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3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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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83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394화
그제야 장천운은 다시 돌아서 대답을 기다렸다.
찬강은 속이 끓었지만 어차피 다른 길이 없었다.
<네 의견을 받아들이마.>
<이것저것 따지면서 뒤로 빠지면 안 됩니다.>
<걱정 마라.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여기는 거리가 너무 머니 구천성과 가까운 곳으로 이동하십시오. 물론 저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왠지 밀린 느낌이었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탁무겸에게 복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몇 곱절 늘어났으니까.
그것만으로도 건방진 말투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탁무겸,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가 격정을 가라앉히느라 잠시 머뭇거린 사이 장천운이 탁자를 벗어났다,
객잔의 입구를 봉쇄하고 있던 자들이 그를 따라 이동했다.
전음을 듣지 못한 그들의 눈에는 장천운이 찬강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듯 보였다.
“동주, 그 건방진 놈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화들짝 놀란 찬강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다! 그냥 보내줘라.”
* * *
“재미있군,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는 계집이야.”
탁무겸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청산자를 제거해주면 자신의 부인이 되겠단다.
속이 훤히 보이는 수작이었다.
이간계로 강적 하나를 없애겠다는 뜻. 아니면 시간을 끌어보겠다는 생각일 수도 있다.
그는 사마경의 뜻을 간파하고도 화가 나는 대신 웃음이 나왔다.
청산자는 어차피 제거할 대상 중 하나다. 언제 제거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
이제는 그 ‘언제’가 사마경을 자신의 부인으로 맞이할 수 있는 날이 되었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 청산자를 제거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은 그가 필요했다. 청산궁의 무력이 있어야만 했다.
“도악,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간질을 해서 청산자를 제거하려는 간계에 불과합니다. 그냥 흘려들으시는 게…….”
“어차피 제거하려 했는데, 덤으로 부인까지 얻을 수 있다면 손해는 아닐 것 같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게 속하의 생각입니다.”
“때가 아니다? 흐음, 나 역시 조금 이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느니라.”
“차라리 구천성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무너뜨린 후 취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취할 수 있는 계집이라면 그렇게 했을 거다. 하지만 그 계집은 구천성을 무너뜨린다 해서 얻을 수 있는 계집이 아니다. 물론 몸이야 얻을 수 있겠지만.”
“계집은 몸을 바치고 나면 마음도 변하는 법입니다. 그게 하늘이 만들어 놓은 남녀 간의 오묘한 법칙이지요.”
탁무겸은 도악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악, 혼인을 하지 않은 네가 그런 말을 하니 믿음이 가질 않는구나.”
도악의 표정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그건…….”
“더구나 계집과 잠자리를 한 것도 십 년이 넘은 것으로 안다만.”
결국 도악은 고개를 푹 숙이고 끙끙댔다. 그는 탁무겸의 말에 불만이 많았다.
‘태천께서는 더 오래 되었지 않습니까.’
자신보다 더하면서 아픈 구석을 쿡쿡 찌르다니.
탁무겸이야 그의 마음을 신경 쓰지도 않았지만.
“세상에는 네가 말한 그런 계집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계집도 많다. 특히 사마경은 강제로 품을 경우 매일 밤 품속에 칼을 품고 들어와서 나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본좌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하오면 설마…… 정말로 청산자를……?”
“없애야지. 하지만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아직은 일러.”
“잘 생각하셨습니다.”
“사마경에게 서신을 보내라. 언제 갈지 모르니, 매일 밤 목욕재개하고서 나를 기다리라고 해.”
그 말을 하고서 탁무겸의 입가로 하얀 웃음이 번졌다.
물론 사마경은 절대로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매일 밤 이를 갈아댈지 모른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도악은 탁무겸의 웃음을 보며 눈빛이 흔들렸다.
‘태천께서 정말 그 계집을 원하고 있구나.’
탁무겸은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지난 세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그래서 걱정이었다. 마음에 꽃이 피면 냉철한 판단력이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원인을 제거하는 수밖에…….’
아무래도 더 늦출 수 없을 것 같다.
그때 탁무겸이 물었다.
“도악, 사부는 아직도 찾지 못했느냐?”
“지금 천하 곳곳을 수소문하고 있습니다. 곧 소식이 올 것입니다.”
탁무겸은 은근히 짜증이 났다.
“다 죽어가는 늙은이가 뛰쳐나와서 귀찮게 하는군.”
* * *
청산자는 탁무겸보다 하루 늦게 서신을 받았다.
내용은 간단했다.
[탁무겸을 제거해주세요. 그럼 구천성에 대한 권한 일체를 진인께 넘기겠어요.]
청산자는 사마경이 이간계를 쓰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참으로 가소로운 짓이었다.
그 정도에 자신이 넘어갈 줄 알았나?
하지만 다음 말이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진인이 손을 쓰지 않아도, 탁무겸이 먼저 진인을 제거하려고 할 거예요. 어쩌면 이미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구천성이 암천문에 넘어가느니 차라리 청산궁에 넘어가는 걸 바라고 있어요.]
사실일까?
그래,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탁무겸은 언제든 그렇게 할 수 있는 놈이니까.
그렇다면 미리 대비해서 나쁠 것 없었다.
“영산.”
“예, 사형.”
“암천문에 대한 감시를 더 강화해라. 아무래도 놈들이 엉뚱한 생각을 품을지 모르니까.”
“예, 그리 하겠습니다.”
청산자는 영산자의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정도하가 서 있었다.
“도하야, 네가 무림맹에 좀 다녀와야겠다.”
“예, 사부님.”
“가서 제갈승조 몰래 우내이선을 만나 내 말을 전하도록 해라. 만약 내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소림과 종남만큼은 절대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조를 해줄 수 있다고 해.”
“알겠습니다, 사부님.”
“허허허허, 종무나 제갈승조는 노도가 그들을 잘 알고 있다는 걸 몰랐을 게다. 그들도 노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지. 하니 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게야.”
청산자의 수염 사이로 웃음이 번졌다.
세상은 자신에 대해서 절반 밖에 알지 못한다. 나머지 절반이 이번 내기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멍청한 탁무겸은 그것도 모른 채, 천하가 자신의 것이라도 된 듯 우쭐대고 있겠지만.
‘마지막에 이긴 자가 진정한 승자니라, 탁무겸.’
147장 이제 이야기 좀 나누어볼까?
장천운이 동문 밖 마을로 들어선 것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서 구름이 누렇게 물들어갈 때였다.
한참 붐빌 시간인데도 지나가는 자가 많지 않았다. 그나마도 대부분 무사들이었다.
낭인무사와 출세를 위해 달려온 무사, 구경꾼 등등.
장천운은 일단 밖에서 식사를 하고 저녁쯤 성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는 들어갈 만한 객잔을 찾으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사, 살려줘!”
주루에서 한 사람이 절박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뛰어나왔다.
그때만 해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뛰어나온 자의 얼굴이 이상했다.
얼굴의 붉은 반점이 보는 동안에도 점점 넓게 퍼졌다.
그러더니 결국……
“크억! 사, 살려…….”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피를 토하면서 꼬꾸라졌다.
“독?”
장천운은 그 증상의 정체를 바로 눈치 챘다.
독에 중독된 모습이 분명했다.
누가 이곳에서 독을 썼을까.
그럼 주루 안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것도 독 때문에?
몸을 돌린 그는 꼬꾸라진 자에게 다가갔다.
그보다 먼저 장한 하나가 그자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고 있었다.
“잠깐! 만지지 마시오!”
장천운이 소리치자, 손을 뻗었던 장한이 멈칫했다.
“왜 그러는 거요?”
“아무래도 독에 중독된 것 같소.”
그제야 상황을 눈치 챈 장한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급히 물러섰다.
장천운은 시신을 살펴보았다.
피를 토한 입술이 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피의 색깔도 지나치게 검붉었다.
언젠가 한번 봤던 모습이다. 장강을 건너 귀독마종을 쫓아갔을 때였던가?
고개를 돌린 그는 주루를 바라보았다.
주루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린 그는 주루로 걸음을 옮겼다.
주루 안에는 다섯 명이 쓰러져 있었다.
모두 무사들이었다. 그들의 상태 역시 밖에서 죽어 있는 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닥에 검과 칼 등 무기가 떨어져 있는 걸 보니 누군가를 공격하려다가 독에 당한 듯했다.
그때 주방의 뒷문 쪽으로 누군가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장천운은 즉시 그곳으로 가보았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저만치 건물을 돌아가는 자가 보였다.
거친 백발에 약간 구부러진 허리. 슬쩍 본 바로는 노인인 듯했다.
“멈추시오!”
장천운은 그를 쫓아서 건물을 돌아갔다.
뜻밖에도 도망치던 자는 멀리 가지 않았다. 예상대로 그는 노인이었는데, 오히려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장천운을 향해 두 손을 흔들었다.
“죽고 싶다면 원을 들어주마.”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마치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며 손을 흔드는 듯했다.
그러나 장천운은 노인이 결코 그런 뜻으로 손을 흔든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노인이 손을 흔든 순간 뭔가가 뿌옇게 퍼졌다.
급히 손을 뻗은 그는 허공섭물을 펼쳤다.
순간, 허공에 뿌려진 뿌연 가루가 그의 손을 향해 빨려 들어왔다.
그리고 한 자 앞에 도착했을 때, 치이익, 소리를 내며 연기로 변했다.
대경한 노인은 다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이런, 제길!’
독을 허공에서 태울 수 있는 고수는 천하를 다 뒤져도 이삼십 명이 채 안 되었다.
그런 고수에게 통할만 한 독이 지금은 없었다.
독을 제거한 장천운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즉시 노인을 쫓았다.
‘분명 그 늙은이야!’
노인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자였다.
마음만 먹으면 수백 명도 순식간에 죽일 수 있는 자.
귀독마종 당초당.
모습이 약간 달라졌지만 그가 분명했다.
‘저 늙은이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났지?’
그에 대해서는 잡은 후에 물어봐도 될 일.
장천운은 노인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사실 그의 신법이라면 귀독마종을 잡는 거야 조금도 어려울 것이 없었다.
문제는 독이었다.
귀독마종은 도망치는 와중에도 자신의 뒤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독을 살포했다.
장천운은 피하기도 어정쩡했다.
그가 피하고 독을 그냥 놔둔다면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갈 게 분명했다.
그는 왼손으로 원을 크게 그려서 독을 그 안으로 모조리 빨아들였다.
그리고 우수를 뻗으며 뇌정무극지를 펼쳤다.
삼 장 밖을 달려가던 귀독마종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펄쩍 뛰더니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장천운은 일단 손 안으로 빨아들인 독부터 태웠다. 독가루가 푸른 연기를 내며 타들어갔다.
단지 연기를 미세하게 들이켰는데도 코끝이 찡했다.
‘정말 독 하나는 천하제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군.’
독을 모두 태운 그는 귀독마종에게로 갔다.
고개를 겨우 돌린 귀독마종이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장천운을 노려보았다.
“귀독마종 당초당. 당신이 이곳에 나타날 줄은 몰랐군.”
귀독마종의 독기서린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자신을 알아보는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했다.
“네, 네가 어떻게 나를……?”
그것은 놀람의 시작에 불과했다.
“무적장에서 어떻게 탈출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도 참 재수가 없는 것 같소. 하필이면 나를 만나다니.”
“…….”
귀독마종이 눈을 부릅떴다.
“안 그래도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한번쯤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잘 됐어.”
“누, 누구냐, 넌?”
장천운은 대답대신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귀독마종은 장천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그만 절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어떤 얼굴을 떠올렸다.
순간, 그의 몸이 학질이라도 걸린 듯 덜덜 떨렸다.
“너, 너, 너는……!”
장천운은 귀독마종이 자결하지 못하도록 혈도를 마저 점혈했다.
“내가 누군지 알았다면 도망갈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장천운은 귀독마종을 사람들이 없는 갈대밭 속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진기로 소리를 차단해서 바로 옆을 지나가는 사람조차 대화를 들을 수 없게 했다.
“이제 대화를 좀 나누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