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3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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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63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395화
“사, 살려다오. 살려주면 뭐든 해주겠다.”
귀독마종은 애걸하듯 말했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뜻밖일 정도로 비굴한 태도였다.
그만큼 그는 장천운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장기는 독이다. 그런데 상대는 독도 통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독을 가볍게 태워버릴 정도로 엄청난 공력마저 지녔고, 냉혹한 수법은 그날의 일을 생각만 해도 살이 다 떨릴 정도였다.
“뭐든 해준다? 글쎄, 독밖에 모르는 당신이 나에게 해줄 만한 게 있을지 모르겠소.”
장천운이 근처에 있는 큼지막한 돌을 하나 주워들며 말했다.
귀독마종은 그 돌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돌의 용도를 알기 때문이다.
“처, 청산궁과 암천문을 상대할 수 있는 독을 만들어주마. 그들을 중독 시켜서 전력을 약화시키면 구천성이 이 전쟁을 이길 수 있을 거다.”
장천운의 눈 깊은 곳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독으로 전쟁을 이기려 했다면 독왕의 독만 사용해도 충분해.”
“흥! 독왕의 잡독 따위는 내 독과 비교할 수 없다!”
그 와중에도 귀독마종은 독왕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럴수록 장천운은 그의 감정을 더 자극했다.
“독을 사용하면 수십 명 정도는 죽일 수 있겠지. 음식이나 물에 타면 수백 명도 죽일 수 있으려나? 하지만 그 이상은 어려울 거요. 어쩌면 몇 명 죽이지도 못한 채 끝날 수도 있고. 특히 청산자와 암천신마는 당신의 독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살려준단 말이냐?”
“먼저 여기에 왜 왔는지부터 말해보쇼. 사실대로 대답한다면 생각해보겠소.”
귀독마종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곧 체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복수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 알아볼 것이 있어서 온 것일 뿐.”
생각지 못한 대답에 장천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복수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고? 그럼 대체 뭘 알아보겠다고 목숨을 걸고서 이곳에 온 거요?”
“노부가 아는 한, 사마중천은 내가 판 뇌혈산 때문에 죽은 게 아니다. 절대 뇌혈산으로는 사마중천을 죽일 수 없어.”
광기마저 느껴지는 귀독마종의 말에 장천우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죽은 모습을 많은 사람이 보았다. 심지어 공손백과 나극조차도 뇌혈산을 사용했다는 걸 시인했다.
그런데 아니라고?
문제는 그 말을 한 사람이 뇌혈산을 만들어서 판 당사자이며, 천하제일을 다투는 독의 대가라는 것이다.
“그럼 무슨 독에 중독되었다는 거요?”
“그건 내가 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다. 그래도 뇌혈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뇌혈산을 제대로 배합해서 극독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둘 뿐이니까. 그 중 하나는 나고…… 한 사람은 오래 전에 사라졌다. 독왕도 배합할 줄 모를 거다.”
“어쨌든 전대 성주님은 뇌혈산에 의해 죽었소. 그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오.”
“그래서 의문이라는 거다.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소린지 나는 아니까.”
귀독마종은 독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자, 목숨을 위협받는 와중에도 눈빛이 번들거렸다.
거짓이 없는 눈빛.
장천운은 그래서 더 이상했다.
그럼 어떻게 된 거지? 전대 성주님의 사망 원인이 따로 있단 말인가?
“정말 다른 독에 의해서 죽었다는 거요?”
“내가 아는 한. 사마중천의 시신을 보여다오. 그럼 내가 원인을 밝혀낼 수 있다.”
“나도 그러고 싶소. 그런데 그럴 수가 없소. 전대 성주님의 시신이 사라졌으니까.”
“시신이 사라졌다고?”
“맞소. 누가 시신을 가져가버렸소. 언제 가져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귀독마종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럼 혹시……?”
“뭐 생각나는 거라도 있소?”
귀독마종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뇌혈산을 이용하면 세상에서 가장 괴이한 약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노부뿐인데…….”
* * *
눈을 뜬 소천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무 노인은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큰 죄를 지었구나. 미안하다, 소천.’
마침내 대법이 완성되었다.
대신 그나마 남아 있던 이지를 거의 다 상실했다.
이제 소천은 오직 그의 명령만을 받드는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스스로 생각해서 움직일 수 없는 인형처럼.
그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자신이었다.
정말로 미안했다.
차라리 그냥 놔두었으면, 옥신각신하더라도 딸과 몇 년은 더 함께 살았을 텐데.
하늘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같잖은 자신감이 몇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고 말았다.
‘죽어 지옥에 가면 불길 속에서 용서를 비마.’
그때 소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달라붙은 듯 보였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명령을…….”
무 노인은 마음을 다 잡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되돌아갈 길은 없었다.
목적을 완수하는 것만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에 대한 최선의 보답일 뿐.
“가자꾸나, 소천. 내가 가는 길이 지옥으로 향한 길이라 해도 이제는 멈출 수가 없구나.”
* * *
장천운은 혈도가 제압된 귀독마종을 남풍루로 데려갔다. 도망가면 처절하게 죽을 거라는 엄포도 서슴지 않았다.
귀독마종도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결과도 보고 싶었고, 도망갔다가 잡혀서 저 독한 놈의 손에 팔다리가 짓이겨진 채 죽고 싶지도 않았다.
귀독마종을 골방에 처박아 놓은 장천운은 북쪽으로 올라갔다.
작심하고 부풍비를 펼친 그는 제비가 무색한 속도로 허공을 날았다.
그 덕에 그는 동이 트기 전 대운사에 도착했다.
화재를 당한 대운사에는 두어 달 전 새로 머리를 깎은 승려가 하나 있었다.
장천운이 대운사까지 온 것은 그를 만나고자 함이었다.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진짜 승려처럼 보이는데요?”
장천운이 그를 보고 말하자,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이참에 진짜 승려가 되어볼까 하네. 주지스님께서 진회라는 법호도 만들어주셨네.”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진회라는 법호를 받은 그 승려는 다른 사람이 아닌 문인동이었다.
장천운에 의해 공력을 폐쇄당한 그는 은밀하게 대운사로 옮겨졌다.
처음에만 해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만사에 의욕이 없던 그였다. 그런데 지난 몇 달 동안 대운사에 기거하다 보니 과거가 허망하게 느껴졌다.
특히나 자신의 손으로 숙부나 다름없던 여철숭을 죽인 일에 대해서 회한이 밀려들었다.
그는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부처 앞에서 용서를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처 앞에 엎드려서 용서를 비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날 밤, 꿈속에 여철숭이 나타났다.
여철숭은 그를 혼내는 대신 밝은 웃음으로 대했다. 이제는 되었다며, 모든 걸 용서한다며.
그가 꿈에서 깨었을 때 그의 베개는 눈물로 젖어 있었다.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이대로 승려가 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하지만 그 전에 마무리 지어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도 알고 있네. 당연히 그 일은 마무리를 지어야겠지.”
장천운은 담담히 말하는 문인동을 지그시 쳐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기운이 문인동을 쓸고 지나갔다.
문인동은 철벽처럼 막혀 있던 진기의 통로가 하나 둘 뚫리는 걸 느끼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그러한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장천운은 이제 자신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상상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유 때문에 더 놀랐다.
“왜……? 내가 도망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유는 아마 장로의 가슴이 더 잘 알 겁니다.”
문인동은 울컥 치솟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대답도 못했다.
“때가 되면 연락하겠습니다. 그때 뵙죠.”
장천운은 짧게 작별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뒤에서 나직한 불호가 들렸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 *
“원시천존.”
도호를 외운 청산자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앞에 영산자가 앉아 있었다. 평상시와 달리 무거운 표정이었다.
“남궁세가의 도우들이 죽었다고?”
“예, 사형. 하룻밤 사이에 당했다 합니다.”
“남궁세가에 그런 힘이 있을 리는 없을 테고…… 범인은 밝혀졌느냐?”
영산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그들이 죽는 걸 알지 못했다 합니다.”
청산자의 이마에 깊은 고랑이 파였다.
“혼자서 그러한 일을 벌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은 하늘 아래 다섯이 안 된다. 그들 중 남궁세가에 가서 그런 일을 할 만 한 자가 없거늘…….”
나직이 중얼거리던 청산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설마…… 탁무겸이?”
“그가 왜……?”
암천문과 탁무겸의 능력이라면 남궁세가에서 벌어진 일 정도야 어렵지 않게 처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산자는 의문이 들었다. 그들이 왜 지금 와서 그런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노도에게 경고를 보내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뒤에서 노리는 칼을 놔두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고.”
영산자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자신 역시 그들 외에는 마땅히 생각나는 자들이 없었다.
더구나 암천문과는 어차피 오월동주의 사이일 뿐이다.
전쟁이 끝나면 서로의 목에 칼을 들이대야 할 적!
그 전에 뭔가 손을 써놓을 수 있다면 그만큼 형제들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만약 그가 아니라면…… 동방무기?”
그럴 가능성도 크다.
그의 곁에 있는 고수 둘이 합공하면 자신조차 수십 초를 허비해야만 한다.
“정말 그가 나타난 거라면 곧 모습을 드러낼 거다. 어쩌면 남궁세가에서처럼 몰래 고수들을 암살해서 우리 힘을 약화시키려 할 수도 있어.”
영산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역시 심각성을 모르지 않았다.
동방무기 일행을 단독으로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청산자와 탁무겸 외에는 없었다. 그들로 인해 피해가 커지면 구천성을 무너뜨리는 시기도 늦춰질 것이다.
“구천성 공격을 앞당겨야겠다.”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맺은 청산자가 영산자에게 물었다.
“준비는?”
“청산십목의 형제들도 대부분 도착했습니다. 내일이면 나머지 형제들도 모두 도착할 것입니다.”
어쩌면 마지막 공격이 될지 모른다.
청산십목의 모든 형제들이 모이는 만큼 끝장을 볼 작정이니까.
암천문 역시 상당한 전력이 모여든 것으로 파악된 상태. 구천성도 이번만큼은 버텨낼 수 없을 것이다.
“탁무겸에게 전령을 보내서 이틀 후 공격하자고 해라.”
“예, 사형.”
“놈들의 이동을 한시도 놓치지 마라.”
“알겠습니다.”
청산자는 영산자의 대답을 들으며 조소를 지었다.
‘어디 누가 이기는가 보자, 탁무겸.’
* * *
탁무겸은 청산궁의 연락을 받고 이마를 찌푸렸다.
단순히 이마를 찌푸렸을 뿐인데도 법당의 분위기가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동방무기라는 늙은이가 나타난 것 같다고?”
“그렇다 합니다.”
“확실한 정보라더냐?”
“현재로써는 추측인 것처럼 보입니다만, 청산자가 그런 생각을 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필 사마경과 서신이 오가는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다니, 청산자에게 다른 뜻이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느냐?”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태천의 혼사를 방해하기 위함은 아닌 듯합니다.”
도악은 차분하게 대답하면서도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태천의 대세를 보는 눈은 자신이 감히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뛰어났었다. 그런데 사마경이 머릿속에 들어찬 이후부터는 판단력이 예전만 못했다.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할 일 없어서 만들어낸 소리가 아니라는 걸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그럼 일단 그들의 흔적부터 찾아보도록 해라. 청산자에게도 그렇게 판단한 이유를 확실하게 알아보도록. 분명 뭔가가 있을 거다.”
“예, 태천이시여.”
“사실이라면…… 청산자의 제안에 따를 것이니라.”
도악의 표정이 펴졌다.
‘역시 주군께서는 그깟 계집보다 천하제패를 우선으로 생각하시고 계시는구나.’
희망의 불씨를 되살린 그는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숙였다.
“즉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탁무겸은 그런 도악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지금까지 도악이 알고 있던 그 어떤 눈빛과도 많이 달랐다. 아마 도악이 그 눈빛을 보았다면 간이 오그라들었을 것이다.
‘너도 이제 죽을 때가 되었구나, 도악. 감히 나에 대해 의심을 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