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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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78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4화
파계 1권 - 4화
제2장. 외학전(外學殿)에 고수는 있는 것인가
소년은 푹~ 자고 있었다.
정말 간만에 푹 자고 있는데, 자꾸 귓가에서 파리가 앵앵거린다. 근데 가만히 소리에 집중해보니 파리 소리가 아니었다. 사람 말소리였다.
“정신이 드느냐?”
소년은 눈을 떴다.
온몸이 아픈 것만큼 눈도 뜨기 힘들었지만, 어찌 되었든 눈을 떴다.
반질반질. 번뜩번뜩.
파랗다 못해서 광채가 나는 몇 개의 머리통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니들 누구야?
“누… 누…….”
눈이 부셔서 머리통 좀 치우라고 소리치려 했다.
근데 왜 이렇게 소리가 안 나와?
소년은 짜증이 났다. 컬컬하게 목이 잠겨서 물 한 모금이라도 들이켜야 말소리가 나올 듯싶었다.
“물 좀 마시거라.”
반질반질한 대갈통들이 눈치는 빨랐다.
찔끔.
원래는 벌컥벌컥 마시려고 했지만, 입에 대준 물그릇을 시원스럽게 기울여주지 않으니, 고양이 물마시듯 입술과 혀에 물만 묻히는 형국이었다.
눈치 빠른 놈들. 맘에 드네! 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짜증이 인다.
하지만 소년은 그 짜증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물을 마시는 동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소림사!’
분명 소년은 죽을 둥 살 둥 하며 산을 기어올라 소림사 어쩌고저쩌고 쓰여 있는 절의 산문에서 쓰러졌다.
그러니 이곳이 소림사가 아니고 어디이겠는가. 또한 지금 눈앞에서 광채를 발하는 머리통들은 그 소림사의 중들이 분명했다. 무림에서도 그 위명이 자자한 소림의 중들.
그리고 소년은 그런 중들에게 최대한 선량하고, 처량한 모습으로 위장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소림사에서 몸을 보양하고, 무공이라도 몇 수 익혀야겠다는 나름대로 원대한 포부를 실현시킬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고개도 들지 못하고, 시야가 완전하게 트이지 않아 어떤 머리통이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소년은 대답을 해야 했다.
“예…….”
한마디뿐이지만, 너무나 처량하고, 불쌍한 음성.
소년의 목소리 연기는 꽤나 그럴듯하여 다시 말을 걸어오는 중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어찌 이리 중한 상처를 입었느냐?”
“그것이…….”
소년은 잠시 망설였다.
어찌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망설이는 것이 아니라, 의도된 망설임이었다.
산을 오르면서 어떻게 의심을 받지 않고, 소림사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점에 대해 깊게 생각을 했고, 소년은 충분히 그 문제를 타파할 해결책을 준비해놓았던 것이다.
“그… 그게 기억이…….”
얼굴은 잔뜩 찡그려져 있고, 눈가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혀갔다.
그리고 얼굴 전체에 점점 두려움이란 감정이 생겨나고 있었으니, 중들은 소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느냐?”
한 명의 중이 소년이 의도하고자 하는 바를 시원스럽게 물어왔다.
내심 환호를 지르고 싶은 소년이었지만, 얼굴엔 더욱 짙은 두려움을 그려냈다.
“저… 저는…….”
소년은 바들바들 떨었다.
뭔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떤 두려움에 휩싸여가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곧 한 명의 중이 소년의 양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아주 자애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되었다. 이제는 되었어. 아무 말도 말거라. 아무 생각도 말거라. 너는 지금 안전한 곳에 와 있으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소년의 떨림은 점점 잦아들었다.
그리고 중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훌륭해!’
자신의 완벽한 연기력에 소년은 스스로 찬탄을 금치 못했다.
하나,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깊은 상처를 입어 절 앞에 쓰러진,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신비의 소년을 좀 더 그럴듯하게 만들려면 하나 정도의 진실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유… 유원엽! 유원엽인데…….”
소년은 다시 몸을 떨었다.
얼굴에는 놀라움과 이름을 기억해냈다는 환히, 그리고 다시 두려움을 그려냈다.
“그… 그 이름을 잊으라 했습니다! 유… 유원엽을 버리고 오… 오칠로 살라 했습니다! 오칠로 살라 했습니다!”
과거 소년을 대신해 죽은 아이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소년이 종으로 팔려가 성노리개로 살아갈 때도, 늙은이와 다니게 되었을 때도 쓰던 이름이었다.
“알았다! 오칠! 그래, 너는 오칠이다!”
소년, 오칠이 크게 몸을 떨고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가자 중은 황급히 오칠의 몸을 감싸 안고 다독였다.
그만큼 오칠의 연기는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됐어!’
오칠은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이제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 되는 것이다.
‘근데 진짜 피곤하군.’
몸이 아직 낫지 않은 상태로, 격렬한 몸짓과 함께 과도한 연기를 펼치느라 기력이 많이 소진된 것이다.
그래서 오칠은 정신을 잃는다는 핑계와 함께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더할 수 없이 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이제는 소림사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심신이 편안하지 않을쏜가.
오칠은 그렇게 깊이 잠들었다.
* * *
댕~
아주 저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종소리.
이리 조용한 산사가 아니라면 들을 수도 없었을 종소리.
그리고 오칠이 있고자 했던 소림사에서 쳤을 종소리.
하지만 오칠은 그 종소리에 빠드득 이를 갈았다.
‘씨벌!’
한 식경이나 무릎 꿇고 있는 다리는 엄청 저리고, 눈앞에 앉아 있는 늙은 중과 좌우에 늘어앉은, 역시 늙은 그 중들의 시선에 울화통이 터진다.
“…그래서 본사에서 답문이 오는 대로 일 년의 기한을 잡고 너의 입전(入殿)을 허가하기로 하였다.”
눈앞에 앉은 늙은 중.
이곳, 외학전(外學殿), 더 정확히는 소림사외학전(少林寺外學殿)의 전주라고 하는 늙은 중은 불길이 와락 치밀어 오르는 오칠의 가슴에 기름을 끼얹었다.
하나, 오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얼굴에 더할 수 없이 기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왜냐하면 오칠 자신이 이곳에 남아 있게 해달라며 중들에게 졸랐고, 그래서 지금과 같은 결정이 내려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칠이 그렇게 조른 것은 이곳이 소림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림사에 남아 있기 위해, 무공이나 몇 수 배워보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갖은 연기를 다해서 중들을 속인 것도 다 그 이유였다.
그런데 이곳이 소림사가 아니라니!
불교경전이나, 그와 관련된 학문의 연구를 위해 소림사에서 나온 학승들의 거처라니!
‘코가 막히고, 입이 먹히고, 똥구멍까지 막힐 지경이다!’
그렇게 침을 튀기며 소리치고 싶은 것이 지금 오칠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죄다 똑같이 찍어낸 것처럼 둥글넓적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늙은 중들에게 그렇게 소리칠 수는 없었다.
경로사상이니, 노인공경이니 하는 것들 때문이 아니라, 엄연히 이들도 소림사의 중들이기 때문이었다. 설사 무공도 배우지 못한, 아니 배우지 않은 학승들일지라도 소림사 중은, 소림사 중.
그런 이들에게 악다구니를 쳤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어찌 알겠는가 말이다.
‘이게 운명인가!’
늙은이가 갑자기 죽어버린 순간부터 어쩌면 이미 예견된 수순일지도 모른다.
그 도끼파가 지겹게도 따라붙은 것부터가 오칠의 암담한 미래를 슬며시 알려준 것이고, 이렇게 웃기는 상황에 놓인 것도 다 그 맥락에서 이어 내려온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열다섯에 다시 한 번 시련이 오는 건가?’
오칠의 나이 여덟에 한차례 겪었던 시련이 또다시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절에서 액땜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 빌어먹을 악운이 절에서 지내다 보면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래!’
오칠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이곳이 소림사는 아닐지라도 그곳과 연계된 곳이고, 그러니 일단 도끼파의 지겨운 추적 망에서는 안전한 곳이 분명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겨울이 성큼 다가올 텐데, 이곳만큼 따듯하게 몸 성히 지낼 곳이 또 어디에 있을쏜가.
‘혹시 모르지. 이런 학승들이 바글바글한 곳에도 실력을 감춘 고수가 있을지.’
그렇게 생각하니 이곳의 전주라고 하는, 눈앞의 늙은 중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좌우에 늘어앉은 중들의 축 처진 눈매도 왠지 고강한 무공을 감추기 위한, 진실 된 실력을 감추기 위한 노고수의 지혜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성실하게 보이는 거야. 아~ 주 성실하고 뛰어나게 보여서 오~ 자네를 내 제자로 삼겠네! 라는 말이 나오게 해야지!’
누가 숨은 고수인지 명확하지 않으니, 모든 중들을 표적으로 삼아야 했다.
그리고 그만큼 쉽지 않은 연기를 펼쳐야 함이 분명했다. 하지만 잠깐 동안의 가식을 보여 무림에서 알아주는 소림의 무공을 얻을 수 있다면, 오칠은 그 정도의 귀찮음 정도는 감수할 마음이 충분히 있었다.
“그럼 이제 나가 보거라.”
전주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고, 오칠은 깊이 읍을 하고는 전주실(殿主室)을 빠져나왔다.
“따라오거라.”
밖에서는 전주의 방으로 길을 안내한 장년의 중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말라깽이 중을 가장 조심해야겠어.’
오칠은 몸을 휙 하고 돌려 앞으로 먼저 걸어가는 중의 뒷모습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담목.
오칠의 앞으로 걸어가는 중의 이름은 담목이라 했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요 이틀간 보았던 외학전의 중들 중에서 가장 차가운 인상을 가진 자였다. 한마디로 예사롭게 볼 수 없는, 뭔가 꼬투리가 생겨버리면 오칠의 숨겨진 이면을 단박에 눈치 챌 수 있는 자라는 뜻이었다.
“얼른 오지 않고 뭐 하는 게냐!”
짐작처럼 담목의 성질은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잠시 머뭇거렸을 뿐인데, 저리 성을 내다니!
‘알았다고, 이 좀생이야!’
오칠은 내심 욕을 내뱉으면서도, 겉으로는 송구하다는 듯 수줍은 웃음을 지으며 얼른 담목의 뒤로 바짝 붙었다.
‘그보다 여긴 왜 이리 궁색해?’
외학전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자면 방금 오칠이 나온 전주실을 중심으로 십여 개의 승방이 둘러싸 있고, 공양(밥)을 짓는 정재소(淨齋所), 여러 물품을 넣어두는 곳간(庫間), 책들이 비치되어 있는 서각(書閣) 등의 몇몇 건물들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하게 보이는 것들이 없었다.
한마디로, 없이 사는 절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곳, 외학전인 것이다.
‘그래도 소림사의 산하 외전인데, 이렇게 초라해서야…….’
이런 곳에 무공고수가 있기는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생겨날 정도였다.
하나, 어디서건 상식을 벗어난 구석이 있기 마련.
오칠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일단 이곳에 적응하며 고수를 찾아보기로 했다. 물론 성실하고 재능 있는 소년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꽤나 가식을 떨어야 한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긴 정재소?’
담목이 걸음을 멈춘 곳은 공양을 짓는 정재소의 앞이었다.
정재소에선 지금 밥을 짓는지 지붕 위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구정아.”
담목은 닫혀 있는 정재소의 문을 향해 생긴 것만큼 까다롭게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예~!”
끼익!
안에서 꽤나 두루뭉술한 음성이 들리더니 문을 열고 사람 하나가 뛰어나왔다.
‘흑돼지네.’
안에서 나온 사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랬다.
겉으로 드러난 피부는 까무잡잡하고, 좌우로 넓고 둥글게 퍼진 몸매, 이목구비가 명확하지 않을 정도로 빵빵하게 부풀어 있는 얼굴. 게다가 파랗게 반들거리는 머리까지.
키는 오칠과 비슷한데 무게는 그 두세 배를 상회하고도 남는 외견을 보자면, 자연히 흑돼지 한 마리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이네.’
키도 그렇고, 피부가 까맣다고는 해도 왠지 앳된 티가 나는 얼굴 모양새를 볼 때, 아마도 오칠과 그리 나이차가 없을 듯했다.
“구정이, 네가 이 아이를 맡거라.”
담목의 말에 오칠은 구정이라 불리는 행자승을 슬며시 살펴보았다.
‘나를 이 흑돼지에게 맡겨서 행자 생활을 가르치려는 거군.’
오칠은 늙은이와 지내왔던 오 년여 동안 많은 곳을 다닌 만큼, 여러 잡스러운 지식을 얻었고, 나름대로 식견도 꽤나 넓은 편이었다.
그래서 흔히 출가를 하여 절에서 어찌 생활을 하게 되는지 등등에 대해서도 아주 조금은 알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예, 담목 스님.”
오칠이 보기엔 굽혀지는 것이 신기하다 싶게 허리를 깊이 숙인 구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담목을 잠시 바라보다 오칠에게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