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13화
무료소설 파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7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13화
파계 1권 - 13화
‘노스님께선 무공을 익히셨습니까?’(전에 했던 말을 인용할 땐 한 줄씩 띄었습니다)
어떨 땐 노망난 늙은이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어쩔 땐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기행을 보이는 노승이, 진정 무공을 익혔는지, 안 익혔는지를 도저히 판단 내릴 수 없어 물은 것이었다.
‘익혔지.’
노승을 숨길 것도 없다는 듯 그렇게 말했고, 그래서 오칠은 무공을 배우고 싶다고 직접적으로 간청을 했다.
‘정 원한다면 가르쳐주마.’
매우 힘이 들 것이라는 엄포와 함께 허락한 노승에게 오칠은 정말이지 감격했다.
가식도 아니고, 연기도 아닌,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난 감격이었다. 한데, 지금은 왜 그때 그리도 순진했었는지,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이게 무슨 무공이야!’
기초가 중요하다는 말은 노승에게 듣기 전에도 죽은 늙은이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었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그때도 이 마보란 것을 지겹도록 했었다. 그래서 지금의 이 튼실한 다리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한데, 늙은이와 지낸 오 년 동안 해왔던 이 지겨운 짓을 또 해야만 하다니. 오칠은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을 지경이었다.
‘알아서 가르쳐주길 바라는 내가 어리석은 것이지.’
오칠은 괜히 이리저리 돌려서 말하는 것이 노승에겐 전혀 통하지 않는 방법이란 것을 요 며칠간의 생활을 통해 깨달은 상태였다.
“노스님, 이런 외공의 기초도 중요하지만, 내공의 기초도 역시 무공을 수련하는 필수 요소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럼 그것도 가르쳐주십시오! 하는 눈빛으로 노승을 쳐다봤다.
“아~ 알겠다. 하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무슨 때?
이 마보란 헛짓을 열흘간이나 하면서 오칠 자신에게는 의미 없는 수련이라는 걸 몸소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만, 할 때까지 몇 시진을 버티어냈으니, 노승이 이놈 하체 하나는 튼실하구나! 라고 생각하고도 남아야 이치에 맞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때가 아니라니!
“이놈! 또 의심을 하는구나!”
불만스런 감정이 너무 얼굴에 드러난 걸까?
문가에 기댄 자세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는 노승의 노한 음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렸고, 할 수 없이 오칠은 소인의 부족한 마음을 탓하여주십시오, 라는 가식적인 말을 내뱉으며 반성하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틀 뒤부터 내공 수련하는 법을 알려주겠다.”
오칠의 얼굴이 대번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노스님!”
진짜일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노승은 정말로 이틀 뒤부터 내공을 쌓을 수 있는 행공을 가르쳐주었다.
“십팔나한공(十八羅漢功)이다.”
행공의 이름이었다.
오칠이 들은 적이 있었던 소림사의 여러 유명한 무공들 중에는 있지도 않은 것이지만, 그래도 내공을 쌓을 수 있는 행공이라 하기에 오칠은 가르치는 대로 열심히 노력하여 익혔다.
그리고 단 이틀 만에 완벽하다 싶게 펼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선인공수(仙人拱手), 패왕거정(覇王擧鼎), 좌우삽화(左右揷花), 고수반근(枯樹盤根), 야차탐해(夜叉探海), 추창량격(推窓亮格), 위타헌저(韋陀獻杵), 노승입선(老僧入禪), 철우경지(鐵牛耕地), 청룡파미(靑龍擺尾), 좌우편마(左右騙馬), 연자탁수(燕子晫水), 호분인신(虎奔人身), 진단대곤(陳團大困), 부자삼청례(父子三請禮), 이어타정(鯉魚打挺), 장료헌포(張遼獻袍), 금구괘옥병(金鉤掛玉甁).
그럴듯하기 그지없는 이름의 초식들로 이루어진 행공이었다.
‘염병!’
하지만 막상 익히고 수련하다 보면 욕만 나오는 행공이었다.
동작이 너무 단순하고 쉬워서, 이런 게 무슨 내공수련공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인 것이다.
“노스님, 정말 이 행공으로 내공을 쌓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럼!”
노승은 추호도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또한 모든 소림내공의 기초가 십팔나한공으로부터 시작하며, 척마(斥魔)의 놀라운 효용까지 있다고 설명했다.
‘척마? 그런 효용성이 있어보았자 내게 무슨 필요가 있어?’
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받고, 기가 차고, 헛웃음만 나오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칠은 십팔나한공의 수련을 게을리 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하기 싫었지만 현실은 그런 오칠의 마음을 잔인하게 배반하고 있었다.
‘하루 세 번의 수련을 단 한 번이라도 빼먹으면 쫓아내겠다고?’
노승은 그렇게 엄포를 주었다.
가르쳐달란 것은 오칠이었고, 노승은 그저 간청을 하니 들어준 것이 분명한데도, 이제는 노승이 더 악착같이 수련을 시키려 하고 있었다.
‘내가 더러워서!’
안 배워! 라고 버럭 소리친 뒤 뛰쳐나가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지만, 아직 겨울이 지나려면 두 달 정도는 더 지나야 했고, 여전히 위험성이 다분한 현실 앞에서 오칠에게 다른 방도는 없었다.
‘그리고…….’
십팔나한공을 수련하면서 한 가지 좋아진 점이 있었다.
바로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악몽!’
양피지를 해석하면서 꾸기 시작한 빌어먹을 악몽.
오칠은 그 양피지가 불타 사라지고, 계승자니 어쩌니 하는 괴이한 꿈을 꾸고 나서 더 이상 악몽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한데, 그런 착각은 하루뿐이었고, 곧바로 매일 밤마다 지독한 악몽이 오칠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지독한 악몽.
악몽을 아주 명확하게 표현한 말이었다.
그 전까지 꾸었던 악몽은 차라리 살포시 어깨를 적시는 가랑비라 하면, 이후로 꾸기 시작한 악몽은 온몸을 날려버리고도 남을 폭풍우였다.
별의별 괴물이 다 나오고, 별의별 욕망의 그림자가 다 출현하는 꿈이었다.
가끔은 제법 흡족한, 그러니까 사내에겐 매우 야릇한 꿈으로 시작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결국 잔혹한 악마의 형상으로 변해 더욱 섬뜩하게 꿈을 뒤덮곤 했다.
그런데 그런 악몽이 십팔나한공을 수련하면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더구나 악몽을 꾸면서 괜히 화가 나고, 짜증이 늘어 이성적 판단력이 많이 떨어졌다는 걸 느끼곤 했는데, 그것까지도 많이 좋아지게 되었다.
뭐랄까, 좀 더 차분해진다고나 할까.
‘척마의 효용이라…….’
마를 제압하고 어쩌고 하는 것에 대해 그리 믿음이 없던 오칠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워낙 지독한 악몽이라 감히 수련을 멈추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가 않았다.
‘염병!’
여하튼 이러저러한 상황을 따져보아도 정말 욕만 나왔다.
그리고 노승과 관련된 모든 것에 짜증이 솟구치게 만든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으니, 바로 노승이 그의 말과는 달리 이렇다 할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오칠 스스로 알아낸 것이 아니라, 공양을 갖다 주는 정재소 행자승에게 들어 알게 된 것이었다.
‘노스님은 소림사 최고의 배분과 학식을 가지셨지만, 무공과는 그리 관련이 없으신 분이야. 내가 듣기로, 노스님의 사형이셨던 분들은 소림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엄청난 경지에 오른 무승들이셨지만, 노스님은 그렇지 못하셨다고 들었거든. 그저 학문적인 능력으로 인정 받으셨다나. 아, 아마도 십팔나한공 정도는 익히셨을 거야. 예전 소림사의 중들은 신체단련이라는 자기 수행의 의무를 위해 기본적으로 십팔나한공을 익히게 되어 있었거든. 물론 외학전이 분리되어 나오면서 우리 같은 학승들은 그러한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되게 되었지만 말이야.’
행자승의 말을 듣고 오칠이 얼마나 분노했던가.
겉으로는 그리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가슴의 분노만으로도 수백 명은 죽이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이미 늦은 상황이고, 오칠은 노스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시간만 때우자.’
그렇게 마음을 다스렸다.
믿음이 깨지고, 기대가 깨져 속상하기는 하지만, 그 외에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마음을 다독였다.
이를테면 좀 더 안전한 암자로 오게 되었다거나, 외학전과 달리 학승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것, 그리고 노승이 시도 때도 없이 해주는 여러 이야기들로 인해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졌다는 것 등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굳이 하나를 더 꼽자면…….
‘난 소림사에서 두 번째로 배분이 높고, 무림에서도 그렇잖아!’
그것이었다.
누가 인정해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오칠은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 * *
“으아!”
오칠은 번뜩 잠에서 깼다.
가슴은 두려움으로 가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솟았다.
‘죽이고 싶다!’
죽이고 싶었다.
누군가든 눈앞에 보이면 죽여 버리고 싶었다.
발갛게 충혈된 오칠의 눈동자에선 너무나 강렬한 살의가 피어올랐다. 이유도 없고, 왜 그런지도 알 수 없었지만, 두 손을 핏물에 담그고 싶다는 욕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을 헤집었다.
‘악몽을 꿨구나.’
오랜만에 꾼 악몽이었다.
암자에서 지내고, 십팔나한공을 수련하는 두 달 동안 꾸지 않았던 악몽이었다. 한데, 조금 전에 그 악몽을 다시 꾼 것이다.
‘왜?’
왜일까?
변함없이 십팔나한공을 수련하고 있는데, 왜 다시 악몽을 꾼 것일까?
“윽!”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뭔가가 머릿속을 강하게 울렸다. 죽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싸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정확히 뭐라고 하는지 명확하진 않지만, 매우 잔혹하고, 폭력적인 무언가를 요구하는 울림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지금 당장이라도 오두막을 박차고 나가야 한다는 욕망이 치솟았다. 그리고 오칠은 몸을 일으키며 그런 욕망에 따라 움직이려 했다.
한데, 순간 오칠의 정신을 일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노승이 염불하는 소리였다.
매일같이 하는 염불이지만, 오두막에서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오칠의 마음이 차분해졌다.
분노와 살의만이 가득하던 흉포한 마음이 조금씩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염불소리가 나직해져가고, 오칠의 마음은 완전히 안정을 찾았다.
오칠은 침상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
노승은 마당이라 할 수도 있는 오두막 앞에 한 손으로 머리를 베고 누워 있었다.
염불을 하면서 저리 불경한 자세라니.
하지만 오칠은 그 모습이 더 없이 편해 보였다. 아직 겨울도 다 지나지 않은 날 아침에, 땅바닥에 누워 염불을 하는 것은 정신 나간 행동이라 볼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리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노승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 그저 공부만 많이 한 늙은 중이라는 걸 알고 경외심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지만, 오칠은 지금 노승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늘 하던 염불을 한 것이겠지만, 이성을 잃고 분노하려 했던 자신을 진정시켜준 노승에게 고마웠던 것이다.
하지만 고맙다는 마음과 달리 오칠은 말을 잔뜩 비꼬아서 노승을 타박했다.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염불을 하는 것이 지겹지도 않으십니까?”
오칠의 말투는 이미 오래전에 바뀌어져 있었다.
노승을 공경했던 모든 것이 가식이었고, 무공을 익히기 위한 수단이었으니, 그런 모든 것이 무너져버리자 말투도 같이 무너진 것이다.
더구나 이제는 날도 많이 풀려서 이곳에서 쫓겨난다고 해도 그리 큰 걱정이 없어서 모든 행동과 말투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싸가지 없어져버렸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노승의 반응이었다.
오칠이 공경의 자세로 가식을 떨 때나, 지금처럼 오만불손할 때나 변함없이 한결같은 태도로 오칠을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점 때문에 오칠의 태도가 더욱 오만불손해진 것일지 모른다.
“극락왕생을 비는 데 그렇게 자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보름의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쯤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 녀석아, 난 극락왕생을 얻기 위해 염불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라고요? 그럼 뭐 하러 염불을 해요?”
“내가 하는 염불은 구원 받은 것에 대한 감사와 보은의 의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노승은 땅바닥에 완전히 누워서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보았다.
“염불을 해서 훗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염불을 외우는 순간 나는 이미 구원을 얻은 것이니라.”
오칠은 코웃음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