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38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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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96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387화
바짝 엎드린 도악이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예, 주군.”
암천문의 전대 주인이 뇌옥을 벗어났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결국 그 동안 나를 속인 것이었군.”
탁무겸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나직이 읊조렸다.
“장철산이 나타난 것만 해도 짜증이 나거늘, 그 늙은이마저 사라지다니…….”
그런데 분노를 씹던 그가 눈을 번뜩 치켜떴다. 한껏 치켜떠진 그의 눈이 거센 진동을 일으켰다.
“설마……?”
장철산을 신경 쓰다 보니 또 다른 사실을 하나 간과했다.
“그 늙은이…….”
“예?”
“그 늙은이였어. 빌어먹을! 장철산을 구해간 늙은이, 그 늙은이가 사부였어!”
아무리 모습이 달라졌다 해도 수십 년 간 봐온 사부 아닌가.
자신이 다른 사람도 아닌 사부를 코앞에 두고도 몰라보다니.
지금쯤 장철산을 구해서 수백 리 밖으로 도주했을 터.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불같이 솟구쳤다.
“도악! 귀살단을 풀어서 사부와 장철산을 찾아라. 그리고 뇌옥의 위사들을 모조리 늑대 밥으로 던져주라고 해!”
“예, 주군. 놈들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늑대 밥이 되어도 감히 주군을 원망하지 못할 것입니다.”
도악은 모든 잘못을 위사에게 뒤집어씌웠다. 그것만이 자신이 살 길이었다.
“그리고 귀명곡에는 경비무사만 남겨두고 문도들을 이곳으로 집결시켜라. 올해가 가기 전에 구천성을 본좌의 발아래에 무릎 꿇리고, 천하를 도모할 것이다.”
* * *
전 강호가 숨을 죽였다.
마침내 구천성과 천외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양측의 사상자가 삼천 명에 달했다. 사소한 부상자까지 합하면 오천 명은 될 것이다.
강호 세력 간의 싸움으로는 지난 백 년 이래 가장 컸다.
무림맹은 맹주의 죽음을 핑계로 조용히 웅크려서 정보만 수집했다.
파천회도 언제든 뛰어들 수 있도록 힘을 집결시킨 채 전쟁의 흐름을 주시했다.
그 사이 구천성과 천외 사이에 크고 작은 싸움이 몇 차례 더 벌어졌다.
그 결과 이천이 넘는 인원이 더 죽거나 다쳤다.
구천성 일대는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강호의 말 많은 자들 중에는 구천성이 무너질 시기를 놓고 내기를 벌이는 자들조차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자들이 올해 안에 구천성이 무너질 것이라는 쪽에 돈을 걸었다.
그렇게 구천성의 하늘과 땅이 얼어붙어 있는 동안, 흑월대와 흑영대는 어떤 싸움에도 관여하지 않고 철저히 사마경만 보호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한바탕 전투를 치른 후에는 더더욱 호위를 강화했다.
청산궁과 암천문만이 아니라 공손백조차 언제 적으로 변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날도 사공명신은 호위임무를 마치고 무화원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단승이 그를 찾아왔다.
“사공 형, 이야기 좀 하지?”
“뭔데 그러나?”
“이제 우리도 두 소저에 대해서 좀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왜 하필이면 지금인가?”
“지금 하지 않으면 할 기회도 없을지 모르니까.”
사공명신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첫 번째 싸움에서 흑월대원 중 다섯 명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개중에는 여무사인 홍산산도 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다. 하지만 하늘은 그녀의 삶을 더 허락하지 않았다.
문등천이 몸을 던져가며 그녀를 구하려 했지만, 암천문 십이암귀의 살수를 피하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죽고, 문등천은 팔이 하나 뜯겨져 나가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그들 외에도 임주상과 이공진이 죽음을 당했고, 유각은 손가락 두 개가 잘려서 더 이상 쾌도를 펼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다음에 또 싸움이 벌어지면 언제 누가 죽을지 모르는 상황.
사공명신이나 단승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어떻게 정리했으면 좋겠나?”
“무사가 비무 말고 뭘 하겠어?”
“하긴. 그럼 조용한 곳으로 가세.”
그때였다.
“조용한 곳으로 가서 뭘 하게요?”
낭랑한 목소리. 두양양이었다.
당황한 단승과 사공명신은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다.
“별 것 아니오, 두 소저.”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 좀 나눠보려고 그러는 거요.”
하지만 두양양은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영리했고, 눈치도 빨랐다.
“혹시라도 나 때문이라면 할 필요 없어요.”
“…….”
두 사람은 두양양의 시선을 피하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무공이 강한 사람이 아니에요.”
두양양의 말에 사공명신이 반사적으로 반박했다.
“하지만 두 소저는 장 대주를…….”
“꼭 무공이 강해서 그를 좋아한 것만은 아니에요.”
“그럼……?”
사공명신 뿐만 아니라 단승도 눈을 깜박이지 않고 두양양의 입술을 응시했다.
“그는 강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외로운 사람이었죠. 저는 그 사람이라면 저의 외로움을 채워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두 소저의 외로움을 내가 채워주겠소.”
“나도 할 수 있소이다.”
“말씀만으로도 고마워요. 하지만 당장 어떤 대답을 드릴 수는 없어요. 이번 전쟁의 종착지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대답은 그 후에 할 게요.”
두양양이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사공명신과 단승의 얼굴이 밝아졌다.
장천운만을 향해 있던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자신들 쪽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 날을 기다리겠소, 두 소저.”
“그날까지 두 소저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소.”
말재주는 단승이 한발 앞섰다.
두양양은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하지만 두어 걸음 걷다가 멈추고는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요. 덕분에 이제는 외로움을 많이 떨쳤어요. 끝까지 살아난다면 이곳에서의 생활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사공명신과 단승은 두양양이 사라질 때까지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두양양이 건물을 돌아간 후에야 고개를 돌려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야. 그렇지?”
“그래서 절대 놓치지 않을 생각이네.”
“어때, 단승? 오늘 미리 결정지어 놓는 게.”
“그거 좋지.”
그들도 어쩔 수 없는 남자들이었다. 아름다운 여인을 놓고 다투는 수컷들.
아마 두 번째 방해자만 없었어도 그날 두 사람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승부를 겨루었을 것이다.
“쯔쯔쯔쯔, 꼭 까투리 앞에서 꼬리 흔드는 꿩 새끼 같군.”
남사명이 언제 나타났는지 두 사람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더니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칼 들고 싸우다 다치지 말고, 다른 방식으로 겨루어봐라.”
“예?”
“어떤 방식으로 말입니까?”
“내가 주는 약을 먹고 오래 버티는 놈이 이기는 거지. 어떠냐?”
독왕의 말이다. 보나마나 약이라는 것이 독약일 터.
게다가 언젠가 장천운이 독왕과 독 먹기 내기를 벌였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지 않던가.
두 사람의 표정이 어색하게 구겨졌다.
“하하, 그 대결은 나중에 하지요. 제가 좀 바쁜 일이 있어서…….”
사공명신이 얼버무리며 슬쩍 몸을 돌렸다.
단승도 깜박 잊은 일이 있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교대하기 전에 할 일이 있는데…….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남 노선배님.”
두 사람이 후다닥 자리를 피하자, 남사명은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네놈들은 그래서 안 돼. 아마 장천운이었다면 노부의 뜻을 눈치 채고 먼저 내놓으라고 했을 거다.”
그가 주려는 약은 분명 독이었다. 그러나 몸에 좋은 독이었다. 약간의 고통만 이겨내면 공력이 맑아지는 기가 막히게 좋은 영약.
“할 수 없군, 다음에 줘야지. 천운이란 놈이 없는 데도 약속을 지키는 게 기특해서 큰맘 먹고 주려했더니…….”
그런데 이 자식은 정말 죽었나? 왜 소식이 없어?
* * *
구천성에서는 연일 회의가 열렸다.
무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간부들이 칼을 거꾸로 들지 않도록 단속해야 했다.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구천대전에 오십 명이 넘는 고위간부들이 모였다.
만근 바위를 머리에 이고 있는 듯 묵직한 분위기가 구천대전을 짓눌렀다.
보름 전과 비교했을 때, 간부 중 삼분지 일 가까이 보이지 않았다.
그 중에는 죽은 사람도 있었고, 중상을 입어서 거동할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침중하게 굳은 얼굴로 상석을 바라보았다.
회의에 참석하긴 했으나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소성주, 특별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필패의 형국이오. 생각해놓으신 대책이라도 있소?”
철혈단주 위지행이 사마경을 은근히 몰아붙였다.
사마경은 차디찬 눈빛으로 그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당장은 없어요.”
“허, 본 성이 최대 위기에 처해 있는데 대책도 없다니…… 당분간만이라도 경험이 많은 분께 지휘를 맡기시는 게 어떻겠소이까?”
구천대전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그의 말뜻을 간파했다. 육선기가 발끈해서 한마디 쏘아붙였다.
“무슨 말이오? 지금 소성주께 지휘권을 내려놓으라 하시는 거요?”
“내가 언제 그리 말했소? 나는 그저, 본 성이 위기에 처했으니 경험이 많은 분이 지휘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의견을 제시했을 뿐이외다.”
“그 말이 그 말 아니오!”
육선기가 날선 목소리로 다그치자, 광혈단주 탕추강이 냉랭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리 못할 건 또 뭔가? 능력이 되지 않으면 잠시 지휘권을 맡길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그럼 우리 구천성에서 어느 누가 소성주님보다 더 능력이 뛰어나단 말이오?”
“솔직히 청산궁이나 암천문을 상대하는 일은 대령주나 대장로께서 더 적임이 아닌가 하네만.”
탕추강이 대놓고 욕심을 드러냈다. 육선기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올라갔다.
“그래요? 저번 싸움에서 그분들도 나선 것으로 압니다만. 그래서 우리가 승리했소이까?”
말이 점점 이상한 쪽으로 흐르자, 공손백이 손을 들어서 말다툼을 말렸다.
“어허! 두 분 단주, 진정하시게.”
전체적인 전력이 역전되어서 사마경의 세력이 커졌다 하나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성주는 임시성주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네. 설령 능력이 일부 모자란다 해도, 지휘권 이전은 단주들이 왈가왈부한다고 해서 결정될 일이 아니네.”
말은 사마경을 위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속내에는 날카로운 송곳이 숨어 있었다.
사마경을 따르는 간부들이 어찌 그걸 모를까.
하지만 그들이 입을 열기 전에 사마경이 먼저 말했다.
“위지 단주님과 탕 단주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저도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무겁게 짓눌린 분위기조차 그때만큼은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듯했다. 심지어 몇 사람의 눈에는 은근한 기대가 떠올라 있었다.
사마경이 그들을 천천히 둘러본 뒤 말을 이었다.
“사실 장천운이 없다 해서 이토록 밀릴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 동안 제가 천하제일세라는 위명에 취해서 본성의 전력을 너무 과대평가했나 봐요.”
“…….”
“험.”
“하긴 하늘 아래에 절대경지의 고수 서넛을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엄청난 고수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대령주님과 대장로님조차도 다른 고수와 연수를 한 후에야 겨우 버틸 정도였으니…….”
묘한 느낌이 드는 말이었다.
‘그딴 실력으로 지휘권을 이양해 달라고?’ 마치 그런 뜻이 풍기는 말투.
“굳이 홀로 나서달라고는 않겠어요. 누구든, 두세 분이 힘을 합쳐서 청산자나 암천신마 중 한 사람만 쓰러뜨릴 수 있다면 제가 가진 모든 권한을 넘기겠어요.”
“…….”
고요하게 가라앉은 구천대전 안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간혹 누군가가 헛기침을 하는 듯했는데, 정말로 목이 칼칼해서 그런 것인지, 웃음을 참기 위해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사마경의 목소리가 재차 울렸다.
“그도 아니면…… 이 자리에서 저들을 이길 수 있는 방안을 내놓아보세요. 청산궁과 암천문을 단숨에 무찌를 수 있는 묘책을.”
왠지 말끝이 날선 비수처럼 느껴졌다.
“그분의 묘책으로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임시성주 자리도 내놓고, 완전히 물러나겠어요.”
사마경이 비수를 꽂듯이 말을 맺고 간부들을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