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39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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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99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396화
* * *
가을이 막바지로 달려가는 만큼 하늘도 높아졌다.
산천초목은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서 형형색색의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장천운은 누렇게 탈색된 산봉우리 위에 서서 드넓게 펼쳐진 구천성을 바라보았다.
활기 대신 긴장감에 짓눌린 구천성은 무덤처럼 고요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청산궁과 암천문이 곧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하리라는 걸.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 하겠지.’
과연 구천성이 이번에도 버틸 수 있을까?
현재로선 가능성이 삼 할도 안 된다.
자신이 나선다면 가능성이 사 할로 늘어나긴 하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승산이 없다.
지난 며칠 동안의 안배가 예상한대로 흘러야만 승률이 절반을 넘을 것이다.
‘저들은 지금 구천성을 얕보고 교만함으로 물들어 있다. 그렇다면 어딘가에서 반드시 빈틈이 드러날 것이다.’
우선은 그쪽에 희망을 거는 수밖에.
산을 내려온 장천운은 남풍루로 갔다. 그런데 뜻밖의 이야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암천신마가 소성주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했답니다.”
“탁무겸이?”
“예, 령주. 구천성을 순순히 바치라는 뜻 같습니다.”
장천운은 가슴에서 덩어리가 하나가 욱하니 올라오는 듯했다.
“흥! 웃기는 작자군. 소성주는 절대 응하지 않을 거요.”
이응이 슬쩍 장천운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합니다만…… 들리는 소문으로는, 소성주께서 고민해보겠다고 답신을 보냈다 합니다.”
장천운은 발끈했지만 겉으로 표 내지는 않았다.
‘이 여자가 미쳤나? 왜 그런 걸 고민해?’
당장 쫓아가서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만나면 사실 확인 이전에 잔소리를 하루 종일 들어야만 할 것이 분명했다.
‘젠장, 설마 진짜로 탁무겸의 부인이 되겠다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암천신마가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은 마지막 공격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말이다.
—이제 곧 공격할 테니 그 전에 내 제안을 받아들여라!
그런 압박.
또한 사마경이 그런 답신을 보낸 게 사실이라면, 구천성이 그만큼 위기에 몰려있다는 뜻이다.
자칫하면 자신이 만들어놓은 변수가 무용지물이 된 채 구천성이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
‘청산자도 지금쯤 남궁세가의 상황을 알았을 텐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지도 모르겠군.’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한 장천운은 남풍루를 나섰다.
상황이 남들 예상대로 흐르도록 놔둘 수는 없는 일.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 * *
그날 밤은 세찬 바람 때문인지 날씨가 제법 싸늘했다.
서늘한 바람이 옷깃 사이를 파고들 때마다 몸이 움츠러들었다.
칠산사 외곽의 경비무사들은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암천문의 전초기지나 다름없는 칠산사에서 구천성까지는 겨우 이십 리에 불과했다.
구천성에서 언제 공격해올지 몰랐다.
물론 구천성 무사들이 성을 나서서 칠산사로 달려오면 그 즉시 알 수 있는 정보망이 갖추어져 있긴 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만약 누군가가 실수해서 칠산사가 무너지면, 본진이 있는 광명사까지 오십 리 거리.
자칫하면 전쟁의 판도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젠장, 잔뜩 웅크리고서 벌벌 떨고 있는 놈들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쉿, 함부로 말하지 말게. 어제 마곡의 진가가 투덜대다가 감찰에 걸려서 입이 찢어졌다는 말 못 들었어?”
입이 찢어졌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다만 그는 상관을 욕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겁나는 말인 것만은 분명했다.
“씨발…….”
“곧 구천성을 공격한다고 하더군. 놈들만 무너뜨리면 이 고생도 끝이니 조금만 참아.”
“크크크, 기세등등하던 구천성이 이렇게 무너질 줄 누가 알았나.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군.”
경비무사들은 작은 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지루함과 추위를 달랬다.
그 사이 바람 한 줄기가 담을 넘어서 칠산사 안으로 날아갔다.
그로부터 이각쯤 지났을 때.
“적이다!”
외마디 고함이 어둠을 뒤흔들었다.
뒤이어 경악에 찬 떨린 목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암습이다! 주위를 경계해!”
“무사들을 점검해봐라!”
“여기도 당했다!”
“일대를 봉쇄하라!”
암습자가 하나인지, 다수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칠산사에 머물던 암천문 무사들은 우왕좌왕하며 암습자를 찾았다.
그 와중에도 십여 명이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암습을 장기로 하는 자들이 보이지도 않는 누군가에 의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지독한 공포가 칠산사를 뒤덮었다.
“움직이지 말고 기를 집중해서 적을 찾아라!”
누군가가 악을 쓰듯 소리쳤다.
암천문 무사들은 공포에 질린 상태에서도 움직임을 멈추고 기감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상대는 천하에서 가장 괴이한 환술을 익힌 장천운이었다. 그들의 기감으로는 장천운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다시 대여섯 명이 피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놈이 바람을 타고 이동한다! 바람을 차단해! 팔마 형제들은 바람의 이동을 놓치지 말게!”
이번에도 조금 전의 목소리가 소리쳤다.
검은 무복을 입은 자들 몇 명이 한 몸처럼 움직이며 바람을 주시했다.
장천운도 이제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공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팔마라는 자들은 전에 봤던 암귀들에 비해 뒤지지 않는 고수들이었다.
은신술 외의 무력은 오히려 팔마가 더 강한 듯 보였다.
‘이곳의 책임자들인가?’
정보 취득과 무력 약화.
칠산사를 방문한 목적은 어느 정도 이룬 상황이다.
장천운은 칠산사를 빠져나가기 위해서 무영무종의 환술법을 만변은환으로 바꾸었다.
공격력이 약하긴 해도 몸을 숨기기에는 만변은환이 더 나았다.
그는 바람조차 일으키지 않고 적들 사이를 지나서 칠산사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담장을 날아서 넘은 그가 지상에 내려선 순간, 냉랭한 목소리가 그를 덮쳤다.
“참으로 괴이한 은신술을 지닌 놈이로구나! 하마터면 놓칠 뻔했어.”
동시에 한 사람이 흐느적거리며 그를 향해 다가왔다.
육순으로 보이는 구부정한 노인이었다. 그가 몇 걸음 옮기는 사이 반월형의 칼을 뽑아들었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장천운을 쳐다보는 눈빛이 칼날처럼 번뜩였다.
“날다람쥐 같은 놈이니 함께 처리하는 게 좋겠어.”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인이 신경질 부리듯 가늘면서도 날선 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자 역시 처음 나타난 자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괴이하게도 낯빛이 회칠을 한 듯 하얀 것이 산사람 같지 않았다.
키는 칼을 뽑아든 노인보다 훨씬 컸는데, 큰 키만큼이나 기다란 장검을 들고 있었다.
잠깐 멈칫했던 장천운은 먼저 반월형의 칼을 든 노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강호인명록에 없는 노인들이다. 암천문의 노고수들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대로 도주한다면 누구도 그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런 고수들을 두고 그냥 갈 순 없었다.
결정을 내린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뇌정무극수를 펼쳤다.
우르릉.
어둠을 찢어발기며 뻗어가는 한 줄기 장력.
나직한 뇌음이 혼을 짓누르듯 울렸다.
칼을 든 노인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기겁해서 머리카락이 솟구쳤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젊은 놈도, 일대의 풍경도.
장님이 된 듯 눈앞이 캄캄해졌다.
‘빌어먹을!’
그는 칼을 찰나에 열여덟 번이나 휘둘러서 장세를 와해시키려 했다.
번뜩이는 도광이 강력한 막을 형성했다.
그 직후 뇌정무극수가 도막의 중심을 두들겼다.
콰과광!
귀청을 찢을 듯 터져 나온 굉음.
도막이 망치에 얻어맞은 자기처럼 부서지고, 노인의 몸뚱이는 뒤로 훌훌 날아가서 소나무에 부딪치고 나서야 멈췄다.
키가 큰 노인은 놀랄 틈도 없었다. 도를 든 노인을 일수에 날려버린 장천운이 그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이노오오옴!”
악을 쓰듯 고함을 내지른 노인은 장천운의 심장어림을 향해 기다란 장검을 뻗었다.
어둠을 뚫고 장검 끝에서 쭉 뻗어나간 시퍼런 검강은 당장에라도 장천운을 꼬치처럼 꿰뚫을 듯했다.
가히 절대경지에 이른 극상승의 검공.
경악할 광경은 그 직후에 벌어졌다.
기다랗게 뻗어나간 검강은 분명 장천운의 심장을 꿰뚫었다. 최소한 키가 큰 노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런데 심장이 꿰뚫린 장천운은 눈빛 한 점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우수를 든 그가 키가 큰 노인의 기다란 장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극에 이른 환술은 실체인지 환영인지조차 알 수 없게 했다.
땅!
검강이 서린 검신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부러졌다.
키가 큰 노인의 얼굴을 밀가루반죽처럼 일그러뜨렸다.
“크읍!”
검강이 서린 검을 부러뜨린다는 것은 단순히 나무젓가락을 부러뜨리는 것과 달랐다.
가공할 위력의 공력이 충돌하는 것이다. 밀린 자는 그 이상의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키 큰 노인 역시 검을 잡은 손이 폭발하며 부서지는 듯했다. 그 여파가 전신을 치달렸다.
머리끝이 쭈뼛 설 정도의 극렬한 충격!
그 와중에도 노인은 장천운의 이차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날렸다.
순간!
번쩍!
한줄기 섬광이 장천운의 손끝에서 뻗어나갔다.
마치 그의 손끝과 키가 큰 노인의 이마가 하나의 줄로 연결된 듯했다.
뒤로 몸을 날렸던 노인의 눈이 커졌다. 입도 반쯤 벌어졌다.
자신이 당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
삼 장을 날아간 노인은 서지도 못하고 그대로 널브러졌다.
자신의 검 파편에 이마가 꿰뚫린 그는 이미 아무런 고통도 느낄 수 없는 상태였다.
장천운은 전력을 다해서 두 노인을 처리한 후 지체하지 않고 그곳을 벗어났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급박하게 달려온 경비무사들은 넋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담장을 넘어서 현장에 도착한 내부의 무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불신이 가득 차서 물결쳤다.
선홍빛 피를 토하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노인, 이마에 부러진 검날이 박힌 채 부릅뜬 눈으로 어둠을 노려보는 노인.
암천문의 핵심고수들인 구암사(九暗邪) 중 둘이 숨 두어 번 쉴 시간에 항거불능이 되어버린 것이다.
조금 전, 사찰 안에서 소리쳤던 자도 목소리가 떨렸다.
“소, 속히 태천께 이 사실을 알려라!”
* * *
보고를 받은 탁무겸은 이마를 찌푸렸다.
칠산사가 공격을 받아서 사십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한다. 개중에는 구암사 중 둘도 포함되어 있었다.
분노하기 이전에 궁금증부터 밀려들었다.
청산자가 말한 동방무기 일행은 아닌 듯했다.
더구나 신출귀몰한 신법을 사용해서 모습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했다.
자신이 아는 한 그 정도의 신법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열을 넘지 않는다.
그나마도 구암사 둘을 단숨에 쓰러뜨릴 수 있는 자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마 우곡조차 구암사 하나 정도 감당할 수 있을 뿐이다. 하물며 단숨에 승부를 가른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대체 누가……?
탁무겸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 이를 악다물었다.
아니다, 전혀 없는 것만은 아니다.
‘설마 장천운이 나타나기라도……?’
눈매가 한겨울 문풍지처럼 잘게 떨렸다.
전혀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다.
죽지 않은 이상 언젠가는 돌아올 놈 아닌가 말이다.
정말 그놈이 돌아왔다면 이제부터는 전과 다른 싸움이 될 것이다.
더구나 놈은 전보다 더 강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일전의 대결 때 대해본 장천운의 마지막 일검.
그 자신조차 그 검을 완벽하게 막아낼 자신감이 없었다. 물론 패한다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지만.
피가 끓었다.
금룡신군과 싸울 때도, 청산자를 대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승부욕이 저 깊은 곳에서 용솟음쳤다.
‘장천운, 정말로 네가 나타났다면, 네 목만큼은 반드시 내가 잘라주마. 사마경이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일을 핑계 대고 암천의 형제들이 모두 도착할 때까지 구천성 공격을 며칠 미루시는 게…….”
도악이 눈치를 보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탁무겸은 그의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청산자가 즐거워하는 꼴을 볼 수는 없지.”
“옳으신 결단이십니다.”
“독고민은 어떠냐?”
“이제 완벽한 마령체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