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361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78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361화
머리카락과 길게 늘어진 수염이 하얀 노인 하나가 한손에는 구불구불한 지팡이, 한 손에는 초롱불을 들고 있었다.
그 노인을 본 장천운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가늘게 떨리며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무…… 할아버지?”
뼈에 거죽만 붙었던 전보다는 살이 조금 찐 듯했다.
옷도 고급 비단옷은 아니지만 찢어진 촌노의 옷보다는 나았다.
전과 많이 달라진 모습.
그러나 아무리 달라졌다 한들 그가 어찌 무 노인을 알아보지 못할까.
“그 녀석, 나이만 먹었지 칠칠맞은 것은 여전하구나.”
갈퀴로 철판을 긁어대는 저 목소리!
역시나 무 할아버지다.
“어떻게…… 도대체…… 할아버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장천운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귀 안 먹었다, 이놈아.”
“동방 노인이…… 무 할아버지였어요? 파천회의 노사가 할아버지였어요? 예?”
“그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단 말이냐.”
“저 지금 말장난하고 싶은 마음 아니거든요?”
“무창의 흑도 꼬마가 조금 컸다고 할아버지에게 대들겠다는 거냐?”
“그게 아니라…… 정말 어떻게 된 거냐고요!”
장천운이 열댓 살 소년처럼 소리쳤다. 무 노인을 보니 까맣게 잊었던 과거의 투덜거림이 말투에서 그대로 묻어나왔다.
무 노인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걸음을 옮겼다.
툭, 툭, 툭.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땅을 찍을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장천운의 시선이 지팡이 쪽으로 옮겨갔다.
무 노인을 보면 가만 안 둘 거라고 다짐했었다. 단단히 따지고 들 작정이었다.
할아버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은 줄 아냐며, 왜 아무 말도 않고 사라졌냐며.
하지만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는 무 노인을 본 순간 모든 생각이 정지되었다.
뭐라고 따지기는커녕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저번에 다치셔서 그런 거예요?”
“살다 보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법이지.”
“대체 청산자, 그 늙은 말코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무 노인은 그 말이 무척이나 우습게 들렸다.
당금 천하에서 청산자에게 늙은 말코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주 오래된 악연이지, 그자와는…….”
“구천성과 무 할아버지는 무슨 관계죠?”
그 질문에 무 노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장천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글쎄다.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애매하구나.”
“애매할 거 뭐 있어요? 그냥 사실대로 말하세요. 그럼 제가 알아서 판단할 테니까요.”
장천운이 버럭 소리치며 무 노인을 재촉했다.
무 노인은 씁쓸함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장산은 장천운을 만나지 않으려 했다. 미안해서 도저히 마주할 용기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비밀로 묻어둘 수는 없었다.
진실을 알려주지 못하고 죽으면 천추의 한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이야 곧 죽어갈 늙은이일 뿐이고 그저 짧은 인연에 불과하지만, 장산과 장천운은 뗄 레야 뗄 수 없는 사이 아닌가.
그래서 장천운을 만나기로 작정했다.
당장 사실을 다 말해주지는 못한다 해도 무언가 언질 정도는 주는 게 좋을 듯싶었다.
아마 그 정도만으로도 장천운이라면 스스로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장천운이 성을 나와서 이전의 은신처로 들어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는 장산에게 알리지 않고 거처를 나섰다.
“나와 구천성 사이의 관계를 말하기 전에 먼저 너에게 해줄 말이 있다. 사실 내가 너와 만난 것은…….”
그때였다.
우르르릉.
토굴의 입구 위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여기 토굴 입구가 있습니다.”
목소리도 들렸다.
슬쩍 위를 쳐다본 무 노인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청산궁 놈들이 여길 찾아낸 모양이다. 일단 피하고 보자.”
그러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안쪽으로 걸어갔다.
장천운도 위를 쳐다본 후 횃불을 끄고 토굴 안쪽 통로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조심해라. 놈들이 안쪽에 있을지 모른다.”
냉랭한 소리가 들리더니 횃불 하나가 밑으로 떨어졌다.
장천운과 무 노인이 안쪽 통로로 사라진 후, 위에서 몇 사람이 차례대로 뛰어내렸다.
그 중 하나가 통로 안쪽을 보며 말했다.
“저 안쪽에서 빛이 보입니다. 놈들이 도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뒤늦게 내려온 자가 냉랭히 명령을 내렸다.
“쫓아라.”
통로의 또 다른 출구 밑에 도착한 장천운은 무 노인을 재촉했다.
“어서 올라가세요.”
무 노인은 장천운을 지그시 바라본 뒤 위로 몸을 날렸다.
그는 장천운을 걱정하지 않았다. 걱정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무 노인이 출구로 빠져나간 직후 통로 안쪽에서 청산궁 무사들이 나타났다.
장천운은 검을 빼들고 돌아섰다.
빠져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후였다. 저들은 무 노인의 흔적을 줄기차게 쫓을 것이다.
몸이 성치 않은 무 노인이 청산궁의 추적을 벗어날 수 있을까?
확신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저들이 자신을 알아본다면 상황이 곤란해진다.
‘여기서 잘라내야 돼.’
결심을 굳힌 그가 출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무 할아버지, 하나만 말씀해주세요. 전대 성주님의 시신을 할아버지의 사람들이 가져갔어요?”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예? 무슨 말이에요?”
무 노인은 진실을 말해줄 수 없었다.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상황이 급격하게 변할 터, 결국 천외가 구천성을 직접적으로 공격할 명분을 주게 된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청산궁 무사들이 바짝 따라붙었다.
“쳐라!”
그들은 장천운을 보자마자 공격을 시작했다.
통로가 좁아서 기껏해야 두 사람밖에 공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시하기에는 그들의 공격이 무척 날카로웠다.
쉬아아악!
장천운은 일단 달려드는 청산궁 무사들의 공격에 대응했다.
현월에서 폭사하듯 뻗어나간 검기가 피를 갈구하듯 청산궁 무사 둘을 휩쓸었다.
쩌저저정!
무기는 무기대로 튕겨나가고, 충격을 받은 무사 역시 뒤로 날아가서 동료의 가슴팍에 부딪쳤다.
뒤늦게 나타난 청의인이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자의 옆에 있던 자가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그에 대해 답하듯 말했다.
“설마…… 장천운?”
그 이름이 청산궁 무사들을 만근의 바위보다 더 무겁게 짓눌렀다.
자신들이 지옥의 사자를 쫓아왔다는 걸 깨달은 자들은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장천운은 대답 대신 앞으로 쇄도했다.
청산궁 무사들은 장천운이 공격하자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장천운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을 향해 현월을 뻗었다.
무공의 흔적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천뢰구검은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단 두 세 번의 공격에 무사 셋이 쓰러졌다.
마지막까지 대항하던 자도 일장을 얻어맞고 토벽에 반쯤 몸이 박혔다.
장천운은 그들의 죽음을 확인한 후 토굴을 빠져나갔다.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 노인도, 청산궁의 무사도.
‘어디로 가셨지?’
장천운은 지붕에서 지붕으로 옮겨 다니며 무 노인을 찾아보았다.
그가 청산궁 무사들을 쓰러뜨리는데 걸린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 노인은 보이지 않고, 무 노인을 찾아다니는 청산궁 무사들만 간간이 느껴졌다.
장천운은 무 노인과의 짧은 만남이 무척 아쉬웠지만 무턱대고 찾아다닐 수도 없었다.
자신을 찾아온 걸 보면 피할 마음은 없다는 뜻.
‘한번 만났으니 언젠가는 또 나타나겠지.’
* * *
“동방무기가 살았던 곳으로 의심되는 토굴을 발견했습니다. 청화령 아이들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모두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영산자로부터 보고를 받은 청산자는 이마를 찌푸렸다.
“끝까지 말썽이군. 인근의 집을 모두 뒤져봐라.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다.”
“구천성이 알면 귀찮아질 수 있습니다.”
“구천성에서 간섭하기 전에 찾아내라. 어차피 마지막 패를 뒤집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전에 제거해야만 해.”
동방무기는 목 안에 박힌 가시 같은 존재였다.
제거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후환이 될 가능성이 컸다.
“예, 사형.”
“곧 청무령과 청호령이 도착할 것이다. 그 아이들이 도착하면 금룡장도 본격적으로 움직일 게야.”
영산자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하오면……?”
“겨울이 오기 전에 마무리 지을 생각이다. 탁무겸도 노도와 금룡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이곳으로 올 거다.”
청산자는 담담히 말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고요히 가라앉아 있던 눈빛에서 광채가 번뜩였다.
하지만 영산자는 담담할 수가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이런 기분이 든 것은.
‘무량수불, 정말 사형의 뜻에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일까?’
청산자는 그에게 신이나 다름없었다. 거역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해보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려야 한단 말인가.
누구를 위해서?
혼란스러워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산.”
청산자가 일어선 그를 불렀다.
“예, 사형.”
“정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한 법이니라.”
영산자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났다.
아마도 자신의 흔들림을 눈치 챘나보다.
사형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분이다. 신과 같은 존재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영산자는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한 후 방을 나섰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더욱 심란해졌다.
‘원시천존, 단순히 즐기기 위해서 하는 내기가 아니기만 바랄 뿐입니다.’
* * *
장천운은 무 노인과의 만남을 사마경에게 말하지 않았다.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 노인이 전대 성주의 시신을 가져간 사람 아닌가.
사마경의 편만 들어줄 수도, 무 노인의 편만 들어줄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건 무슨 말이지?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니…….’
뭔가 또 다른 비밀이 있는 듯했다. 그게 뭔지 알 수 없다는 게 답답하기만 했다.
‘후우, 다음에 만나면 확실하게 물어봐야겠어.’
구천오대는 구천삼대가 되었다.
천기등은 환영했다. 직급도 그대로였고, 책임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으니까.
명호산도 인원에 변동이 없어서 별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아청곽은 불만이 많았다.
전검대와 금호대는 인원이 처음 그대로이거나 많아졌는데 선풍대만 여전히 반쪽이었다.
나머지 인원들은 모두 오단팔당으로 배치되었다. 그것도 대부분 소성주를 따르는 조직에 집중되었다.
이제는 외형적으로도 대령주와 대장로의 세력에 비해서 크게 밀리지 않았다.
전격적인 구천오대 개편에 공손백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상황이 한번 틀어지기 시작하더니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더 화가 나는 것은 당장 어떻게 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마경에게는 장천운 뿐만 아니라 이왕과 환마, 천한마검에 복우쌍노까지 있었다. 일 년 전과는 천양지차였다.
악다문 잇새로 분노가 새어나왔다.
“대장로만 적극적으로 나서줘도 어떻게 해볼 수 있을 텐데…….”
최근 들어 나극은 외부로 거의 나서지 않았다. 그 바람에 곤란해진 것은 자신이었다.
“방법을 찾아야 해.”
공손백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던 동백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군, 암천문의 힘을 빌리면 어떻겠습니까?”
공손백이 치켜뜬 눈으로 동백을 노려보았다. 쭉 찢어져서 역팔자로 올라간 두 눈에서 불길이 일렁였다.
“본좌에게 다시 탁무겸 밑으로 기어들어가란 말이냐?”
“속하가 어찌 주군께 그런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다만 아직은 이용할 가치가 있다는 말씀이지요.”
공손백의 눈에서 일렁거리던 분노의 불길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이용할 가치가 있단 말이지?”
“암천문도 청산궁과 금룡장을 홀로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무림맹과 파천회가 날뛰고 있으니 주군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할 것입니다.”
“으으음…….”
침음을 흘린 공손백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가 순순히 받아들일 거라고 보느냐?”
“허락하신다면 속하가 나서보겠습니다. 새로 옮긴 총단의 위치는 알지 못해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공손백은 지그시 동백을 바라보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가 탁무겸을 만나봐라.”
“예, 주군.”
포권을 취하며 깊숙이 고개를 숙인 동백의 두 눈이 얼음구슬처럼 새하얗게 번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