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397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75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397화
* * *
청산자는 칠산사의 사건을 보고 받고 이마를 찌푸렸다.
평소였다면 즐거워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냥 즐거워할 수만도 없었다.
하필이면 공격을 앞두고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더구나 뒤이어서 전해진 보고는 짜증마저 유발했다.
“공격을 며칠 미루자고?”
“예, 사형.”
청산자는 예감이 좋지 않았다.
하고자 할 때 하지 못하면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 때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탁무겸을 무시하고 청산궁 혼자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사흘 후에 공격하자고 해라. 그 이상 미루면 무림맹이 올지도 모른다고 해.”
148장 이제 해볼 만해
아침부터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날씨만큼이나 이응의 마음도 심란했다.
“후으으읍, 후우우우.”
이응은 심란한 마음을 털어내기 위해 심호흡을 한 후 구천무원으로 다가갔다.
그가 구천무원에 온 것은 장천운의 명령 때문이었다.
‘제길, 자기가 직접 가지.’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자기가 직접 찾아가면 될 텐데 왜 자신을 보낸단 말인가.
안 그래도 잔뜩 독이 올라 있는 상태라고 들었는데, 무슨 꼴을 당하라고.
물론 자신을 보낸 이유를 모르지는 않았다.
아마 소성주에게 혼날 것이 두려웠겠지.
그래서 아직은 직접 만날 때가 아니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자신을 대신 보낸 것이 분명했다.
한편으로는 순진해 보여서 웃음도 나왔다.
천하의 장천운에게도 두려운 상대는 있다는 걸 사람들이 얼마나 알까?
“무슨 일인가?”
잠깐 헛생각을 하는 사이, 구천무원의 경비무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이응은 그제야 자신이 지금 구천무원으로 들어가려는 중이라는 걸 새삼 깨닫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성주님께 긴히 전해드릴 말씀이 있소.”
“그대가 소성주님께?”
경비무사도 이응을 알고 있었다. 날이 상한 검을 맡기러 갔을 때 본 적이 있는 대장장이였다.
일개 대장장이가 소성주를 뵙겠다고 찾아오다니.
결코 자주 벌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무슨 말을 나누겠다는 거냐?”
“소성주님 외에는 말씀드릴 수 없소.”
경비무사는 건방진 대장장이의 말에 냉랭한 표정으로 입원을 불허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응이 한마디 덧붙였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귀하가 책임질 수 있소?”
“뭐라?”
“가서 말씀드리면 소성주님께서는 나를 만나주실 거요. 그러니 일단 말이나 전해주시오.”
대찬 이응의 말에 경비무사도 께름칙한 마음이 들었다.
하기야 말을 전한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길까.
“좋다, 그럼 여기서 잠깐 기다려라.”
사마경은 대장장이가 만나러왔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 이응?”
“문제가 생기면 책임질 거냐고 경비무사를 윽박질렀다 합니다.”
사공명신은 전해들은 이야기를 토씨까지 그대로 전했다.
“대장장이가 제법 강단은 있네. 좋아, 그럼 데려와 봐. 그런 사람이라면 한번 만나보지 뭐.”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만나줬다고 화나서, 칼 만들 때 엉터리로 만들면 안 되잖아.”
사마경은 대충 대답했다.
어차피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되돌려 보내면 되었다.
탁무겸과의 일 때문에 답답했는데, 수상한 목적을 갖고 찾아온 거라면 기분풀이나 하지 뭐.
이응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사마경 앞에 섰다.
흑월회 총단과 구천무원 내부는 분위기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밖에서 볼 때는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막상 안으로 들어오니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곳곳에 절정고수들이 은신해 있었고, 회랑을 오가는 고수들의 눈빛은 그의 가슴털을 모조리 잘라내 버릴 것처럼 날카로웠다.
사마경 앞에 선 순간에는 더했다. 이제는 머리카락까지 긴장해서 바짝 얼어붙었다.
하지만 심장은 북소리가 날 것처럼 거세게 뛰었다.
바로 앞에 소성주가 앉아있었다. 정신이 하늘로 달아나버릴 만큼 아름다운 소성주가.
그 옆에 있는 여인도 소성주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몸매는 더 뛰어난 듯했다.
‘저 여인이 연송하구나. 령주의 동생이라는.’
당장 심장이 터져서 죽어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어느새 불만이 싹 달아나고 령주가 고마워졌다.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요?”
꾀꼬리가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를 부르면 저런 목소리일까?
털썩, 이응은 재빨리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예, 소성주.”
“말해보세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를 찾아왔죠?”
이응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바닥에 글자를 썼다.
흑월(黑月).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분께서 보내셨습니다.”
사마경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이응의 손끝이 지나간 자리만 바라보았다.
“혹시…… 내가 아는 그 사람인가요?”
“그렇습니다, 소성주.”
“그 사람이 그대를 보냈다?”
“맞습니다.”
반가움 이전에 화가 났다. 너무 얄미워서 앞에 있으면 얼굴을 쥐어뜯었을지도…….
미리 연락이라도 줬으면 오죽 좋아? 그랬으면 탁무겸에게 혼인 운운하는 낯 뜨거운 서신을 안 보냈을 것 아냐?
그래선지 이응을 바라보는 눈이 제법 매서웠다.
“그대를 언제 보냈죠?”
이응은 상체를 바닥에 닿을 정도로 숙이고 있어서 그 눈을 볼 수 없었다. 그저 오싹한 한기에 몸이 저절로 떨렸을 뿐.
“저, 정확히 한 시진쯤 지났습니다.”
“성 안에 있나요?”
“지금은 없을 겁니다.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다고 어딘가로 가셔서…….”
“…….”
사마경은 숨을 느릿하고, 깊이 들이마셨다.
그러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니 그 이전에 고함이 터져 나오겠지.
아마 절반쯤은 욕설이 섞인 고함이었을 것이다.
“이 때려죽일 인간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 나타나! 아니, 나타났으면 바로 달려와야지, 또 어디로 간 거야!”
하지만 꾹 참은 그녀는 냉정하고 차분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결론은 확실하게 하나로 귀결되었다.
“그러니까…… 도망쳤다고 봐야겠군요.”
제대로 찍었다.
하지만 이응은 동의의 박수를 쳐줄 수 없었다.
“꼭 도망친 것은 아니고…….”
“아마 혼날까봐 그랬을 거예요. 나도 이해해요.”
“저…… 그보다는 부담을 주기 싫어서 그러셨을 겁니다.”
“그 사람 편들어주지 않아도 돼요.”
“죄송합니다.”
“팔다리가 부러져도 금방 낫는 사람이거든요.”
“…….”
이응은 덥지도 않은데 등 쪽에서 땀이 났다.
“그 사람 제대로 혼내려면 최소한 팔다리 두 개 이상 부러뜨리고, 쇠기둥에 거꾸로 꽁꽁 묶어 놔야 할 거예요. 그런데 나는 마음이 약해서 그렇게까지는 못해요.”
설마 자신에게도 그런 벌을 내리진 않겠지?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심부름 시킬 것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자신은 죄가 없기 때문인지 몰라도.
“어디 말해 봐요. 단순히 그 사실을 알리려고 그대를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예, 소성주.”
이응은 또박또박 장천운의 말을 전했다.
말 한마디 실수도 조심했다. 괜히 엉뚱한 말을 했다가는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 팔다리가 부러진 채 쇠기둥에 매달릴지도 모르고.
제법 긴 이야기였지만, 다행히 이응은 토씨하나 실수하지 않고 장천운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자신이 이렇게 똑똑했던가? 하는 마음에 자부심마저 들 정도였다.
이야기를 다 들은 사마경은 언제 화가 났냐는 듯 싸늘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수고했어요. 가서 그를 만나면 내 말을 그대로 전해줘요.”
“예, 소성주.”
“엉뚱한 짓하다 또 다치면 내가 다친 곳만 골라서 때릴 거라고요.”
이응이 탈출하는 마음으로 방을 나간 후 사마경은 느릿하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뒤늦게 심장이 거세게 떨렸다. 떨림은 가슴을 타고 목을 기어올라서 눈까지 흔들었다.
앞이 뿌옇게 가려진 눈에 축축한 습이 물방울처럼 맺혔다.
‘그가 왔어, 천운이. 이제 해볼 만해.’
눈에 물기가 고인 사람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저기…… 그분이 온 거, 맞죠?”
연송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확인하듯 물었다. 최대한 진정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응. 왔데. 이제 탁무겸에게 시집을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사마경은 농담조로 말하고 입술을 삐죽였다.
“쳇, 오기 전에 확 시집이나 가버릴 걸 그랬나?”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사람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사공명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사마경의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장천운, 그가 돌아왔다.
청산자와 탁무겸을 일대일로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고수가.
오늘부터는 싸움의 판도가 달라질 것이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무래도 놈들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사마경이 턱을 쳐들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예전의 도도함이 피어났다. 눈빛도 서릿발처럼 차갑게 번뜩였다.
“총사를 부르세요.”
* * *
그날 밤.
황촛불 하나가 외롭게 켜진 청묵전의 내실.
공손백은 어둑한 방의 다탁에 앉아서 머릿속에 실타래처럼 엉킨 생각을 정리했다.
이리 재보고 저리 재보아도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당장 검을 거꾸로 잡고 사마경을 공격하는 게 나을지.
탁무겸과의 약속을 모른 척하고 계속 버티는 게 나을지.
탁무겸과의 약속은 자신과 사계만 입을 다물면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이다.
의심이야 하겠지만, 사마경도 증거가 없는 한 자신을 몰아붙일 수 없다.
그랬다가는 진짜 검을 거꾸로 쥘 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구천성이 허무하게 무너진다는 것을 그 영악한 계집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탁무겸을 도와서 구천성을 무너뜨린다 해도 자신에게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
구천성이라는 대물의 사냥이 끝나면 탁무겸은 사냥개인 자신을 즐거운 마음으로 솥에 넣고 삶아버릴 것이다.
‘탁무겸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
그렇게 인생을 비참하게 끝낼 수는 없다.
어떻게 버텨온 인생인데!
‘내 젊음을 바친 구천성을 그딴 놈 입안에 넣어줄 수는 없어!’
파스스스스.
그의 손 안에 있던 찻잔이 가루가 되어서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그때 다탁 위로 희미한 그림자가 비쳤다.
달랑 하나만 켜져 있는 황촛불로 인해서 선명하진 않았다. 그래도 그림자가 사람의 형상이라는 것을 몰라볼 정도는 아니었다.
천하에서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자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어떤 간덩이 큰 놈이 자신의 방에 들어온 걸까?
다탁에서 시선을 뗀 그는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생각에 잠겨서 손님이 온 줄 몰랐구려. 이 시간에 차를 마시러 오진 않았을 거고, 어디 얼굴부터 봅시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 다탁으로부터 다섯 자 떨어진 곳에서 그림자가 서서히 형체를 갖추었다.
그 광경은 정녕 거짓말 같았다.
공손백조차 그 광경을 보며 눈매를 잘게 떨었다.
언젠가 그와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오늘처럼 완벽하진 않았지만, 사람의 심장을 뒤흔들기에는 충분했었다.
‘설마…… 그놈?’
아닌가?
모습을 완벽히 갖춘 자는 그와 얼굴이 달랐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상하리만큼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우리 남자답게 탁 터놓고 이야기해봅시다.”
하지만 목소리는 같았다.
말투도 그놈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놈!
“너……?”
“저도 대령주와 이런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패하지 않으려면 별 수 있습니까? 마음에 안 들어도 할 건 해야죠.”
“나야말로 네놈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구천성이 패하면 대령주께서도 좋을 게 없을 겁니다.”
“그런 걱정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다.”
“혹시나 탁무겸이 상이라도 줄 거라 생각했다면 포기하십시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잘 아실 텐데요?”
“내가 뭘 안단 말이냐?”
“좀 전에 토사구팽을 걱정하지 않았습니까?”
헉! 설마 저놈이 독심술이라도 익혔단 말인가?
아니면 대충 때려 맞춰서……?
어쨌든 사실이라 해도 순순히 인정할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