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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14화

무료소설 파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2,72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파계 14화

파계 1권 - 14화

 

 

 

 

 

하지만 노승은 길게 자란 새하얀 수염이 이리저리 흩어질 정도로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난 매순간마다 염불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많이 자제해서 아침저녁에만 할 뿐이야!”

 

오칠은 별로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를 하며 계속 웃어대는 노승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술 드셨죠?”

 

“먹었다.”

 

“노스님은 구원을 받았다 어쩐다 하시면서 가장 기본이라는 오계조차 지키지 않으십니까?”

 

오계란, 재가자나 출가자(出家者) 모두가 지켜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규범으로, 불살생(不殺生:살생하지 말라), 불투도(不偸盜:도둑질하지 말라), 불사음(不邪淫:음행을 하지 말라), 불망어(不妄語:거짓말을 하지 말라), 불음주(不飮酒:술을 마시지 말라)를 말하는 것이다.

 

“그건 네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이야.”

 

“제가 뭘 모른다는 겁니까?”

 

“살인이나, 음행은 계로 지정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죄악이다. 하나, 술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니다. 다만 술을 먹음으로써 죄를 유발시키는 행위를 할 수 있기에 절제시키려는 것이지. 하니, 죄를 행하지 않는 선에서 술을 즐기는 것은 계를 어김이 아니다, 이 말이다.”

 

“그건 술을 좋아하는 주당의 핑계일 뿐입니다. 전혀 설득력이 없어요.”

 

노승은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던 술 호리병을 들어 꿀꺽 한 모금을 들이켜고서 말했다.

 

“믿거나 말거나.”

 

노승은 오칠이 황당해하거나, 어쩌거나 상관없다는 듯 그 말만을 남기고서 숲 속으로 사라졌다.

 

“내 참.”

 

오칠은 피식 웃었다.

 

늘 저런 식이었다. 어쩔 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적 수준의 말을 하고, 어떨 땐 말도 안 되는 논리로서 억지 설득을 하려 했다.

 

그리고 늘 결론은 믿거나 말거나, 듣거나 말거나, 이해하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것이다.

 

“괜히 힘 빼지 말자.”

 

노승에 대해 신경 써보았자, 머리만 아팠다.

 

그보다는 왜 악몽을 꿨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더 속편한 일이었다.

 

“또 기가 약해진 게 아닐까?”

 

내공을 쌓게 해준다는 십팔나한공이었지만, 두 달이 다 되도록 내공이 쌓일 기미가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노승은 하루 한 끼밖에 먹지 않기 때문에 암자로 오고 나서의 오칠은 이전에 비할 수 없이 살이 쏙 빠진 상태였다. 한마디로, 곧 쓰러져도 전혀 이상한 상태가 아닌 것이다.

 

물론 약간의 과장이 섞인 평가였지만, 어쨌든 지금의 오칠은 기를 강하게 할 든든한 먹을거리가 필요했다.

 

“고기 좀 먹어야겠다.”

 

이전에는 영초, 영물인지 명확하지 않은 뱀과 풀만 먹었으니, 이번에야말로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리라 마음을 다진 오칠은 숲으로 들어갔다.

 

당연한 말이긴 하지만, 노승이 들어간 숲과는 반대쪽으로 말이다.

 

 

 

 

 

* * *

 

 

 

 

 

노승은 높이도 짐작할 수 없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수염이 나부끼고, 몸까지 날아갈 것같이 위태로웠지만, 노승은 도리어 편안함을 느끼는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세상은 왜 이리 좁누.”

 

노승은 긴 한숨과 함께 호리병을 꺼내들었다.

 

한데, 한 모금 마시려던 노승은 문득 조금 전 오칠이 그를 타박하던 말을 떠올렸다.

 

“불음주계라… 허허허, 그 어린 녀석이 참으로 나를 웃기는구나!”

 

노승은 유쾌하게 웃었다.

 

무엇이 그를 웃게 하는 걸까?

 

영악함.

 

이제 고작 십여 세의 불과한 오칠이 무공을 배우겠다고 잔뜩 가식을 떨어대는 것이나, 별 게 없다고 생각되자 오만불손하게 변한 것들. 그 모든 것들이 노승을 웃게 했다.

 

‘허나…….’

 

걱정도 되었다.

 

그 어린 나이에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거짓행동과 말을 한다는 것은, 오칠이 그만큼 세상의 험악함을 많이 겪었다는 말이었다.

 

순수함이 없는 아이.

 

그 말 자체만으로도 노승은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왠지 점점 강해지고 있는 좋지 않은 기운을 느낄 때마다 오칠에 대한 걱정은 더욱 커져갔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 사악한 기운에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

 

잠에서 깨어난 노승은 늘 그렇듯 편안하게 앉고, 누울 곳을 찾으러 숲으로 가려 했었다.

 

한데, 채 몇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오두막 안에서 풍겨오는 섬뜩할 정도의 사기에 걸음을 멈추고 만 것이다.

 

사실 노승은 요 며칠간 밤마다 그런 사기를 느끼고 있었다.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열락의 들뜬 듯한 표정으로 자고 있는 오칠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그때마다 조용히 불경을 읊조리며 다독여주곤 했었다.

 

한데, 오늘처럼 강한 사기는 처음이었다.

 

뭔가가 점점 강하게 오칠을 옭아매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처음엔 그저 마음의 상처가 큰 아이라 생각했더니만…….’

 

이제는 그런 감정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찌해야 하나, 하고 고민이 되었다. 십팔나한공으로 어느 정도 사기를 막아낼 수 있게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안심할 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으니까 말이다.

 

“사형들, 어찌해야 좋을까요?”

 

노승은 절벽 너머 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열반에 든 지 이미 육십 년이 넘은 사형들이었다. 하지만 노승은 고민이 있거나,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늘 그렇게 사형들에게 묻곤 했다.

 

“이 막내 사제는 아직도 부족하기만 합니다. 사형들이 보고 느낀 세상을 그렇게 많이 들었는데도, 너무나 작은 마음 때문에 제대로 담지를 못했나 봅니다.”

 

노승은 눈을 감고 뒤로 누웠다.

 

그리고 그때를 떠올렸다.

 

노승이 마흔에 불과한 나이일 때에 이미 팔십이 넘었던 사형들, 몸이 허약하여 늘 장경각에만 붙어서 불경만 읽던 노승에게 세상 이야기를 해주던 사형들, 열반에 들기 전에 노승이 걱정된다며 본신의 내공을 모두 주고 간 사형들.

 

사형들이 전해주고 간 그 막강한 내공 덕분에 어릴 때부터 너무나 병약하던 노승이 아직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이리 연약합니다.”

 

노승은 늘 마음속에 자리한 사형들에게 미안하여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사형들이 세상을 보기 전에 하늘을 먼저 보라 했던 그 말을 실천할 용기가 없어 그렇게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제9장. 소림사 뒷문 입성

 

 

 

 

 

“꺼억. 좋다!”

 

오칠은 눈앞에 수북하게 쌓인 뼈들을 내려다보며 불룩하게 솟은 자신의 배를 두드렸다.

 

“감사한다, 토끼들아.”

 

산토끼를 자그마치 세 마리나 구워 먹어버린 오칠은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목이 마른데.”

 

문득 술 생각이 간절했다.

 

사실 토끼고기가 구워질 때부터 술 생각이 났지만, 허기가 먼저인지라 잠시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배가 부르니 다시 술 생각이 났다.

 

“노스님이 술을 담가서 어디다 두었는지 진작 알아두길 잘했지.”

 

오칠은 들키지 않을 정도만 먹어야겠다, 하고 생각하며 얼른 오두막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오두막에 거의 도착한 오칠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할 오두막에 웬 중이 두 명이나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 더 가까워지자 오칠은 두 명 중 한 명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 그 무승이잖아!’

 

언젠가 서각에서 본 적이 있던 장경각의 승려이자, 십팔나한 중 빈도라발라타사라고 하던 담웅이었다.

 

오칠은 옷소매로 얼른 입가의 기름기를 닦아냈다. 그리고 전혀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는 듯 가식이 철철 넘치는 천진스런 표정을 지으며 걸어갔다.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까까머리에 얼굴까지 곱상한 오칠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합장을 하자, 더할 수 없이 완벽한 행자승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런 오칠을 담웅은 매우 흡족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마주 합장을 했다.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지 않은가?”

 

“예. 서각에서 한 번 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 서각에서 잠깐 봤었지.”

 

고개를 끄덕이는 담웅의 표정엔, 자네 예전보다 얼굴이 더 곱상해진 거 같네, 하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긴 두 달여 전 오칠이 서각에서 괴이한 꿈을 꾼 그날로 얼굴의 상처가 싹 사라졌으니, 그렇게 느낄 만도 할 것이다.

 

“그런데 자넨 이곳에서 기거하는 것인가?”

 

“예.”

 

오칠의 대답에 담웅은 괴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약간 망설이듯 왜 이곳에서 기거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노스님께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그 말은?”

 

불안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담웅의 표정만으로도 오칠은 그가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댁이 생각하는 그대로요!’

 

오칠은 잔뜩 오만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해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여전히 가식이 철철 넘치는 표정으로 말해주었다.

 

“부족하지만 노스님을 사부님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

 

담웅뿐만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젊은 중까지 얼굴색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야~ 이거 노스님의 위치가 생각보다 대단한 모양인데!’

 

오칠은 매우 흡족해졌다.

 

담웅은 십팔나한이 아닌가!

 

눈빛 하나만으로도 상대를 압도하는 고수를 당혹시켰다는 것부터가 매우 통쾌하고, 유쾌한 일이었다.

 

“허험! 그래, 노스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가?”

 

담웅은 슬며시 대화의 흐름을 바꾸었다.

 

아마도 관계 설정에 대한 난감함 때문에 대화를 지속시키기가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이거 재미있는데! 좋아. 오늘은 일단 참아주고, 다음에 두고 보자고.’

 

사적인 목적을 위해 노승을 사부로 모셨지만, 그리고 그의 배분이 높다는 걸 알고 약간의 기대감은 있었지만, 이렇듯 직접적인 결과가 있을 줄은 몰랐다.

 

배분이 높아도 노승은 그저 학승일 뿐이고, 소림사의 고승(高僧)들이 보다 높은 불법을 수도하는 곳이라는 소림사 계지원(戒持院)의 양심당(養心堂)에 있는 것도 아닌, 이런 초라한 암자에 기거하는 노승이 뭐 대단할 것이 있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담웅의 표정은 오칠에게 기대 이상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글쎄요, 노스님께서는 워낙 정해진 곳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어서…….”

 

“대략 어디에 주로 계시는지는 알지 못하는가?”

 

“몇 군데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리 안내해주게.”

 

“그러지요.”

 

오칠은 내심으로 꽤나 즐거운 기분이 되어 담웅 등을 이끌고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노승이 있기를 좋아하는 곳들을 쭉 돌아다닌 끝에, 절벽에 누워 있는 노승을 찾아냈다.

 

“사부님!”

 

오칠은 잘 부르지도 않던 호칭으로 노승을 불렀다.

 

처음 노승이 그리 부르지 말라 한 데다 오칠 자신도 노승이 별게 없음을 알고부터 그리 내켜하지 않았던 호칭인데, 지금은 담웅 등을 의식하여 입에 올린 것이다.

 

그것도 꽤나 크고, 친근한 음성으로 말이다.

 

“본사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운 채로 고개만 돌려서 너 왜 그러냐? 하고 쳐다보는 노승에게, 오칠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마치 제자로서 사부를 대하는 모습이 이래야 한다는 듯, 보고 있는 담웅 등이 다 감탄할 정도로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누구냐?”

 

노승은 몸을 일으켜 앉으며 담웅을 쳐다봤다.

 

“장경각의 담웅이옵니다.”

 

“아~ 예전에 굉진이 데려왔던 그 곰이구나!”

 

무릎을 치며 노승이 소리치자, 담웅은 약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노스님. 제가 그때 그 곰입니다.”

 

“근데 왜 왔냐?”

 

십수 년 전에 한 번 제 사부를 따라서나 왔던 놈이, 여긴 어인 일로 왔냐는 듯 노승은 담웅을 빤히 쳐다봤다.

 

“방장 스님께서 노스님을 뫼시고 오라 분부하셨습니다.”

 

“방장께서?”

 

십팔나한인 담웅을 어린애처럼 대하는 노승도, 소림 방장에 대한 언사에는 꽤나 무게감을 두었다.

 

‘아주 노망난 건 아니었군.’

 

바로 조금 전까지 오칠은 노승이 노망났건, 벽에 똥칠을 하건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정신이 온전해야 오칠 자신이 소림사에서 매우 높은 항렬이란 것을 증명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항렬로 밀어붙여서 무공을 익힐 수도 있지 않겠어? 아! 저 사람이 장경각에 있으니, 그 무공비급의 보고라는 장경각에도 수월하게 들어 가볼 수도 있겠구나!’

 

생각만 해도 온몸이 짜릿해질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무슨 일로?”

 

“희귀한 문자로 된 고서가 장경각에 들어왔습니다. 해서 노스님께서 한번 보아주시기를 부탁드린다 하셨습니다.”

 

“그래?”

 

노승은 별거 아니었군,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두막이 있는 곳을 향해 손짓했다.

 

“가자. 서둘러 가야 늦지 않게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오칠아.”

 

“예, 사부님.”

 

“너도 같이 가자.”

 

노승이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데리고 가달라고 떼를 쓸 마음의 준비까지 하고 있던 오칠은 얼른 네! 라고 대답했다.

 

“근데…….”

 

문득 걸음을 멈춘 노승은 담웅을 돌아보았다.

 

“지금 가면 밥은 줄 테지?”

 

“예? 그것이 아직 공양 시간이 되지 않아서…….”

 

“그래서 안 준다는 거야?”

 

“아닙니다! 가면 곧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근데 요즘 뭐 변한 것 좀 없나?”

 

“무슨 말씀이시진?”

 

“공양에 고기 같은 거 얹어주고 그러지 않나?”

 

담웅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여전히 그 나물에 그 밥이겠군.”

 

노승은 뭔가 아쉽다는 듯 입을 쩝쩝 다시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이해하십시오.”

 

오칠은 멍한 표정을 짓는 담웅에게 그 기분 이해한다는 듯 합장을 해 보이고는, 얼른 노승을 쫓아갔다.

 

“이거 참.”

 

담웅은 고개를 내저으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제자와 함께 오칠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