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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10화

무료소설 파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2,71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파계 10화

파계 1권 - 10화

 

 

 

 

 

하지만 무엇이든 하면 할수록 는다고 했던가.

 

처음엔 한 걸음 한 걸음 눈길을 밟아가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고 어색했지만, 조금씩 요령도 생기고 익숙해지면서 오칠의 걸음은 점점 빨라져갔다.

 

게다가 앞으로 걸으며 팔을 휘젓고, 손가락을 움직여보니 살만 부풀어 오른 것일 뿐, 무게감이 없어 행동하기엔 그리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그냥 몸만 불었다는 말이군. 그렇다면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부기가 가라앉게 되는 걸까?’

 

그리되면 더없이 좋을 테지만, 그건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조용하네.’

 

오칠을 찾으려 했다면 아직 불도 꺼지지 않았어야 하고, 누군가라도 나와 있어야 했지만 외각전 주변은 고요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어느새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 되었으니, 모두가 잠이 들어 있다는 뜻인 것이다.

 

‘말을 잘 했나보군.’

 

정재소 행자승이 제법 훌륭하게 변명을 해둔 모양이었다.

 

‘오늘 밤은 서각에서 있어야겠다.’

 

혹시 누구라도 찾았었다면 서각에서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고 핑계를 대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양피지의 해석이었다. 딱 두 마디가 남은 내용을 마무리 지으려는 것이다.

 

뒤뚱뒤뚱.

 

좌우로 몸을 흔들며 조심스럽게 걸었다.

 

눈 때문에 길도 미끄럽고, 발소리에 누군가 깨기라도 하면 좋을 것이 없으니까.

 

‘잘들 자는군.’

 

오칠은 행자승들이 자는 승방을 슬쩍 쳐다보고는 꺾어진 길로 들어섰다.

 

한데, 순간 눈앞으로 무언가 검은 것이 확 덮쳐오는 것이 아닌가.

 

퉁― 떼구르르.

 

엄청난 힘에 밀린 오칠은 공처럼 부풀어 오른 몸 때문인지 바닥을 몇 바퀴나 굴러서야 멈출 수 있었다.

 

오칠은 곧바로 허리를 뒤틀고, 무릎을 땅바닥에 댄 뒤, 손으로 바닥을 짚고 벌떡 일어났다.

 

“……!”

 

밀쳐져 바닥을 굴렀다는 것에 화가 난 오칠은 일어나자마자 버럭 소리치려 했지만, 막상 일어나 상대를 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앞에는 검은 복면을 한 자가, 유일하게 구멍이 뚫려있는 눈에서 섬뜩하리만치 붉은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으니까.

 

‘날 죽일지도 모른다!’

 

오칠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느낌이 강하게 뒷골을 당겨 와서 어떤 방도든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 아~ 아~”

 

오칠은 입을 뻥긋거리며 어~ 어~ 하는 소리만 내고, 손으로는 이상한 모양을 흉내 냈다.

 

‘벙어리군.’

 

흑의복면인은 눈앞에 서서 이상한 소리를 내는 돼지같이 뚱뚱하고, 피부는 까무잡잡한 중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숨겨져 있다는 범망경(梵網經)을 구했다고 너무 마음이 들떴지.’

 

걷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중하고 부딪치다니.

 

고강한 무공을 소유한 복면인에게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죽일까?’

 

복면인은 잠시 고민했다.

 

중은 계속해서 손으로 이상한 모양을 흉내 냈고, 뭐라 뭐라 입을 뻥긋거렸다.

 

‘살려주지.’

 

오늘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물론 복면인은 기분이 좋다고 죽일 사람을 죽이지 않는 넓은 아량을 가진 이는 아니었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다는 것 이상으로 기념할 만한 날이 아닌가.

 

‘벙어리니까 문제가 될 것은 없겠지.’

 

그래서 죽여서 입막음을 하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대신 손을 뻗어 중의 혈도 몇 개를 제압했다. 단순히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뿐만이 아니라, 몸의 내부 기혈의 절반 이상을 엉망으로 만드는 극악의 점혈수법이었다.

 

‘지금은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점혈수법 때문에 석 달을 넘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오늘 밤새 이러고 있어야 할 테니, 석 달이 문제가 아니라 오늘 밤 당장 얼어 죽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복면인은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충분한 아량을 베풀었고, 오늘의 일을 기념했다고 생각했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그 말을 남기고, 흑의복면인은 사라졌다.

 

“…….”

 

복면인이 사라지고도 오칠은 석상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이상한 모양을 흉내 내던 오칠의 손과 뻥긋거리던 입은 그대로 굳어 있었다. 복면인에게 점혈되었으니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곧 슬며시 풀리더니 오칠은 팔다리를 움직였다. 복면인의 점혈은 절정고수라 해도 풀 수 없는 고명하고, 악독한 것인데, 놀랍게도 오칠에겐 소용없었던 것이다.

 

‘방금 내가 당한 것이 점혈이었나?’

 

늙은이와 돌아다닐 때, 무림인들의 싸움을 구경하다 몇 번 본적이 있었지만, 직접 당해보기는 처음이었다.

 

‘근데 그 복면인, 엄청난 기세에 비해서 점혈수법은 좀 허접하네.’

 

지난날 보았던 무림인들도 점혈에 당하면 일각이 넘도록 움직이지 못했었다.

 

그런데 오칠은 금방 움직일 수 있었으니, 그리 생각할 만도 했다. 오칠은 지금 자신의 몸이 괴이한 변화를 맞으면서 그 어떤 막강한 점혈도 통하지 않는 상태임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근데 이거 잘한 일이려나?’

 

오칠은 품에서 손바닥만 한 네모난 금패를 꺼내들었다.

 

금패는 오칠의 것이 아니라, 조금 전에 사라진 복면인의 것이었다. 몸에 습관처럼 배어 있어서 복면인과 부딪치는 순간 배수짓을 해버린 것이다.

 

사실 그런 자의 품에서 뭔가를 훔쳐내는 것은 목숨이 걸릴 정도로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오칠은 본능처럼 해버리고 만 것이다.

 

“하여튼 습관이 무서워.”

 

오칠은 한숨을 쉬며 금패를 살펴보았다.

 

“어라? 진짜 금이네!”

 

겉에만 칠한 것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무게로만 친다면 금 다섯 냥의 값어치는 훌쩍 넘을 것이다. 하지만 오칠은 금패를 가지고 싶다는 욕심을 버렸다.

 

“그자에게 죽게 될 거야.”

 

오칠은 그 복면인이 다시 올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이 금패는 어떤 지위를 말하는 아주 중요한 증표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근데 무슨 무늬가 이따위냐?”

 

금패의 한쪽 면엔 하나의 눈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 눈동자가 사람의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고양이의 그것처럼 생겨서 보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어? 아리만?”

 

금패의 또 다른 면을 본 오칠은 깜짝 놀랐다.

 

양피지의 내용을 해석하면서 알게 되었던 단어, 페르시아어로 아리만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지?’

 

이런 우연도 있을까?

 

가만 생각해보니 그 복면인이 왔던 방향에는 서각이 있었다. 그리고 금패를 빼내면서 그의 품에 책이라 생각되던 것이 있었음을 기억해냈다.

 

즉, 그 책은 양피지가 끼어 있던 범망경일지도 모른다. 복면인은 범망경, 혹은 그 안에 있던 양피지를 찾으러 온 것이고 말이다.

 

‘이거 뭔가 굉장히 심각해지는걸.’

 

금빛이란 늘 오칠의 기분을 좋게 했다.

 

하지만 지금의 오칠은 금패에서 뿜어지는 빛이 전혀 예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숨통을 죄어오는 올가미처럼 느껴져서 당장 손에서 떼어내고 싶었다.

 

‘떨어트린 것이라 생각하게 해야지.’

 

오칠은 금패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 복면인이 돌아와 찾아가면 좋고, 다른 누가 집어가도 상관없었다. 그저 오칠 자신의 몸에서만 멀리 떨어트려놓으면 되는 것이다.

 

“얼른 가서 해석이나 하자.”

 

오칠은 서각이 있는 곳으로 다시 뒤뚱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저벅저벅.

 

조금 뒤, 오칠이 서 있었던 곳으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졸졸졸졸.

 

구정이었다.

 

잠을 자다 소변이 마려워 나온 모양이었다.

 

“응?”

 

볼일을 다 끝내고 다시 승방으로 돌아가려던 구정은, 땅바닥에서 반짝거리는 뭔가를 발견하고 쪼그려 앉았다.

 

“금이다!”

 

구정은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순간적으로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런 귀한 것이 왜 여기 떨어져 있지?’

 

잠시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구정은 망설임 없이 금을, 오칠이 버리고 간 금패를 집어 들었다.

 

금패의 면에 정교하게 새겨진 눈과 전혀 생소한 모양의 문양이 더욱 값어치 있게 보여서, 구정의 가슴 가득 탐욕이 커져갔다.

 

‘나중에 속세로 내려가면 팔아먹어야지!’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중이 산 아래로 내려가 수행을 하며 밥을 빌어먹는 탁발을 하려면 여간 귀찮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닌데, 구정은 이 금패로 인해 그러한 염려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의 즐거움, 이를테면 술과 여자를 만끽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슴 가득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몸에서 절대 떼어놓지 않을 테다!’

 

구정은 금패를 품속 깊이 잘 집어넣고는, 승방이 있는 곳으로 들뜬 걸음을 내딛으며 돌아갔다.

 

 

 

 

 

* * *

 

 

 

 

 

“어디 보자.”

 

오칠은 양피지를 탁자 위에 펼치고 쓱 훑어보았다.

 

“일 장, 광명의 신 아후라 마즈다여, 암흑의 신 아리만이여, 성스러운 불꽃에 몸을 담가 찬양합니다. 이 장, 투쟁하라, 선을 위해 투쟁하고, 악을 위해 투쟁하라. 그리고 삼 장, 받으라, 선악의 경계에서 심판의…….”

 

심판의, 까지가 오칠이 지금까지 양피지를 해독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오칠은 삼 장의 마지막 두 단어를 알기 위해, 지금 책들을 살펴보며 해석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거다!”

 

한 시진을 넘게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오칠은 환호를 지르며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니까… 그… 날을… 예비… 하… 라?”

 

이게 끝인가? 하는 생각에 허무함이 들었다.

 

특별하다 할 뜻도 없었고, 이상한 종교의 교리 같은 느낌일 뿐, 왜 자신이 그동안 해석해야 한다는, 그 뜻을 알아야 한다는 욕망에 시달렸는지 이해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오칠은 양피지를 눈앞에 들고서 첫 문장부터 차분하게 읽어 내려갔다.

 

“광명의 신 아후라 마즈다여, 암흑의 신 아리만이여, 성스러운 불꽃에 몸을 담가 찬양합니다.”(줄갈이한 것을 다시 이었습니다)

 

순간, 알 수 없는 열기가 오칠의 가슴에서 피어올랐다.

 

오칠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뭔가 대단히 잘못되어간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오칠은 그러한 열기를 느끼며, 의문을 가지면서도 양피지를 읽어 내려가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읽고 있는 양피지의 글자가 붉은빛을 내기 시작한다는 걸 알면서도, 놀라지 않는 자신이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투쟁하라. 선을 위해 투쟁하고, 악을 위해 투쟁하라.”(줄갈이를 이어줬습니다)

 

오칠의 가슴에서 일어난 열기는 더욱 크게 불타올랐다.

 

마치 용암처럼 뜨거워진 열기는 심장이 뿜어내는 붉은 선혈을 타고, 순식간에 위로 솟구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붉은빛을 내는 양피지의 글자는 눈부실 정도로 진해져갔고, 오칠의 목소리는 마치 쇠를 가는 것처럼 듣기 싫게 갈라지고, 음침해져갔다.

 

“받으라.”

 

양피지의 글자에서 뿜어지는 붉은빛이 오칠의 손을 잠식해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오칠의 전신을 뒤덮었다.

 

“선악의 경계에서 심판의 그날을 예비하라.”

 

놀라운 변화에도 멈추어지지 않는, 오칠의 의지를 벗어난 입이 양피지의 마지막 문구까지 읽어 내려갔다.

 

화아―!

 

순간 양피지가 불타오르고, 그 뜨겁고 강렬한 불꽃이 붉게 물든 오칠의 전신을 뒤덮었다.

 

고통.

 

이 표현할 수도 없는 괴로움을 고통이라고 해야 할까?

 

‘으아~!’

 

오칠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온몸을 불태우고 있는 강렬한 열기에 소리 내어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치고 싶었지만, 처음 양피지를 읽었던 그날처럼 움직일 수도, 크게 소리칠 수도 없었다.

 

‘진짜 죽는다!’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오칠은 요 근래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지금처럼 강렬한 느낌이 든 적은 없었다. 그리고 점점 흐릿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확신했다.

 

이제는 정말 죽는 거구나, 이제는 저승으로 가서 자신을 대신해 죽었던 그 녀석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