말에 답하듯 전음이 들렸다.
<소성주, 접니다.>
‘나도 누군지 알거든?’
사마경은 한소리 쏘아주고 싶은 걸 꾹 참고 미소를 지었다.
그 직후, 장천운이 거짓말처럼 허공에서 나타났다.
그를 본 사마경이 이마를 찌푸렸다.
“모습이 그게 뭐야?”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변용을 했습니다.”
사마경도 모르지 않았다.
몇 일만에 만났는데, 잘생긴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운 것일 뿐.
“뭐, 그거야 그렇다 치고…… 왜 이렇게 늦었어?”
“취조해야 할 사람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제가 요즘 많이 바쁘거든요.”
“헛소리 그만하고, 이리 와서 어깨 좀 주물러줘. 무리했더니 근육이 뭉쳤나 봐.”
“…….”
“왜? 싫어?”
“아닙니다.”
얼마나 힘든 일을 했다고 어깨근육이 뭉쳐?
어쨌든 장천운은 순순히 그녀의 뒤로 가서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사마경은 눈을 반쯤 감고 몸을 장천운에게 맡겼다.
정말 시원했다.
장천운의 손이 어깨를 주무를 때마다 짜릿짜릿한 시원함이 밀려들었다.
“잘 되고 있어?”
“문인동 장로를 끌어들였습니다.”
“문인동 장로를?”
“어차피 대령주에게 돌아가 봐야 안 좋은 꼴만 당할 테니, 그도 반쯤 포기한 거죠.”
“총호법을 살해한 죄는 어떻게 하고?”
“그 이상의 공을 세운다면 소성주께서도 용서하실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마경은 그에 대한 대답을 바로 내놓지 않았다.
장천운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한참 만에 숨을 깊이 들이쉰 사마경이 말했다.
“좋아, 지은 죄의 배 이상 공을 세운다면 용서하겠어. 그런데 그 교활한 자가 순순히 협조할 거라고 생각해?”
“제재를 가해서 통제할 수 있으니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알았어. 그럼 문인동은 천운이 알아서 해. 그리고 천외는 어떻게 됐어?”
“일단 금룡신군을 만났습니다.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내긴 했습니다만, 소성주의 뜻에 따라서 협상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금룡의 손우곤은 사마경을 죽이려고 했던 자 아닌가.
그 과정에서 구천성 무사들이 금룡의 무리에게 다수 죽임을 당했다.
사마경이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구체적인 부분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빚은 받아내야겠지. 반드시.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천운이 생각한 대로 추진해.”
사마경은 입술을 잘게 씹으며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냉정하게 말했다.
지난 몇 번의 싸움을 겪으면서 달라진 부분 중 하나였다.
이제 그녀는 전쟁과 단순한 다툼을 구분해서 대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전쟁에서는 오직 승리만이 선이다.
패배하면 참혹한 결과를 맞이해야 한다.
그래서 철천지원수와도 손을 잡아야만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천외와의 싸움은 전쟁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장천운은 내심 안도하며 지난 과정을 모두 이야기해주었다.
사마경은 표정 변화도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러나 겉모습과 달리 심장은 뜨겁게 달아올라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했다.
남들 눈에는 도도하게 보였을지 몰라도 실제 마음은 망망대해에서 홀로 헤매는 기분이었다.
뭘 하고 싶어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 줄기 빛이 비쳤다.
저 수평선 너머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돛대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고마워, 천운.’
자신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아버지 때문이라는 핑계로.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위해 길을 열어주었다.
자유를 얻고도 호위무사라는 이유로.
‘그리고 미안해. 아마 또 그런 경우가 닥친다면, 나는 또 똑같은 결정을 내릴 거야. 정말 미안해, 천운.’
사마경은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로선 장천운이 뒤에 있어서 자신의 그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게 다행이었다.
“……어쨌든 소성주께서 성으로 돌아오셨으니, 이제 대령주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성주를 제거하려고 할 겁니다.”
장천운이 그렇게 말을 맺었다.
사마경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랭히 말했다.
“새삼스러울 것 없어. 언제는 안 그랬나?”
“그때와는 다를 겁니다. 독이 바짝 올라 있으니까요.”
게다가 천외도 더 이상 구경만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의자에서 일어난 사마경이 몸을 돌리고 장천운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봐야 그 사람 곁에는 천운이 없잖아. 그럼 해볼 만해.”
그녀는 더 이상 공손백을 백부라 부르지 않았다.
두 손을 뻗은 그녀는 장천운의 품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장천운은 그녀를 안았다.
마치 부드러운 구름이 안긴 듯했다.
어느 순간, 품속의 구름에서 잔잔한 떨림이 느껴졌다.
두려운가보다. 하긴 상대의 가공할 힘을 아는 이상 어느 누가 두렵지 않을 건가. 자신조차도 그들의 능력에 두려움을 느끼거늘.
장천운은 사마경을 안은 손에 슬며시 힘을 주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너만은 내가 지켜주마.’
오늘만큼은 사마경의 눈에도 장난기 대신 물기가 가득 차 있었다.
* * *
구천성 하늘을 뒤덮은 냉기류가 무사들의 머리 위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짓눌렀다.
푹푹 찌는 한여름 더위에도 무사들은 한기를 느낄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느 누구도 먼저 나서서 상대를 건들려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조용한 상황이 지속되지는 않으리란 것을.
아니나 다를까, 사마경이 돌아온 지 이틀째 되던 날, 점심을 마치고 반 시진쯤 지났을 때였다.
율검당 무사들은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고 바짝 긴장했다.
대장로 나극이 장로 셋을 대동하고 율검당을 찾아온 것이다.
전무궁은 굳은 표정으로 나극과 장로들을 맞이했다.
나극이 직접 발걸음을 했다는 건 그만한 목적이 있다는 뜻. 그저 차나 마시면서 담소나 나누려고 온 것은 아닐 것이다.
“어인 일로 대장로께서 여기까지 직접 오셨습니까?”
“문인동 장로를 데려가려고 왔네.”
나극은 가타부터 설명을 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장로원 원주인 그에게는 장로들을 챙길 의무가 있다.
죄상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지 않은 이상 문인동은 여전히 장로원의 사람.
그에게는 문인동을 대신해서 변호할 권리와 지켜줄 의무가 있었다.
“나흘이 지났네. 죄가 밝혀지지 않았다면 풀어줄 때도 되었지 않은가?”
구천률에 따로 적혀 있지는 않지만, 무고한 장로를 며칠 동안 가두어둘 수는 없다.
나극은 그 점을 들먹이며 전무궁을 몰아붙였다.
거부한다면 무력을 쓸 기회를 얻을 수 있고, 받아들인다면 무고한 장로를 무리하게 잡아가둔 것에 대해서 추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극의 말을 들은 전무궁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늦으셨습니다.”
그 말에, 나극과 함께 온 적두가 눈을 부라리며 다그치듯 물었다.
“무슨 소리요, 전 당주? 설마 문인 장로가 잘못되기라도……?”
전무궁은 태연한 어조로 좀 더 자세히 말했다.
“오시 초에 풀어줬습니다. 장로원으로 간 줄 알았는데, 못 만나셨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그의 말에 나극과 세 장로는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 되었다.
“문인 장로를 풀어주었다?”
“예, 대장로. 말씀대로 장로를 너무 오래 가두어두면 안 될 것 같아서 풀어주었지요. 아마 조금 쉬었다가 들어갈 생각인가 봅니다.”
천하의 마제 나극도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정말로 풀어주었다면 추궁하기도 애매했다.
조용히 서 있던 염사승이 그를 대신해서 한마디 나섰다.
“문인 장로를 풀어줬다면 죄가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다면 죄도 없는 장로를 잡아가두었다는 건데, 그에 대해서는 당주께서 책임을 지셔야 할 거요.”
“염 장로, 문인 장로에게 죄가 없다고 누가 그랬소?”
“죄가 없으니 풀어준 것 아니오?”
“죄가 없는 것과 아직 밝히지 못한 것과는 분명하게 차이가 있소이다. 문인 장로가 입을 다물고 끝까지 버텨서 풀어준 것일 뿐, 혐의가 없기 때문에 풀어준 것이 아니외다.”
“어쨌든 밝히지 못한 것 또한 전 당주의 능력부재 때문이 아니오?”
“그가 장로만 아니었다면 고문이라도 했을 거요. 그러나 장로를 고문할 수는 없는 일 아니오?”
염사승을 향해 냉랭히 쏘아붙인 전무궁이 이번에는 나극을 향해 말했다.
“대장로, 고문을 해도 괜찮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잡아서 자백을 받아내겠습니다. 그리 해도 되겠습니까?”
“…….”
뜻밖의 역공을 당한 나극은 이마를 찌푸렸다.
다시 잡아서 고문을 하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말이다.
한참 만에 그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흐음, 어쨌든 풀어주었다니 다행이군. 죄의 유무를 가리는 것은 율검당이 할 일인데, 노부가 어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겠나?”
문인동에 대한 사안에 대해서 대충 얼버무린 그는 이야기를 돌렸다.
“그런데 듣자하니 새로 만든 오대의 조장이 상두한 장로를 잡아갔다고 하더군. 상 장로에게 뭐 알아낸 거라도 있는가?”
전무궁은 소름이 끼쳤다. 나극 때문이 아니었다.
비공이 어제 말했다.
“대령주 측은 문인 장로를 핑계로 압박해서 당주님의 손발을 묶으려고 할 겁니다. 그러니 문인 장로는 오전에 풀어주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상두한 장로나 나승관에 대한 걸 물으면 단편적인 사실만 말하고, 나머지는 모두 저에게 떠넘기십시오.”
그는 마치 오늘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 같았다.
나극이 직접 오리라고는 생각 못했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나극의 공격을 비켜갈 수 있었으니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상두한 장로의 단검이 류징과 조 장로의 살해에 쓰인 무기인 것은 확인되었습니다. 상 장로도 그 단검이 자신의 것이라고 진술했지요. 하지만 자신은 그 두 사람을 절대 죽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해서 아직 조사할 것이 있기 때문에 풀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
사실이라면 더 추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노부가 상 장로를 만나봤으면 싶네만.”
“워낙 중대한 사건이어서 조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면회를 일체 금지하고 있습니다.”
“대장로님도 안 된단 말이오?”
탕탕!
적두가 탁자를 내리치며 버럭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