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307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94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307화
“구평추 장로를 그 자리에 앉힐 거야. 육 전주에게는 보좌역을 맡기고.”
“그거 멋진 생각입니다.”
장천운조차 생각지 못한 기발한 발상이었다.
아마 그 사실을 알게 되면 공손백과 나극은 속이 뒤집힐 것이다.
“근데 구천대평의회는 언제 여는 게 좋을까?”
“이달 말이 어떻겠습니까?”
말일까지는 열흘 정도 남았다.
그 시간이면 십이지부에서도 대부분 참석할 수 있을 듯했다.
시간을 더 끌면 좋겠지만, 공손백은 절대 다음 달로 넘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 그날로 정해서 각 지부에 알리라고 해.”
“예, 소성주. 총사께 전하겠습니다.”
장천운도 사마경도 이번 구천대평의회가 어떤 무게를 지녔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치열한 기세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공손백은 공식적으로 사마경을 몰아낼 기회를 엿볼 것이고, 사마경은 그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작정이다.
‘천외삼세도 구경만 하고 있진 않겠지.’
현재의 상황만 보면 사마경이 불리했다.
그러나 아직은 시간이 열흘이나 남아 있었다.
천하도 뒤집을 시간!
“비령각에 들렀다가 무화원으로 가서 오랜만에 흑월대 교육을 시켜야겠습니다.”
“지금?”
“저번에 장로원에서 보니 너무 오래 놔두어서 기가 빠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럼.”
밖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구양명신은 소리 없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후우, 다행히 우리 근무 때 하는군.’
이 더위에 교육을 빙자한 수련을 한다면 돌아버릴 텐데…….
곧 문이 열리고 장천운이 방에서 나왔다.
그때 회랑 끝을 돌아오던 막소광이 목진화를 보며 구시렁거렸다.
“대주가 영빈각의 문을 박살냈다는 말 들었지? 하여간 그 인간 성질머리 더러운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뒤늦게 장천운이 방에서 나오는 걸 본 목진화가 재빨리 막소광의 입을 막았다.
“막 형님, 그 말은 이제 그만…….”
“진짜 내 부하 같았으면 뼈마디를 부숴…….”
뒤늦게 막소광이 장천운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씨바, 저 인간이 언제 돌아왔지?’
방을 나온 장천운은 듣지 못한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사공명신에게 말했다.
“그럼 수고하쇼.”
사공명신은 식은땀이 등줄기로 흐르는 걸 그대로 느끼며 절도 있게 포권을 취했다.
“대주도 가서 쉬쇼.”
장천운도 포권으로 답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막소광과 목진화가 뻣뻣한 몸으로 재빨리 비켜섰다.
그들 앞을 막 지나가던 장천운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아! 이따가 흑월대 전체 특별교육이 있을 거요. 두 소저만 남기고 모두 무화원으로 모이쇼.”
* * *
장천운의 설명을 들은 우문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달 말일이란 말이지?”
“예, 총사.”
“흐으음, 알겠다. 그리 알리지.”
“아마 많은 일이 벌어질 겁니다.”
“그러겠지. 차라리 잘 됐어. 어차피 벌어질 일, 일찍 벌어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우문각은 흠칫하더니 장천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전에도 그렇게 말해놓고 속을 뒤집어놓은 적이 있었지 않은가.
듣고 기분 상하느니 이번에는 선수를 쳤다.
“뭘 말이냐? 내가 혼인을 하지 않은 이유?”
“그걸 물어보면 대답해주실 겁니까?”
아닌가?
“내가 왜?”
“그런데 왜 그 이야기를 꺼내십니까? 제가 언제 그걸 궁금해 했습니까?”
했잖아!
우문각은 쏘아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자칫하면 말이 길어지면서 그 이야기가 또 나올 수 있었다.
“험, 아니면 말고.”
“사실 그것도 조금은 궁금하긴 한데…….”
“하지 말라니까! 그게 아니라며?”
“예, 알았습니다.”
옆에서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정유는 몰래 배를 움켜쥐었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랬다가는 몇 날 며칠 총사에게 시달릴 터.
배를 쥐어짜서 피가 나오더라도 참아야 했다.
“아! 저번에 주신 그림, 우 노선배가 굉장히 좋아하시더군요. 고맙다는 말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그래?”
우문각은 속이 무척 썼다.
아무리 과거의 추억을 떠나보내기로 작정했다지만,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이리라.
“그런데 그림을 펼쳐보니 뭐가 묻은 것 같던데…….”
“뭐야? 뭐가 묻어 있어?”
“뿌연 것이 묻어 있는데…… 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뿌, 뿌연 것?”
“아무래도 기침을 하다가 가래가 튄 것 같습니다.”
“가래? 아! 맞아. 몇 년 전 겨울에 심하게 기침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조금 튀었지. 닦으면 그림이 지워질까봐 닦지도 못하고…….”
우문각은 기억을 떠올리며 설명을 하다 말고 말꼬리를 흐렸다.
장천운과 정유가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런 눈빛으로 보느냐?”
“그 말씀, 정말입니까?”
“그럼 정말이지 않고. 가만? 지금 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하던 우문각의 눈썹이 역팔자로 솟구쳤다.
장천운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좌우간 그 그림을 보고 우 노선배님 감격해서 거의 우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문각은 속이 끓었지만, 그 이야기로 계속 싸울 수는 없었다.
말이 길어지면 이겨도 손해는 자신이 보는 것이다.
‘죽일 놈의 새끼. 뭐가 어째?’
그때 장천운이 본론을 꺼냈다.
“사실 제가 물어보고 싶은 것은…… 가끔 총사께서 저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유입니다.”
“…….”
이상한 눈빛?
남들이 들으면 정말로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남자가 남자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것도 혼인을 하지 않은 중년남자가 젊고 잘 생긴 청년을?
우문각은 장천운이 질문한 이유의 진심을 알고 싶어서 장천운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너 설마, 내가 백리호 같은 인간인 걸로 아는 건 아니겠지?”
“예? 거기서 왜 백리 단주님이 나옵니까?”
“정말 왜 묻는지 몰라?”
“글쎄, 무슨 말씀이냐니까요?”
“몰랐냐? 백리호가 여자보다 남자를 더 좋아하는 인간이라는 거.”
문득 구천성 간부에 대한 기록 중에 천혼단주 백리호에 대한 정보가 빈약했던 것이 떠올랐다.
단순히 조용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지, 감춰진 것이 많은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때는 초보 호위무사였으니까.
“근데 그런 사람하고 총사하고 왜 비교를 합니까? 총사께선 명월나녀도를 사모하는 분 아닙니까?”
한마디로 남자보다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 아니냐, 그 말이었다.
우문각도 바로 알아듣고 마음이 풀어졌다.
“그건 네 말이 맞다. 그런데 왜 그걸 물은 거냐?”
“그거야 총사님이 잘 아실 거 아닙니까? 저를 가끔 그렇게 쳐다보신 분이 총사님이니까요.”
“내가?”
그제야 우문각은 장천운이 뭘 묻는지 이해했다.
그는 장천운을 보고 가끔 옛 친구를 떠올렸다.
그 표정을 장천운이 봤는가 보다.
“훗, 난 또 뭐라고.”
우문각은 가볍게 실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옛날에 내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도 너처럼 장 씨였지.”
“아, 그래요?”
그때만 해도 성이 같아서 그런가보다 했다.
하지만 뒤로 더 긴 이야기가 있었다.
“너를 보고 있으면 그 친구가 떠올랐다. 어릴 때 어렵게 자랐는데, 천재적인 자질로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갔었지. 나, 그 친구, 그리고…… 중천. 우린 도원결의를 맺은 촉의 삼형제를 흉내 내서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결의를 맺었느니라.”
중천?
아마도 사마중천일 것이다.
전대 성주와 가까운 사이인 것은 장천운도 알고 있었다.
사마경도 우문각을 숙부라 불렀다.
그런데 그 내면에 그토록 깊은 사연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우린 그분들처럼 믿음이 강하지 못했다. 그래서 상대를 원망하고, 형제의 우의에 금이 가는 짓을 서슴없이 했다. 나중에 후회했지만, 그때는 이미 지울 수 없는 금이 새겨진 후였어.”
우문각은 허공을 보며 나직이 말을 이어나갔다.
언젠가 가슴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해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왜 후회하는지.
“어느 날, 그 친구, 철산이 임무를 수행하러 가서 돌아오지 못했는데, 나는 그 일을 중천의 책임으로 돌렸다. 지나치게 어려운 임무를 맡겨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냈다고 말이다.”
철산.
장 씨 성을 가진 친구의 이름인가 보다.
같은 장 씨라서 그런가? 왠지 정감이 가는 이름이었다.
“너를 보면 바로 그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닮은 구석이 있거든. 얼굴보다 분위기가.”
“제가요?”
“너도 명월나녀도를 봤다고 했지?”
“예, 봤습니다.”
“내가 왜 그 그림을 애지중지했는지 이야기 해줬지?”
해줬다.
‘그럼 혹시, 그 친구의 부인이……?’
아니나 다를까 우문곡이 말했다.
“철산의 부인과 그 그림의 여인이 많이 닮았기 때문이니라.”
역시! 그럼 친구 때문인가? 아니면 친구의 부인 때문에?
“원래 철산의 부인은 나와 혼약이 오갔었다. 그런데 그녀는 나보다 철산을 사랑했지. 나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가도록 놔주었다.”
장천운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여인 때문인가요, 아니면 친구 때문인가요?”
우문각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허공을 응시했다.
“어느 날 밤에 친구가 우는 걸 봤다. 그렇게 강하던 친구가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울고 있었다. 사랑하지만 친구의 혼약을 깰 수는 없다면서…… 그래서 내가 먼저 그녀를 보내줬다. 한 사람 행복한 것보다…… 두 사람 행복한 것이 나으니까.”
그제야 장천운은 또 다른 사실 하나를 알 수 있었다.
우문각이 혼인을 하지 않은 이유를.
가슴이 울컥했다.
미안했다.
그것도 모르고 놀리기만 했다니.
“그럼 그 부인은 어디 계십니까?”
왜 물었는지도 몰랐다. 그냥 질문이 나왔다.
우문각이 시선을 내려서 장천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친구가 돌아오지 않자, 우리를 원망하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리고 일 년쯤 지나서 돌림병에 걸려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아…….”
“사실 너는 철산뿐만이 아니라 그녀도 많이 닮았다. 특히 눈매가.”
비령각을 나선 장천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나녀도와 친구부인이 닮고, 친구부인과 내가 닮았으면, 나녀도와 나도 닮아야 맞는 거 아닌가?’
전에는 빤히 바라볼 수가 없어서 대충 봤는데, 언제 한번 자세히 봐야할 것 같다.
* * *
어둑해질 무렵.
흑월대가 있는 무화원으로 들어간 백리우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와 달리 새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무슨 일이지? 너무 더워서 다 방에 있나?’
마침 경비무사가 지나가자 붙잡고 물어보았다.
“장 대주는 어디 있는가?”
날씨가 후덥지근한데도 경비무사는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대답했다.
얼굴도 굳어 있었는데, 꼭 못 볼 걸 본 사람 같았다.
“흑월대 쪽에 계십니다.”
기가 팍팍 든 목소리.
과연 구천성의 무사다운 태도였다.
“그래? 수고하게.”
백리우진은 경비무사의 각 잡힌 태도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도 흑월대 거처에 도착한 순간 밑동 빠진 탑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사람들이 처마 밑에 앉아 있었다.
바닥 닦고 대충 던져놓은 걸레처럼 늘어진 자세였다.
‘흥! 흑월대 하는 꼴이 경비무사만도 못하군.’
백리우진은 속으로 코웃음 치며 흑월대 무사들에게 다가갔다.
“장 대주는 어디 있나?”
수은귀가 손을 들더니 대충 안쪽을 가리켰다.
저기 있으니, 알아서 가보라는 듯 만사가 귀찮은 표정이었다.
아직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사람들도 교육에 참여했다.
강도는 덜했지만 죽을 맛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재활교육이라나?
팔을 다친 사람은 신법교육, 발이 다친 사람은 상체반사속도 단련, 정말 절묘하게 부상부위를 피해서 교육을 시켰다.
오늘 일의 주범인 막소광이 나이만 어리다면 죽도록 패버렸을 것이다.
하물며 백리우진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백리우진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쨌든 자신은 백천대의 대주.
장천운과 동급의 지위다.
그런데 조장도 아니고, 일개 흑월대 대원이 어디서 손가락질이야!
“뭐하는 행동인가? 입은 뒀다가 어디에 써먹으려고 그딴 태도야?”
발끈한 백리우진이 눈을 부라리며 다그치자, 스윽, 고개를 든 막소광이 짜증을 잔뜩 담아서 한소리 했다.
“씨바, 그럼 너도 한번 교육을 받아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