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284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99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284화
구천대전이 숨겨진 살기에 짓눌려 있을 때, 장천운은 뇌옥을 방문했다.
간부는 물론이고 일반 무사들까지 모두 구천대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로선 그게 더 편했다.
끼이이익.
문인동은 뇌옥의 철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놈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텁수룩한 수염, 코 옆의 커다란 점.
그런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처음 보는 놈인데 느낌이 왠지 익숙했다.
“이름 문인동. 나이 마흔다섯. 직위는 장로. 죄명은 총호법 여철숭을 살해. 맞소?”
“웬 놈이냐? 처음 보는 놈이 말을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나? 율검당 제 오대, 이조 조장이오.”
문인동의 얼굴이 구겨졌다.
겨우 조장 따위가 자신을 모욕하는데도 화를 내지 못했다.
‘빌어먹을.’
후회가 되었다.
돌아선 공손백을 붙잡고서라도 보고를 올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최소한 지금 같은 상황은 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구천성의 장로가 조장 따위에게 눌릴 수는 없었다.
“흥! 감히 조장 따위가 지금 나를 모욕하겠다는 거냐?”
장천운이야 눈도 깜짝하지 않았지만.
“못 들어보셨나? 문인 장로쯤 되면 들어보셨을 텐데?”
“뭘 말이냐?”
“상두한 장로도 잡아와서 자백을 받아냈는데, 귀하를 잡아오지 못할 건 또 뭐요?”
문인동은 눈을 치켜뜨고 앞에 있는 놈을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언뜻 앞에 있는 놈이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묘한 표정이었다. 마치, 아이가 친구를 놀려대고는 즐거워서 킥킥대는 표정이랄까?
‘저놈이 나를 아나?’
그의 의문에 답하듯 장천운이 넌지시 말했다.
“대령주라면 장로를 바로 빼낼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지니고 있소. 그런데 왜 그냥 놔두고 있는지 아시오?”
“…….”
“대령주에게 장로는 한번 쓰고 버릴 장기판의 졸(卒)일 뿐이거든.”
“건방진 놈! 말조심해라!”
문인동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장천운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쓴웃음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지켜봤으면서도 대령주를 아직 모르시는군.”
“무슨 소리냐?”
“그가 얼마나 냉혹한 사람인지, 그의 뒤에 어떤 힘이 있는지. 그에게 장로는 어떤 존재인지…… 장로는 아시오?”
“…….”
문인동은 이를 악물고 장천운을 노려보기만 했다.
장천운이 다시 물었다.
“암천문에 대해서 아시오?”
“…….”
“훗, 아직 천외의 이름도 모르나 보군.”
“……?”
문인동의 눈꺼풀이 미미하게 떨렸다.
천외.
얼마 전 자신의 넋을 빼놓았던 바로 그 ‘천외’를 말하는 듯하다.
저자가 누군데 그 위험한 이름을 알고 있단 말인가?
이를 악문 그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그때 장천운이 넌지시 몇 마디 덧붙였다.
“용평 장로의 일로 인해서 지금쯤은 많은 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흠칫한 문인동의 미간에 주름이 내 천(川)자로 깊게 파였다.
‘저놈이 용평 장로와의 일을 어떻게 알지?’
“하긴 공손백에게 이용당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순간, 치켜 뜬 문인동의 눈이 점점 커졌다.
머릿속에 어떤 얼굴이 하나 떠올랐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어떤 놈의 얼굴이.
“혹시…… 너……?”
장천운의 무심한 표정에서 묘한 미소가 피어났다.
문인동은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잘게 떨렸다.
비공이란 놈의 얼굴 위로 가끔 악몽 속에 나타나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비웃던 놈의 얼굴이 겹쳐졌다.
“장…… 천……운?”
그 놈의 이름을 내뱉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언제나 냉정할 것만 같던 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려 나왔다.
“역시…… 살아 있었구나.”
“염라대왕이 나중에 오라고 합디다.”
멍하니 장천운을 바라보던 문인동의 어깨가 축 처졌다.
무저의 늪 속에 빠진 사람처럼 허탈한 표정.
어느새 떨림이 멈춘 그의 공허한 눈은 혼이 빠져나간 듯했다.
“어이가 없군, 어이가 없어. 죽지 않았을 거라 짐작하고 있긴 했지만, 버젓이 성 안에 들어와 있었다니…….”
“내가 왜 정체를 밝혔는지 아시오? 귀하라면 무슨 뜻인지 모르진 않을 거요.”
그제야 문인동의 표정이 썩은 땡감을 한입에 베어 문 사람처럼 벌게졌다.
정체를 밝힌 이상 놈은 자신을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묻어버리든, 아니면 또 다른 방법으로 제재를 가하든 하겠지.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거야 장로의 결정에 달려 있지요.”
문인동은 무의식중에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후우우우우.”
“어쩌면 장로에게도 잘된 일일지 모르오.”
“잘된 일이라고?”
“공손백은 한번 의심한 사람을 살려둘 만큼 가슴이 넓은 사람이 아니오. 그리고 장로는 이미 의심을 산 적이 있고.”
그 말에 문인동의 눈빛이 흔들렸다.
순간적이었지만 장천운은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어느 쪽이 장로에게 이익이 될지는 누구보다 장로가 잘 알 거요.”
“너는 대령주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른다.”
“나는 얼마 전 그보다 훨씬 더 무서운 사람을 둘이나 만나보았소. 그러고도 살아남았소.”
“……?”
문인동은 장천운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천하에 공손백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있다니.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나.
“내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공손백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오.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한 사람까지 더한다면 모두 셋이오만.”
“그들이 누군데……?”
“천외의 주인들. 공손백은 그들 중 하나의 하수인에 불과할 뿐이오.”
문인동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맙소사…….”
그는 공손백의 손발처럼 움직이던 자들의 무서움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들은 수라귀였다. 그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공손백은 수라귀의 왕, 아수라였고.
그런데 아수라 같던 공손백이 한낱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그를 하수인으로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셋이나 된다고?
머릿속이 끈적끈적한 거미줄로 꽉 찬 듯했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장천운은 강렬한 충격에 넋이 빠진 문인동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그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장로가 필요하오. 결정은 장로가 내려주시오.”
문인동은 다섯을 셀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나의 뭘 믿고……?”
“나는 장로를 믿지 않소. 그러니 약간의 제재를 가할 것이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면 풀어줄 거요.”
“일이 끝나도 풀어주지 않으면?”
어깨를 으쓱한 장천운이 태연히 말했다.
“장로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밖에 없소. 죽든, 나와 함께 하든. 어차피 풀어준다 해도 공손백은 장로를 믿지 않을 테니까.”
문인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놈의 말이 옳았다. 아무 이상 없이 순순히 풀려난다면 공손백은 자신의 결백을 절대로 믿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종리성학과 나란히 비밀뇌옥에 갇힐지도 모른다.
더 심한 꼴을 당할 수도 있고.
‘빌어먹을 놈!’
그 빌어먹을 놈이 자신에게 강철로 된 올가미를 던지고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힘만 있다면 놈의 얼굴을 한 대 갈겨주는 건데.
저놈의 미끌거리는 주둥이를 확 물어뜯으면 속이 시원할 듯했다.
으드득. 이를 간 그가 잇새로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거냐?”
* * *
저녁식사를 겸한 회의는 한 시진 정도 이어지다 끝이 났다.
날을 샐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기우에 그쳤다.
행여나 일이 커질까 봐 간부들이 최대한 말을 아낀 덕분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차근차근 하도록 하죠. 이제 그만 가서 쉬도록 하세요.”
사마경은 적절한 기회가 오자 회의가 끝났음을 알렸다.
간부들은 안도의 마음을 최대한 숨긴 채 무뚝뚝한 얼굴로 구천대전을 나섰다.
의외라면 공손백과 나극 역시 조용히 구천대전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공손백이 나가면서 사마경을 지그시 바라본 게 전부였을 뿐.
사마경은 오히려 그 점이 의문이었다.
왜 저렇게 조용히 나가는 거지?
공손백의 마음을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건가?
하지만 사마경도 이전의 경험 없는 소성주가 아니었다.
‘당신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지금 그녀의 옆에는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용화성, 그가.
그녀는 황천현을 출발할 때 용화성을 장사로 돌려보냈다.
그가 귀찮아서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는 광양산장의 대공자 아닌가.
용화성 한 사람보다 광양산장이 도와준다면 훨씬 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길 수만 있다면,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누구의 도움도 마다하지 않을 거야.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한편, 나극과 함께 장로원으로 향하던 공손백은 진득한 살기가 배인 분노를 씹어뱉었다.
“멍청한 놈. 계집 하나를 죽이지 못해서 상황을 이 따위로 만들어 놓다니.”
한 달 만에 본 사마경은 전에 비해서 무공도 강해졌고, 정신도 강해져 있었다.
특히 자신의 눈을 마주 보고도 흔들리지 않는 도도한 눈빛에는 무너지지 않을 뭔가가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바로 그 눈빛이었다.
조금 사나운 고양이였던 사마경이 암호랑이가 되어서 돌아온 것이다.
살해하려다 실패한 것이 도리어 그녀를 키운 것 아닐까?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마경 본인은 아무런 문제도 안 되었다.
소성주라는 지위 외에는 그저 살아 있는 인형에 불과했다.
그녀 주위에 포진한 무리들이 문제였을 뿐.
특히 장천운 같은 놈!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사마경이 달라진 이상 처리 방법도 달리 해야 한다.
“아무래도 일찍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대장로.”
나극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리다가 정상으로 돌아갔다.
“너무 서두르는 것도 좋지 않네.”
“저도 서두르고 싶지 않습니다만, 잔가지를 제때 치지 않으면 나중에는 쳐내기가 어려워지는 법이지요.”
“의외군. 천하의 공손백이 철없는 여자아이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다니.”
공손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신도 그 사실이 짜증나는 터였다. 더구나 다른 사람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오자 심장이 부글부글 끓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차갑게 흘러나온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일지 몰랐다.
“먼저 손발을 쳐내야겠습니다. 천경전은 제가 맡을 테니, 대장로께서 율검당을 맡아주십시오.”
나극이 멈칫했다.
“율검당을 노부더러 맡으라?”
“그렇습니다. 대장로께선 전무궁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율검당과 천경전만 못 움직이게 하면 나머지 처리하는 일이 훨씬 수월해질 겁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비령각과 율검당, 천경전은 사마경을 따르는 자들의 핵심 세력이다.
비령각이야 쉽지 않겠지만, 율검당과 천경전은 어떻게 해볼 수 있을 듯했다.
나극은 순순히 공손백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좋아, 율검당은 노부가 맡지. 그런데 우문각은 어떻게 할 건가? 어찌 보면 가장 큰 걸림돌이라 할 수 있는데 말이야.”
“놈에 대한 처리는 우리가 직접 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나극은 더 묻지 않았다. 공손백의 말뜻을 알기 때문이다.
‘나와 공손백이 사마경을 치면 그들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겠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장로원의 월동문을 통과했다.
이제 몇 걸음만 더 가면 각자의 거처로 갈라지는 곳이 나온다.
나극은 자신의 거처로 가기 전에 지나가듯이 질문을 하나 던졌다.
“독고 늙은이는 어떻게 할 건가?”
독고광은 비밀 아닌 비밀 속의 인물이었다.
구천성의 사람이 아니면서도 구천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자.
한때는 나극과 친구처럼 지냈으나, 언제부턴가 모종의 이유로 서로를 외면하며 살았다.
그 세월이 이십 년.
이제는 그와의 인연도 매듭지어야 할 때가 된 듯했다.
공손백은 생각지 못한 질문에 이마를 찌푸렸다.
나극이 그의 대답을 재촉했다.
“그는 자네가 가고자 하는 길을 방해할 거네.”
공손백도 모르지 않았다.
하기에 더 고민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결정지었다.
“누구든, 앞을 막는 자는 치우고 갈 거요. 그것만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행이군.”
나극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공손백이 그 결정을 얼마나 힘들게 내렸는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공손백이 그런 결정을 내리자 다른 요구를 하나 더했다.
“신마를 만나 뵈었으면 하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