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3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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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82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354화
* * *
밤이 되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전형적인 초가을의 시원한 날씨.
반쪽 달이 뿌연 달무리에 갇혀서 아등바등 서쪽으로 기어가는 시각.
일단의 흑의를 입은 무사들이 십여 명씩 짝을 지어서 골목을 누볐다.
그때부터 구천성 동문 쪽 외곽에서 칼바람이 섬뜩한 춤을 추었다.
어둠처럼 짙은 흑색 무복을 입은 무사들은 철저히 쪽빛 무복을 입은 자들만 공격했다.
칼바람이 오싹하게 흘렀다.
달빛을 받은 검광 도광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살이 갈라지고 시커먼 핏줄기가 뿜어졌다.
비명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컥!”
“크윽!”
기껏해야 단말마가 가끔씩 어둠에 송곳처럼 꽂힐 뿐.
쫓고 쫓기는 추적과 소리가 죽은 격전은 한 동안 쉬지 않고 이어졌다.
밤이 깊어갈수록 구천성 외곽의 여기저기서 흐르는 비릿한 피 냄새가 짙어졌다.
공손백은 동문 쪽 왕가객잔 삼층에서 어둠에 잠긴 거리를 내다보았다. 혈향이 흐르는 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삼십여 명을 처리했습니다만, 저희 쪽도 그 이상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뒤에서 나직한 보고가 들려왔다.
공손백의 이마에 주름이 파였다.
자신이 직접 나설 수는 없었다. 그럴 마음도 없었고.
그래서 사냥개로 비영곡 무사들을 풀었다. 암천문의 능력을 이용해서 키운 그들이라면 청산궁의 정예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처음에만 해도 예상대로 진행되었다. 기습에 가까운 공격으로 적을 쳤을 때만 해도.
하지만 청산궁이 전열을 갖추면서 싸움은 팽팽하게 흘렀다.
그 바람에 비영곡 무사들의 피해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할 수 없군. 동백, 일단 후퇴시켜라.”
뒤에 서있던 동백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들고는 방을 나섰다.
공손백은 동백이 방을 나가고도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청산궁 무사들과의 싸움은 형식에 불과했다.
자신이 청산궁을 공격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 와중에 공을 세울 수 있다면 금상첨화고.
탁무겸은 자존심이 세서 명분 없이는 자신에게 벌을 내리지 못한다.
당장은 피해가 크지만, 탁무겸을 막을 명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탁무겸, 최후에 웃는 자가 승자라 했다. 어디 누가 웃는지 보자.’
* * *
쉬이익!
서걱!
어둠을 가르고 날아간 칼날이 상대의 한쪽 팔을 베어냈다.
비틀거리는 자의 팔에서 피분수가 뿜어졌다.
칼을 휘두른 자는 지체하지 않고 상대의 목을 쳤다.
피하지도 못하고 머리가 떨어져나가기 직전!
떠덩!
칼을 휘두른 자가 둔탁한 굉음과 함께 훌훌 날아갔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자의 앞에 한 사람이 내려섰다.
작은 키에 도복을 입고 어둠 속에서도 하얀 수염을 휘날리는 노인, 청산자였다.
멋모르고 그를 향해 두 사람이 달려들었다.
그들이 휘두르는 검과 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청산자의 상하를 노렸다.
청산자는 파리를 쫓듯 손을 휘둘렀다.
단지 그 뿐이었는데, 달려들던 자들이 벽에 부딪친 것처럼 뒤로 튕겨나갔다.
반면 청산자는 흔들림조차 없이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서 두 손만 휘둘렀다.
그때마다 주위에 있던 흑의무복 무사들이 몽둥이에 얻어맞은 듯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날아갔다.
순식간에 대여섯 명이 쓰러졌을 때였다.
삐이이이익!
날카로운 소성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 직후 흑의무복을 입은 자들 속에서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후퇴해!”
흑의무복을 입은 무사들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뒤로 몸을 날렸다.
퍼벅! 콰당!
몸을 날렸던 자들 중 서너 명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서 벽에 처박히고 널브러졌다.
청산자는 그들을 보지도 않고 우측을 향해 손을 뻗더니 움켜쥐었다.
와직!
“끄억!”
이 장 거리까지 멀어졌던 자의 목이 으스러지며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어지간한 자들이라면 공포부터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흑의무사들은 조금도 표정변화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청산자가 나타나면서 상황이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패색이 짙었던 승부도 역전되어서 이제는 비영곡 무사들이 더 많이 쓰러져 있었다.
청산자는 도주하는 자들을 쫓지 않았다.
쓰레기 같은 자들을 몇 더 제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효곽, 아이들의 부상부터 살펴봐라.”
“예, 진인.”
중년으로 보이는 무사가 수하들을 시켜서 부상자들의 상처를 지혈했다.
부상자 중에는 이십 대의 젊은 무사도 있었고, 사십대의 중년 무사도 있었다.
청산자는 현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찌푸린 얼굴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때 영산자가 그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공손백이 거느린 자들 같습니다.”
“공손백?”
“예, 사형. 놈이 암천문 쪽과 연관된 살귀들을 키웠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들을 움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놈이 왜 갑자기 우리를 공격했을 거라 보느냐?”
“사마경이 명령을 내린 것 아니겠습니까?”
“공손백이 언제부터 사마경의 명령을 받았다고?”
“저도 그게 의문이긴 합니다만…….”
“뭔가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다. 우리를 공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이유를 알아봐라.”
“예, 사형.”
청산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분노의 감정을 다스렸다.
‘탁무겸이 놈을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공손백에게 청산궁을 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하늘 아래 몇 없다.
형식적이긴 하지만 사마경이 그 중 하나. 그리고 또 다른 하나를 꼽으라면 탁무경이 있었다.
그는 두 번째인 탁무겸을 원흉으로 지목했다.
‘공손백을 이용해서 본 궁의 힘을 약화시킬 생각이었더냐? 아니면 본 궁과 구천성의 전면전을 유도하려 했느냐? 만약 그런 생각이었다면 너는 한참 잘못 생각했다, 탁무겸.’
수염 속에 가려진 청산자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말려 올라갔다.
‘너는 먹이와 적의 다른 점을 모르는구나.’
그 사이 영산자가 다가왔다.
“다친 아이들을 대충 추슬렀습니다, 사형.”
청산자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가자, 아무래도 내일부터는 바빠질 것 같다.”
영산자는 묵묵히 그의 말을 따랐다.
오래 전에 그와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다음 날, 호북의 무림문파 중 하나가 오백 무사와 함께 혈해에 잠겼었다.
‘사형께서 살기를 일으키셨구나. 그러지 않기만 바랐거늘.’
영산자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아렸다.
어찌되었든 청산궁은 정파 쪽에 한발을 걸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전과 같은 혈겁을 일으킨다면 정파 역시 자신들을 적으로 대할지 모른다.
그 당시에는 강호인 대부분이 청산궁의 존재에 대해 몰랐지만, 이제는 천하 모두가 청산궁은 물론 천외의 존재마저 알고 있는 것이다.
‘사마경을 만나봐야 하나?’
하다못해 장천운이라도?
영산자는 부상당한 수하들을 데리고 격전장을 떠나면서 장천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기분만 상했다.
‘무량수불, 그 놈의 얼굴을 생각하니 짜증만 나는군.’
영산자에게 장천운은 이제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앞서 가던 청산자가 말했다.
“사마경을 만나서 강하게 항의해라. 갈 때 많은 사람을 이끌고 가서 시선을 끌어라. 노도는 그 사이 금룡신군을 만나볼 것이니라.”
“예…… 사형.”
* * *
장천운과 사마경도 외곽에서 벌어지는 싸움 소식을 비령각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전해 듣고 있었다.
그러다 청산자가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장천운이 씩 웃었다.
“그 영감이 다급했나 보군요.”
그때부터는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청산자가 나선 이상 오늘 밤의 한바탕 난전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사마경도 같은 생각인 듯 긴장했던 표정이 풀어져 있었다.
“천운, 저들이 어떻게 나올 것 같아? 피해가 커서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마 소성주께 강한 항의를 해올 겁니다. 협상을 어겼다면서요.”
“대령주가 독자적으로 한 일이라고 우길까?”
“아뇨, 그럼 대령주를 내놓으라고 하면서 본 성을 몰아붙일 명분이 생깁니다.”
그럴 경우 공손백을 내줄 수도 없으니 난감해질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잘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십시오.”
사마경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장천운을 흘겨보았다.
“그 말이 먹힐 거라고 생각해?”
“저들도 어느 한계 이상은 몰아붙이지 못할 겁니다. 대령주 측도 피해가 큰 상황이니까요. 게다가 본 성의 앞마당에서 설치고 다닌 것은 그들 아닙니까?”
“하긴, 그것도 그러네. 우리가 그냥 놔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그리고 오늘 일에 대해 조사를 해본다면서 시간을 끄는 것도 좋겠지요.”
“그럼 열 좀 받겠는데?”
“열 받아봐야 별 수 있겠습니까.”
“흠, 저들이 협상을 깨겠다고 하면?”
“그러라고 하십시오. 하지만 협상이 깨져봐야 자신들에게도 좋을 것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니, 그렇게까지는 나오지 못할 겁니다.”
영산자가 스무 명이나 되는 청산궁 무사들을 대동하고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이 각쯤 지났을 때였다.
“소성주, 영산진인이 찾아오셨습니다.”
밖에서 사공명신이 말했다.
장천운의 말대로 항의하기 위해 온 것이 분명했다.
장천운을 흘겨보며 피식 웃은 사마경이 도도하게 표정을 정리하고 명했다.
“안으로 모셔.”
영산자는 처음부터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듯 강한 어조로 밀어붙였다.
“협정을 무시하고 본 궁을 공격하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소성주!”
“무슨 말이죠? 누가 누굴 공격했다는 거죠?”
사마경은 장천운이 말해준 대로 태연하게 대응했다.
“설마 대령주가 우릴 공격한 걸 모른단 말이오?”
“모르니까 묻는 거잖아요?”
영산자는 잔뜩 화가 나서 머리가 뜨거워졌지만 강하게 밀어붙이지도 못했다.
게다가 ‘대령주가 언제 제 말 듣는 거 봤어요?’라고 말하자, 마땅하게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사마경은 마지막 공격으로 말을 마무리했다. 아주 담담하게.
“사실 대령주를 상대하기 위해서 협정을 맺었는데…… 아무래도 제가 청산궁의 힘을 너무 믿었나 봐요.”
영산자는 가슴이 뜨끔했다.
“급습을 당하는 바람에 피해가 커진 것뿐…….”
“비록 우리 구천성이 욕을 먹겠지만, 잘못했다면 책임을 져야죠. 언제든 협상을 깨고 싶으면 말하세요.”
“무량수불, 사소한 일로 오락가락할 협상이라면 왜 한단 말이오.”
“옳으신 말씀이에요.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진인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힘이 솟네요.”
영산자는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도 뻥끗할 수 없었다.
“허허허, 노도의 말에 힘이 솟는다 하니 다행이오.”
입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은 도둑놈가시가 위장에 가득 달라붙은 듯해서 무척 쓰렸다.
‘끄응, 내 이래서 올까 말까 고민했는데…….’
* * *
“오랜만에 보는구먼.”
금룡신군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운을 뗐다.
그의 앞에는 청산자가 앉아 있었다. 담담하게 웃는 모습과 달리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금룡장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을 것 같더니, 다시 나왔군 그래.”
“일단 내기부터 마무리 짓는 게 나을 것 같더군.”
“우곤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네. 자네가 무척 아꼈던 아이인데, 안 됐어.”
금룡신군은 말없이 찻잔을 집어 들었다.
손우곤이 죽은 지 언젠데…….
자신의 속을 뒤집어놓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 정도에 흔들릴 그가 아니었다.
“청산궁도 자네가 아끼던 용환종이 죽었지 아마? 게다가 도하도 중상을 입었다 하더군. 피차 아픔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담담히 말을 건넨 금룡신군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 맛이 조금 전보다는 나은 듯했다.
청산자도 찻잔을 잡아서 입으로 가져갔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찻잔을 내려놓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말은 청산자가 먼저 꺼냈다.
“그래서 말이네만…… 한 가지 제의할 것이 있네.”
“제의라…… 허허허허, 자네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구먼.”
“살다 보면 달라질 수도 있는 법이라네. 장자나 공자라 해서 어디 한 번도 마음이 안 변했겠는가?”
“확실히 도를 닦은 사람은 다르군. 그래, 어디 말해보게. 무슨 제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