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38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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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85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388화
공기가 얼어붙은 듯했다.
딴청을 피우는 자, 콧등을 씰룩이며 불만을 삭이는 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눈치만 봤다.
‘이길 자신이 있으면 나서라! 이기면 모든 것을 넘겨주겠다!’ 그 말이다.
전이었다면 최소 서너 명은 나섰을지 몰랐다.
하지만 청산자와 탁무겸의 가공할 무위를 접해본 지금은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마주서는 것조차 공포였다.
공손백과 나극, 패왕, 환마 등 절대경지의 고수들이 합공을 하고도 어쩌지 못했거늘, 누가 감히 나설 수 있단 말인가.
사마경은 냉랭한 어조로 말을 맺고 장내를 둘러보았다.
나극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듯 태연했다.
공손백도 나름 태연한 신색이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입을 닫고 있기도 어정쩡한 상황. 그는 빈 말로라도 사마경을 위로했다.
“우리가 어찌 소성주의 고뇌를 모르겠소? 돌아가는 상황이 답답해서 나온 말일 뿐이니 이해하시구려.”
사마경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다른 때였다면 겸양의 말이라도 몇 마디 했겠지만, 오늘은 그런 말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요. 그렇다면 당분간 제가 계속 지휘하도록 하겠어요. 그 일에 대해서 또 하실 말씀이 있으신 분은 다음 회의 때 해주시기 바라겠어요.”
결론을 내리듯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형의 기운이 그녀를 중심으로 너울처럼 퍼졌다.
마치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문제는 그 기운의 위세였다.
구천성 간부들은 그녀를 새삼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성주가 저렇게 강했던가? 그런 표정.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금 전 그들이 느낀 것은 분명 절대경지의 기운이었다.
회의를 마친 사마경은 지친 몸을 이끌고 구천무원으로 돌아왔다.
우문각이 그녀를 따라서 방으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은 사마경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눈을 들었다.
“오늘은 무사히 넘어갔지만,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버티기 힘들어져요.”
“너무 걱정하실 것 없소. 이제는 간부 중 육 할이 소성주를 따르고 있소이다. 대령주와 대장로가 힘을 합한다 해도 소성주를 어쩌지 못하오.”
“그건 저도 알아요. 문제는 대령주가 칼을 거꾸로 잡았을 때죠. 그리 되면 겨우 마음을 돌렸던 간부들이 살기 위해서 다시 저쪽으로 붙을 수 있어요.”
우문각도 그 일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당장 공손백을 죽일 수 없는 한은.
그리 안 되기만 바라는 수밖에.
그런데 사마경이 미간을 좁히더니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총사, 황군을 움직이면 어떻겠어요?”
“황군?”
“황군이 저들의 움직임을 방해하기만 해도 적잖은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말이죠.”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우문각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림과 황궁이 소 닭 보듯 하는 사이긴 하나, 구천성 정도의 거대세력을 유지하다 보면 황군과도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는 법이다.
평상시라면 지탄받을 결정이었다. 강호의 놀림거리가 될 테니까.
아마 벌떼처럼 왱왱거리며 사마경을 향해 손가락질 할 것이다.
그래서 우문각도 그쪽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에서는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묘책이 될 수도 있었다.
더구나 황군과 함께 싸우는 것이 아닌, 적을 견제하는 정도라면…….
“좋은 생각이오. 내 즉시 신양의 도지휘사에게 전령을 보내서 협조를 요청하겠소.”
“비밀리에 처리하셔야 해요.”
“걱정 마시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을 거요.”
황군도 구천성에서 벌어진 전쟁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무사들이 죽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천자의 신하이기 전에 무림이라는 또 다른 세상에 사는 자들 아닌가.
황군은 오직 양민의 안전만 신경 썼다.
힘없는 양민이 떼죽음을 당하면 천하가 뒤숭숭해지는 법. 그 일을 막지 못하면 반대당파로부터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문각이 전령을 파견한지 닷새 후, 신양의 황군이 양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관리와 함께 구천성 외곽 마을로 진입했다.
“황상의 명이다! 앞으로 이곳에서 양민을 함부로 살해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
황군의 일성은 일대에 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탁무겸과 청산자는 아차 했다.
황군의 숫자야 이삼천에 불과했다. 고수 몇 십 명만 보내도 쓸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제아무리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해도 황군과 맞설 수는 없었다.
“교활한 계집이 잔머리를 굴렸어. 강호의 규칙을 깨고 황군을 움직이다니.”
청산자는 시간을 끈 걸 후회했다.
피해를 보더라도 끝까지 밀어붙였다면 지금쯤 구천성을 무너뜨렸을 텐데.
반면 탁무겸은 대소를 터트렸다.
“와하하하! 정말 대단한 계집이야. 청산자 늙은 말코의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보이는 것 같군. 그래서 밟아야 할 때는 철저히 밟아야 하거늘, 잘난 척하다가 한방 맞았어.”
도악은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다.
탑을 쌓을 때 한 푼 어긋난 것을 그냥 놔두면 나중에는 한 자 어긋나서 탑이 무너지고 마는 법이다.
기분이 찜찜하고 왠지 불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주인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그 계집이 문제야.’
145장 그 내기, 나도 끼겠어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컴컴한 어둠뿐이었다.
자신의 눈에 이상이 생겼나?
아니면 죽어서 저승에 온 것인가?
아직 눈을 뜨지 못한 건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고개도 돌릴 수 없었다.
정말 저승일까?
만약 자신이 진짜로 죽었다면 사마경이 슬퍼할지 모르는데…… 아니 원망할지도…… 왜 허락도 없이 죽었냐면서…….
엉뚱한 생각이 드는가 싶더니 정신이 다시 아득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도 컴컴했다. 희미한 빛이 있긴 했지만 그 빛만으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죽었나 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탁탁 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환해졌다.
누군가가 불을 피운 듯했다.
그 후 들리는 목소리.
“어? 눈을 뜬 것 같네?”
장천운은 눈알을 굴려서 목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움직일 수 없다 보니 가자미눈이 되었다.
그가 희미하게 보였다. 적상천이.
그는 품에 뭔가를 잔뜩 들고 있었다.
‘여긴 어디요?’
장천운은 그렇게 물으려 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목구멍 안에서만 맴돌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것 외에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르신! 장 공자가 깨어났습니다!”
적상천이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곧 단목화종과 장철산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눈은 격동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드디어 깨어났군.”
단목화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려 했지만 격동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어쨌든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놈 아닌가 말이다.
장철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창백한 얼굴, 움푹 들어간 눈에서 수많은 감정이 오갔다.
“서둘지 말고 천천히 진기를 움직여서 몸을 살펴봐라.”
장천운은 단목화종의 말대로 진기를 움직여보았다.
전과 달리 그의 몸속에서 움직이는 진기는 실개울처럼 가늘고 약했다.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래, 탁무겸과 대판 싸웠지.’
거의 정신을 잃다시피 한 상태에서 그와 맞섰다.
그러고 보면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사나흘 운기를 하면 예전의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거다.”
단목화종이 그의 상태를 말해주었다.
장천운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아직은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때 적상천이 그의 궁금증을 하나 풀어주었다.
“근 한 달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수. 어쨌든 정신이 돌아왔으니 정말 다행이오.”
단목화종이 한마디 더 보탰다.
“그 동안 저놈이 네 수발을 다 들었다. 네가 싼 똥도 치우고…….”
적상천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 * *
하루가 지나자 말문이 터졌다. 진기도 어느 정도 원활하게 움직여졌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운기를 하느라 대화할 겨를이 없었다.
이틀째에는 절반 정도의 진기를 되찾았다. 한 달 동안 정신을 잃어서 체력적인 면은 약했지만, 그 외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어본 것은 그때쯤이었다.
적상천은 그를 어떻게 구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어찌나 자세하게 설명하는지 새삼 그를 다시 보아야만 했다.
‘겉보기보다 꼼꼼한 면이 있군.’
사실 그 성격 때문에 그를 구한 것이기도 했다.
“구천성은 지금 어떻습니까?”
마침내 장천운이 무거운 돌을 덜어내듯 질문을 던졌다.
적상천이 머뭇거리더니 솔직하게 말했다.
“전력을 다해서 청산궁과 암천문의 공격을 겨우겨우 막아내긴 했는데,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는 말이 많소.”
장천운은 눈을 치켜떴다.
“청산궁과 암천문이 구천성을 공격했소?”
“벌써 한 달도 넘게 지났소. 장형이 쓰러진 다음 날 새벽에 첫 공격을 시작했으니까. 그 후 서너 번 크고 작은 공격이 있었소.”
장천운은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때 밀실 안으로 장철산이 들어왔다. 그가 장천운 앞에 모습을 보인 것은 정신을 차린 후 처음이었다.
“아직 가면 안 되네.”
“가봐야 합니다. 사람들이 저를 기다릴 겁니다.”
“나도 아네. 하지만 지금은 가봐야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네.”
장천운도 모르지 않았다. 지금 그의 상태는 절정고수 하나도 제대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도움은 되겠지만, 탁무겸이나 청산자를 만나면 죽기 십상이었다.
그래도 가야 했다.
자신은 소성주의 호위무사 아닌가.
죽더라도 그녀를 지키다가 죽어야 했다.
“죄송하지만 죽더라도 가봐야 합니다.”
“흥! 그놈의 고집은…….”
단목화종이 들어오며 코웃음 쳤다.
“죄송합니다.”
“겨우 살려놨더니 또 죽으러 가겠다고? 이 늙은이가 죽으러 가라고 공력까지 포기해가며 너를 치료한 줄 아느냐?”
“예?”
무슨 소리지? 공력을 포기했다니.
그제야 장천운은 단목화종이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회색빛 머리카락은 완전히 백발이 되었고, 얼굴의 주름이 그때보다 배는 더 많았다.
그뿐 아니라, 진짜 촌노처럼 허리도 왠지 구부정하게 보였다.
설마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서 공력을 포기했다는 게 사실이란 말인가?
격체전력으로 공력을 전하는 방법이 있다는 말을 듣긴 했다. 대신 공력을 전한 사람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고 했다.
저 모습이 격체전력으로 자신을 치료했기 때문일까?
그런데 왜? 자신과 그럴 정도의 사이도 아니거늘.
“그렇게 볼 것 없다. 그래도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그럼 정말로…….”
“안 그랬으면 치료하는데 서너 달은 걸렸을 거다. 시간을 두어 달 줄이기 위해서 이 늙은이의 공력이 쓰인 거지. 그런데 하루 이틀도 더 못 기다리겠다는 거냐?”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서 저를 치료하신 겁니까?”
“흥! 네놈이 좋아서 그런 줄 아느냐? 청산자나 탁무겸을 상대할 놈이 네놈밖에 없으니까 그런 거지.”
거짓말이었다. 장철산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게 해서 한 거짓말.
하지만 지금은 가장 그럴 듯한 대꾸이기도 했다. 절반 정도는 사실이었고.
장천운도 그 말을 듣고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단목화종의 말대로, 청산자나 탁무겸을 일대일로 상대할 사람은 천하에 자신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들으면 과대망상이라며 비웃을지 몰라도 사실이 그러했다.
밖으로 나가면 저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될 터. 그러면 전력을 다해서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다.
전격적인 공격의 시기가 자신 때문에 빨라질 수도 있단 말이다.
“죄송합니다, 미처 몰랐습니다.”
“사나흘만 더 요상을 하고 나가라. 그때는 말리지 않을 테니까. 대신 상천을 시켜서 밖의 소식을 전해주마.”
그 정도라면 기다리지 못할 것도 없다.
“예, 어르신.”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던 장철산이 몸을 돌려서 밀실을 나가려 했다.
그가 막 입구를 통과할 즈음, 장천운이 불렀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장 대협.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