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37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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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85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379화
장천운은 장로원으로 가기 전 대장간에 먼저 들러서 이응을 만났다.
흑월회의 암월당은 십여 명이 보강되어서 이제 삼십 명 가까운 인원이 구천성 인근에서 정보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단목 노인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 비밀리에 움직이려면 흑월회의 힘을 이용하는 게 나았다.
잠시 후, 이응에게 지시를 내린 그는 장로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런데 무 노인과 함께 있었던 자의 얼핏 본 얼굴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단목 노인은 왜 그를 찾고 있는 걸까?
왜 그에게서 장철산을 확인하려는 걸까?
원한관계는 아닌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긴 하데…….’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
* * *
장로원 경비무사들은 장천운을 발견한 순간부터 기립자세를 유지했다.
장천운이 장로원에 올 때마다 시끄러운 일이 생겼지 않은가.
저놈이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오는 걸까?
“수고하쇼.”
장천운은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안으로 들어갔다.
뒤통수에 경비무사들의 바늘 같은 눈빛이 꽂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나가던 장로 중 몇이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는 것도 못본 척했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그들의 눈빛보다 백배는 더 사나운 눈빛을 상대하게 될 테니까.
일각 후.
공손백은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마친 장천운을 난도질할 것처럼 사나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이미 장천운의 제안은 다 들은 터였다.
“그 서신을 나에게 건네주겠다고?”
“그렇습니다. 구천성의 안녕을 위해서 몸소 전장에 나서려는 분에게 제가 뭘 못 드리겠습니까?”
공손백의 장천운의 그 말을 일할도 믿지 않았다.
모두 개소리였다.
자신을 생각해서 주려는 게 아니다. 선봉에 세우려고 이용하는 것일 뿐.
그걸 알면서도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짜증났다.
“좋다. 그럼 우리 쪽에서 선봉을 서지. 구천성을 위해서 적과 싸우는 일인데, 선봉에 서지 못할 이유가 뭐 있겠느냐?”
약간은 비꼬는 뜻이 포함된 말이었다.
장천운도 모르지 않았지만 미소로 대답했다.
“소성주께서 고마워하실 겁니다.”
공손백은 웃는 그가 더욱 얄미웠지만 당장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죽일 놈의 새끼. 내가 네놈의 꿍꿍이속을 모를 줄 아느냐?’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마경과 장천운의 계획을 역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 한겨울이 오기 전에 한판 벌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142장 마제가 마제인 이유
서쪽 하늘이 검붉게 물들고 땅거미가 어둑하니 대지를 뒤덮어가는 시각.
청묵전을 나선 장천운은 바로 장로원을 나가지 않고 원로원 쪽으로 발걸음을 틀었다.
장로원 중간 부분에서 담을 쌓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장로원과 원로원을 반으로 가르는 공사였다. 진도로 봐서는 겨울이 될 때쯤 완성될 듯했다.
아마 공사가 끝나면 공손백과 나극의 마음도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갈라졌는지도 모르고.
그런데 담을 쌓고 있는 한쪽 구석에서 한 노인이 반쯤 쌓인 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노인이었다. 문제는 예사 노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복장은 평범하다 못해 낡은 마의였는데, 그 속에 깃든 기운은 무저의 심해처럼 깊게 느껴졌다.
어둠 때문인지 몰라도 유난히 검게 보이는 손 역시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는 방향을 돌려서 노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뭘 그렇게 유심히 보십니까?”
그가 말을 붙인 이후에야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노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이놈은 뭐지?’
검붉은 석양을 등지고 서 있는 장천운의 모습을 본 순간 몸이 굳는 듯했다.
마치 만장 절벽을 앞에 둔 것처럼.
“구경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장천운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건넨 후에야 노인의 입이 열렸다.
“세상일에서 허투루 넘길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느냐? 노부는 일개 인부가 담을 이리도 정교하게 쌓을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가 말한 대로 담장은 무척 정교했다. 수백 개의 벽돌이 쌓여 있는데 밖으로 튀어나온 돌이 하나도 없었고, 줄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말씀대로 정말 대단하군요. 그런데 원로원에서 처음 뵙는 분 같습니다만, 대장로님과는 어떤 사이십니까?”
“지나가다가 옛 친구의 얼굴이나 보려고 잠시 들렀을 뿐이다. 그런데 너야말로 누구기에 그리 묻는 것이냐?”
“장천운이라 합니다. 흑월대를 맡고 있지요. 일을 보러 온 김에 대장로님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노인은 장천운의 이름을 듣고 눈을 치켜떴다.
‘이놈이 장천운?’
그때 안쪽에서 창노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밤에 무슨 일로 노부를 찾아온 거냐?”
장천운은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원로원 중심에 있는 건물이었다. 나극의 거처.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들어와라.”
장천운은 시선을 돌려서 마의노인을 바라보며 포권을 취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마의노인도 가볍게 포권을 취해서 답했다.
“며칠 머물 것이긴 하다만, 또 볼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아마 볼 수 있을 겁니다.”
장천운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나극은 방으로 들어온 장천운을 차갑게 굳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놈이 무슨 일로 온 걸까?
그에게 얼굴 마주쳐봐야 좋을 것 없는 놈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자신 있게 꼽을 수 있었다.
‘바로 저놈일세.’라고.
“이 시간에 네가 어쩐 일이냐?”
장천운은 솔직하게 다 말해주었다.
종무진인의 죽음, 청산궁과 암천문의 연수, 그리고 소성주가 선공을 취할 생각이라는 것과 그일 때문에 공손백을 만나고 왔다는 것까지.
나극의 안색이 몇 번이나 변했지만 결국은 본래의 태연한 안색으로 돌아갔다.
“종무진인이 죽고, 청산자와 탁무겸이 손을 잡았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대령주와 나에게 선봉에 서 달라?”
“현재 본 성의 무사 중 선봉에 서서 저들을 상대할 수 있는 분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정말 낯도 두꺼운 놈이다. 마제라는 위대한 별호를 지나가는 똥개 이름처럼 취급하는 놈이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했단 말인가.
“단순히 그 말이나 하려고 온 것은 아닌 것 같다만.”
역시 늙은 생강이 맵기는 매웠다. 눈치도 빨랐고.
“저도 그렇지만, 소성주께서도 대장로께서 대령주와 한 산에 계실 분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노부와 대령주를 이간질이라도 해보겠다는 게냐?”
“그게 아니라는 걸 대장로께서 더 잘 아시잖습니까?”
“잘 안다? 노부가? 뭘 말이냐?”
나극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하자, 장천운이 고개를 쓱 내밀며 나직이 답했다.
“그걸 꼭 제 입으로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대장로님의 눈이 이미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나극의 주름진 눈매가 순간적으로 미미한 떨림을 보였다.
장천운은 그 떨림을 놓치지 않고 말을 보탰다.
“굳이 다른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딱 하나만 말씀드리지요. 독고민, 외손자를 악인으로 만든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훗, 네가 그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최소한 혼자 하시는 것보다는 힘이 덜 들 겁니다.”
나극의 수염 사이로 보이는 입술 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분노를 억누르는 자의 표정.
장천운은 거기에 하나를 더했다.
“소성주께서는 힘들지 몰라도 저는 할 수 있습니다. 단, 제 목숨을 걸어야할 것입니다만.”
“무슨 말이냐? 설마 노부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호위무사는 주인을 위해서 목숨을 걸 수 있어야 하지요. 그리고 저는 소성주의 호위무사입니다. 대장로를 위해서가 아닌 소성주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도 없지요.”
“네놈이 얍삽한 세 치 혀를 놀리…….”
“이미 한 번 목숨을 내놓은 적이 있다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 한 번 내놓은 목숨, 두 번 내놓지 못할 것도 없지요.”
그렇다. 나중에 알았지만, 장천운은 사마경을 위해서 사지라는 걸 알고도 은천동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남들은 어리석은 놈이라고 할지 몰라도, 젊은 무사들은 그 사건의 전말을 알고 더 열광했다.
나극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소성주와 손을 잡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럴 경우 마지막 남은 한가닥 희망마저 포기해야 한다.
살아남아서 구천성의 주인이 되는 꿈을.
“과연 사마가의 독함은 알아줘야겠구나. 너를 두 번이나 죽음으로 내몰려 하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소성주가 언제 또 저를 죽음으로 내몰았단 말입니까?”
장천운이 펄쩍 뛰었다. 나극이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그럼 사마경의 허락도 받지 않고 나에게 그런 제안을 한 것이냐?”
“미쳤습니까? 그 말을 하면 소성주가 허락하겠습니까?”
“…….”
뭐? 미쳐?
나극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그 와중에도 장천운이 얼굴을 앞으로 내밀고 침을 튀겨가며 말했다.
“아마 당장 때려 치라고 할 겁니다. 행여나 소성주 앞에서는 그런 말씀 마십시오. 괜히 저만 힘들어지니까요.”
뭐야, 이놈?
“오늘 일은 저와 대장로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만에 하나 소성주께 미리 말씀드리면…… 약속은 깨진 것으로 알 것입니다.”
언제 약속하긴 했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극은 한 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머리가 복잡했다. 칠십이 넘도록 오늘처럼 이상한 상황으로 고민한 적은 처음인 듯했다.
“그러니까, 너와 나만의 약속이다? 약속하면 노부의 복수를 도와주겠다? 너의 목숨을 걸고?”
“바로 그겁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선물을 드릴 수도 있죠.”
“선물?”
“노 장로님과 함께 꾸몄던 계획 중 대장로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겠습니다. 영원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내가 무슨 일을 꾸몄단 말이냐?”
“모르셨나 보군요. 노 장로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관련사실을 다 적어놓았는데. 운 좋게 제가 그걸 얻었죠. 참 재미있는 내용이 많더군요.”
나극은 장천운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노회현이 설마 그런 문서를 남겨 놓았을 줄이야.
그런데 그 문서가 어떻게 저놈의 손에 들어간 걸까?
혹시 거짓말 아닐까?
나극이 그 생각을 하며 가늘어진 눈으로 장천운을 바라보았다.
장천운은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고 몇 마디 덧붙였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귀독마종에게 구한 독의 행방이 불분명하단 말입니다. 혹시…….”
장천운은 ‘당신이 주도해서 저지른 짓 아니야? 라는 표정으로 나극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묘한 압박감.
나극은 어렴풋이나마 왜 공손백이 장천운에게 밀리는지 알 것 같았다.
이놈은 제대로 미친놈이다. 그래서 더 상대하기 어려운 놈이다.
아마 자신뿐만이 아니라 천외의 주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이 장천운을 제거하지 못한 것도 어쩌면 그래서일지 모른다.
나극은 그 동안 차갑게 식었던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심장이 보통 때보다 더 강하게 뛰는 듯했다.
그는 장천운이 펼친 그물에서 노련하게 빠져나갔다.
“좋다, 노회현이 남겼다는 문서가 뭔지 모르겠다만, 너와 나만의 약속이라면…… 받아들이마. 내가 뭘 해주면 되느냐? 설마 선봉에 서는 것이 조건의 전부는 아니겠지?”
“물론이지요. 제 목숨이 걸린 건데 그 정도로 되겠습니까?”
“말해봐라.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주마. 대신 네가 하는 걸 봐서 행할 것이다.”
“오늘 보니 못 보던 분이 계시더군요. 우선 그분들이 누군지 말씀해주십시오. 알아야 그에 맞는 계획을 세울 수 있으니까요.”
어차피 곧 알게 될 터,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는 내 옛 친구다. 그 친구의 이름은 위중평이지. 강호에서는 그를…….”
장천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묵천마수 위중평?”
“맞다. 바로 그 사람이니라.”
“묵천마수는 오래 전에 죽었다고 했는데…… 설마 시신이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은 아닐 거고…….”
그때였다.
덜컹!
방문이 세차게 열리고 냉랭한 목소리가 뒤통수에 꽂혔다.
“방금 뭐라 했느냐? 시신? 네 눈에는 내가 죽은 시체로 보이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