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39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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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91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391화
우문각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사마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가 말하기도 전에 사마경이 먼저 말을 이었다.
“최소한 시간은 벌 수 있을 거예요. 청산자와 탁무겸 사이가 다시 붙기 힘들만큼 갈라진다면 더욱 좋을 거고요.”
“아!”
우문각이 짧은 탄성을 발하며 눈을 크게 떴다.
구양명과 소연추, 연송하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사마경을 바라보았다.
거짓으로 적을 흔들겠다는 뜻이었던가?
그러나 사마경은 거짓으로 약속하려는 게 아니었다.
“탁무겸이 약속을 지킬 때까지 저들을 물리칠 방법을 찾아내세요. 시간이 많진 않을 거예요. 만약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면…… 저는 탁무겸의 부인이 되는 수밖에 없어요.”
그뿐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방팔방 소문내세요. 암천신마가 사마경을 부인으로 맞이하려고 한다고. 천운의 귀에 들릴 정도로. 흥! 소문을 들으면 하다못해 연락이라도 하겠죠.”
코웃음 소리가 어찌나 차가운지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 친구, 살아서 나타난다 해도 성하지 못하겠군.’
‘오빠도 참, 연락이라도 하지.’
* * *
“탁무겸이 사마경을 욕심낸단 말이지? 훗, 다 늙어서 이제야 계집을 찾다니.”
공손백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나이 오십이 넘은 그가 이제 겨우 스무 살의 사마경을 탐하다니.
물론 그의 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만큼 사마경은 아름다웠다.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그녀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가 사마경을 취했을 경우다. 사마경의 성격을 생각하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 일이 성사될 경우 자신의 꿈은 연기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럴 순 없지.’
“사마경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동백이 공손백의 마음을 간파하고 한마디 했다.
“그러겠지. 하지만 만에 하나의 경우도 생각해봐야 한다.”
“하오면……?”
“동백, 구천성에서 우리 힘이 어느 정도 된다고 보느냐?”
동백의 눈빛이 흔들렸다. 예전과 달리 자신감이 결여된 표정이었다.
“아마…… 사 할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랬다. 이제는 형세가 역전되어서 자신들의 힘이 사 할로 주저앉은 상태였다.
그것도 대장로인 나극과 합쳤을 경우에.
“어이없군.”
공손백은 나직이 한마디 내뱉으며 이를 갈았다.
몇 달 전만 해도 오 할의 형세였다.
연초에는 육 할이 넘었고.
가랑비에 속옷 젖듯 조금씩 사마경에게 넘어가더니, 흠칫 놀라서 뒤돌아봤을 때는 이미 뒤집혀 있었다.
“다시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동백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나직이 말했다.
“본 성의 무사들은 지금 암천문과 청산궁이 언제 공격해올지 몰라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을 이용한다면 많은 무사들이 흔들릴 겁니다.”
“어떻게 말이냐?”
“천외 세력과 협정을 맺자고 하는 것이지요.”
“협정?”
“구천성의 권역을 그들과 나누고 불가침 협정을 맺기로 하는 겁니다.”
“탁무겸과 청산자가 받아들일 거라 보느냐?”
“받아들이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군께서 그런 협정을 제안했다는 것이지요. 불안감에 휩싸인 무사들에게는 구천성의 권역이 나누어지는 것보다, 평화가 찾아와서 목숨의 위협이 사라지는 게 더 절실합니다.”
“사마경이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럼 주군께서 주도권을 쥘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마경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흐음, 그럼 그 이유를 대고 사마경을 밀어낸다?”
“그렇습니다.”
공손백은 잠시 더 생각을 하더니 입술을 비틀며 조소를 지었다.
“좋아, 나쁘지 않은 계책이야.”
* * *
사마경은 공손백의 말을 듣고 눈을 치켜떴다.
“청산궁과 암천문에 불가침 협정을 제안하자고요?”
“지금 상황에서는 나쁘지 않을 것 같네만.”
앞으로 얼마나 더 큰 피해를 입을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망할지도 모를 판이었다.
협정을 맺고 절반이라도 지킬 수 있다면 나쁜 결과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먼저 그런 제안을 한다는 것은 굴욕이었다.
“대령주께서 직접 나서실 건가요?”
사마경은 바로 반대하지 않고 일단 공손백의 의중을 떠보았다.
공손백은 직접 나설 마음이 없었다.
“굳이 내가 나설 것도 없네. 허락하면 사람을 보내겠네.”
“일단 면밀히 따져봐야 할 것 같군요. 싫어하는 사람도 많을 테니까요.”
“너무 오래 걸려서는 안 되네.”
공손백이 은근하게 압박했다. 사마경은 반발하지 않고 오히려 씽긋 웃어주었다.
“알았어요. 닷새 안에 알아보겠어요.”
닷새.
공손백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앞당기자고 우겨대기도 애매했다.
“내 말을 이해했다니 다행이군.”
“구천성의 생사가 걸린 일인데,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해봐야죠.”
* * *
술을 얼마나 퍼마셨는지 눈앞이 흐릿했다. 매일 마시다 보니 한시도 제정신일 때가 없었다.
그래도 맨 정신인 것보다는 나았다. 최소한 꼴사나운 모습은 보지 않아도 되니까.
“크크크, 신의도 지키지 못하면서 자존심을 찾으니 그렇게 당하지. 꺼어억.”
거하게 트림을 한 남궁호는 다시 술병을 잡았다.
그런데 거꾸로 세워서 흔들어 봐도 술잔이 반도 차지 않았다.
“이봐! 여기 술!”
점소이가 난감한 표정으로 어물거렸다.
“저기…… 공자님, 더는 드릴 수 없습니다요.”
휙!
술병이 빙글빙글 돌며 점소이를 향해 날아갔다.
‘이크!’
점소이는 재빨리 몸을 틀어서 술병을 피했다.
와장창!
술병 깨지는 요란스런 소리가 객잔을 침묵시켰다.
사람들은 기분이 상한 표정이었지만 함부로 말하지도, 나서지도 않았다.
상대는 대 남궁세가의 아들인 남궁호다. 아무리 세가에서 내놓은 신세라 해도 어엿한 가주의 둘째 아들.
잘못 건드렸다가는 똥 밟고 뒤로 자빠지다가 뒤통수를 똥에 처박는 꼴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는 남궁호 앞에 한 사람이 앉았다.
젊은 자였다. 잘해야 이십대 후반 정도의 나이.
얼굴은 평범했지만, 큰 키와 탄탄하게 다져진 몸매는 그가 단순한 일반인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여기 술 한 병 주게. 안주도 좀 주고. 걱정 말게, 내가 마실 거니까.”
그는 점소이에게 변명꺼리까지 챙겨주었다.
거기다 더해서 동전까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술값이 아니었다. 점소이에 대한 수고비였다.
점소이도 그걸 알고 눈빛이 반짝였다.
그래, 자신은 술을 남궁호에게 파는 것이 아니다. 저 멋진 공자에게 파는 것이다.
점소이는 재빨리 술을 챙겨서 그 청년에게 갖다 주었다.
청년은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남궁호의 잔에도 채웠다.
그제야 씩 웃은 남궁호가 흔들리는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났군.”
“아마 오늘이 처음은 아닐 거요.”
“그런가? 제길, 술이 떨어지니 기억이 가물가물하군.”
어이없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남궁호는 술잔을 들어서 목구멍 안으로 쏟아 부었다.
청년은 남궁호가 술잔을 내려놓을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남궁호는 탁 소리가 나도록 술잔을 내려놓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정말 나를 아나?”
“그렇소. 아마 남궁 형도 생각을 떠올려보면 나를 알 거요.”
“그래?”
남궁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술에 취했다고 해서 기억력까지 쇠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앞에 앉은 자는 본 적이 없었다.
“대가리가 새대가리가 되었나, 왜 생각이 안 나지?”
“작년에 시체를 마차에 태워서 보낸 적이 있을 거요. 관에 물을 잔뜩 먹이고, 관속에 숯과 돌을 섞어서 넣었더군요. 말도 다 늙어서 걷기도 힘든 노마였고. 나와 아가씨가 그걸 알고 얼마나 웃었는지 아시오?”
흔들거리던 남궁호가 석고처럼 굳었다.
청년은 그의 반응을 본 척도 하지 않고 자신의 말만 했다.
“어쨌든 그때는 약속을 잘 지켰던 것 같은데, 이제는 마음이 변한 모양이오. 하긴 가만히 있으면 넘어간 땅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 손해를 봐가면서까지 나설 필요는 없었겠지.”
남궁호의 눈자위가 푸들거리며 떨렸다.
“장……형?”
청년은 술잔을 들어서 단숨에 목구멍 속으로 털어 넣고 빈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쪼르르륵.
“나도 남궁가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소. 아마 나라 해도 고민했을 거요. 하지만 그 대가로……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거요.”
남궁호는 청년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구차스럽게 변명하지 않겠소. 대부분 사실이니까.”
웅얼거리듯 말하던 그가 술병을 잡더니 자신의 잔에 가득 따랐다.
청년, 장천운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남궁호는 술이 가득 찬 잔을 들어서 거칠게 목 안으로 쏟아부었다.
탕!
세차게 잔을 내려놓은 그가 장천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래도 확실한 건 하나 있소. 나는…… 약속을 어기지 않았소. 원한다면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갚을 거요.”
“내가 원하는 것은 남궁 형의 목숨이 아니오.”
“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빚을 갚을 방법은 그것밖에 없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요. 내가 여기에 온 이상은.”
남궁호의 탁하던 눈빛이 번들거렸다.
술에 쪄들어 붉게 충혈 된 눈인데도 오늘만큼은 왠지 불길이 일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원래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으려 했소. 그런데 누가 그럽디다. 남궁세가의 둘째 아들이 약속을 어긴 자책감 때문에 술만 퍼마시는 폐인이 되었다고.”
장천운이 말하면서 남궁호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그래서 온 거요. 어쩌면 이전의 약속을 다시 지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지키고 싶어도 세가는 이미 병이 깊게 들어서 잔뜩 곪아 있소.”
“병이야 고치면 되오. 썩은 고름은 짜내면 되고. 아주 철저히.”
“가능하겠소?”
“남궁 형이 약속을 지킬 의지만 있다면.”
“당연히…… 나는 약속을 지킬 거요.”
“그럼 오늘 밤 썩은 고름부터 짜냅시다. 술은 이제 그만 마시고. 할 일이 많으니까.”
남궁호가 씩 웃으며 술잔을 들어서 자신의 머리 위에 부었다.
“그러지 뭐.”
146장 적이 같으면 미워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새벽녘, 시비는 어둑한 방안의 침상 위에 조용히 누워 있는 노인을 넌지시 불러보았다.
“장로님…….”
아무런 대답도, 움직임도 없었다.
불길한 생각이 등골을 타고 기어오르자, 시비는 침상 가까이 가서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노인의 코에서 흘러나온 가느다란 핏줄기가 뺨을 타고 고여서 요에 붉은 꽃이 그려져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이 바짝 마른 시비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서 노인을 흔들어보았다.
“저…… 장로님.”
노인의 고개가 시비 쪽으로 꺾어지며 툭 떨어졌다.
시비의 눈에 반쯤 뜨고 있는 노인의 눈이 보였다. 노인의 눈에는 죽음에 대한 짙은 공포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시비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악!”
날선 비명이 세가의 새벽하늘을 뒤흔들었다.
단 하룻밤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런데 남궁세가의 분위기가 하루 전과 판이하게 달라졌다.
지난밤에 피바람이 소리 없이 불었다.
동이 틀 때부터 해가 동천으로 떠오를 때까지 발견된 시신은 모두 열다섯.
열두 명은 침실에서 죽어 있었다. 한 사람은 뒷간에서, 두 사람은 무공수련실에서 발견되었다.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아연한 마음이었다. 어제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들이 자고 일어나니 죽어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모두 남궁세가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 중에는 원로인 남궁여도 있었고, 청검당 당주인 남궁종도 있었다.
공통점은…… 청산궁에 세가의 정신을 팔아먹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남궁세가의 자존심을 땅바닥에 처박은 장본인들!
가주인 남궁력을 비롯해서 남궁세가의 고위 간부들은 그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 한 달, 세가는 격변을 겪었다.
세가의 원로와 장로, 고위간부 중 청산궁의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처음으로 알았다.
그들은 청산궁이 구천성을 공격하던 그때부터 가주인 남궁력을 압박했다.
“마를 타도하고 강호에 세가의 위세를 떨치려면 청산궁과 손을 잡는 것만이 답입니다, 가주. 부디 현명한 결정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지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아십시오. 청산궁을 거부한다면 가주도 그 자리를 지킬 수 없을 거요.”
“자식과 부인을 위험에 빠뜨려선 안 되지 않겠습니까?”
분노한 남궁력은 그들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그들의 힘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그들을 제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에게 밀려서 이름뿐인 가주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단 하루 만에 사정이 바뀌었다.
청산궁의 위세를 등에 업고 세가의 권력을 넘보던 자들이 하룻밤 만에 저승길로 달려간 것이다.
하지만 남궁력은 그 상황을 반기기도 애매했다.
만약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면, 누가 그들을 죽였단 말인가?
또 다른 세력이 남궁세가를 노리고 암투를 벌인 것 아닐까?
남궁력이 그들의 죽음에 대한 내막을 알게 된 것은 그날 점심 무렵이었다.
남궁호가 말끔한 모습으로 그를 찾아왔다. 지난 한 달과는 달리 눈에서 형형한 정광이 번뜩였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