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8화
무료소설 파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58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8화
파계 1권 - 8화
“……?”
시간은 흐르고 흘러, 정리되지 않은 책이 몇 권 남지 않았다.
한데, 오칠이 막 내용을 살피려고 집어든 책 사이에서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뭐야?”
집어 들어보니 양피지였다.
양피지는 양의 가죽을 씻어 늘인 다음 석회로 처리하여 건조 표백한 종이였다. 하나, 아주 오래전 과거에 종이로 쓰였다는 것이고,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도 않는 것이었다.
“…….”
한데, 양피지를 집어든 오칠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뭔가에 잔뜩 현혹된 듯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미인이라도 본 듯한 몽롱한 표정이었다.
“아!”
오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여전히 양피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왜?
오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이것은 내 것이라는 듯, 절대 남에게 보일 수 없다는 엄청난 소유욕이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있었다.
“이 글은… 페르시아어네?”
양피지에는 붉은색으로 한자와는 다른 종류의 글이 쓰여 있었는데, 과거 우연하게 공부한 적이 있던 페르시아어였다.
페르시아어는 티무르 제국이 지배하는 곳의 민족 언어인데, 부친을 따라 집에 온 사신과의 만남을 통해 흥미가 생겨 공부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헌이나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아 금세 포기해야만 했던 언어였다.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할 텐데…….”
오칠은 혹시나 싶어 양피지가 꽂혀 있던 책을 살펴보았다.
하나, 책은 보살의 심지(心地)가 전개되어가는 모양과 대승계를 설명한 범망경(梵網經)일 뿐, 페르시아어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었다.
“꼭 해석해봐야겠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몰랐다.
그저 눈을 뗄 수 없고, 손에서 놓기도 싫은 이 양피지에 쓰인 글이 무슨 내용인지 알고 싶었다.
오칠은 나머지 책들을 서둘러 정리하고서 서각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많은 경전이 있었고, 기타 참고할 서적이 많다고 했다. 근래의 장경각은 무공서의 비중이 더 많아지면서 기타 학문 관련 책들은 거의 모두가 이곳, 외학전으로 옮겨진 것이다.
사실 외학전이 생겨난 것도 그러한 이유와 비슷했다.
무림에서의 위치 때문에 소림사로 찾아드는 사람들은 무림인이 그 절반을 넘었고, 내부 곳곳에서는 무공을 수련하는 무승들의 기합소리로 시끌시끌하니 학승들은 무척 곤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학승들은 숙고 끝에 소림사에서 나와 이곳에 외학전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이거하고, 이것도…….”
역시나 있었다.
십여 권에 불과하지만, 문장을 해석하는 데 아주 요긴하게 쓰일 책들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책들은 황궁서고가 아니라면 구하기가 쉽지 않은 희귀서적일 것이다.
“어디…….”
탁자에 자리를 잡은 오칠은 책들을 뒤적거리며 글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어는 서른세 개의 음절문자(音節文字:단어의 음절을 한 단위로 하여 표기하는 문자)와 세 개의 모음문자(母音文字), 그리고 네 개의 표의문자(表意文字:시각에 의하여 사상을 전달하는 문자)와 각 단어를 나누는 한 개의 기호로 이루어져 있었다.
쉽게 말해서, 참고할 책이 있다 해도 하나의 단어를 해석하는 데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정도로 난해한 작업이라는 말이었다.
“흠… 이건 그러니까 계… 승… 서?”
쾅!
페르시아어로 계승서라는 말을 발음한 순간, 오칠의 머릿속에 커다란 충격이 전해왔다.
‘으…….’
눈이 너무 뜨거워서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다. 온몸이 덜덜 떨리기는 했지만, 밧줄에 꽁꽁 묶인 것처럼 움직일 수도 없었다.
‘온몸이 타들어간다!’
외형적으로 변한 것은 없었지만, 오칠은 그렇게 될 것만 같아 두려웠다.
이대로 죽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뭐지?
한데, 순식간에 뜨거움도 사라지고, 몸도 움직여졌다. 조금 전 그런 일이 있었는지, 자신이 느꼈던 뜨거움이 진짜였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뭐야, 이거?”
이 어이없고, 괴상망측한 현상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귀신에 씌었나?”
오칠은 손에 쥐고 있는 양피지를 집어던지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양피지는 절대 다른 곳에 둘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붉은 글씨가 좀 더 진해진 것 같다.’
왠지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조금 전 자신에게 생겼던 기이한 현상도 있었으니,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치부하기엔 가슴에 남는 뭔가가 너무 강했다. 게다가 저도 모르게 다시 책들을 뒤적이며 양피지의 글귀를 해석하고 있으니, 진짜 귀신에 씌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덜컹!
오칠은 부리나케 양피지를 품에 숨기고 서각의 입구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넌 오칠이 아니냐. 근데 어찌 서각에 있는 것이냐?”
서각에 들어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이는, 명목상 행자승들을 책임지고 있는 담려였다.
“혹시 이곳에서 밤을 샌 것이냐?”
담려는 바닥에 떨어진 모포를 보며 짐작한 것이고, 오칠은 숨길 이유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담목 스님께서 시키신 일 때문에 그리되었습니다.”
담려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무슨 일을 말이냐?”
“어제 들어온 서적들을 종류와 내용에 맞게 정리해놓으라 하셨습니다.”
“그 일을 네게 시켰단 말이냐?”
“예. 다행히도 조금 전에 끝낼 수 있습니다.”
“끝냈어? 그 많은 책을?”
담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오칠의 말을 믿기가 힘이 든다는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알기로 어제 들어온 책은 그 숫자만 해도 칠백 권이 넘었고, 그래서 오늘 그 말고 몇 사람이 같이 정리하려 할 정도로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기 기록한 목록서가 있습니다.”
담려는 오칠에게서 받은 목록서를 들고서 책장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모든 책들이 종류에 맞게, 내용에 맞게 아주 훌륭히 정리가 되었음을 알고 내심 크게 놀랐다.
‘뭔가 큰 충격을 받고 기억을 잃었다고 하더니, 과거가 심상치 않은 아이로군.’
책의 숫자가 많기는 하지만, 담려 자신도 충분히 정리할 수는 있었다.
하나, 하루의 시간을 주고 하라고 한다면 이리 꼼꼼하게 할 자신은 없었다. 그만큼 이러한 서적의 내용을 쉽게 구분하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이다.
덜컹!
오칠과 뭔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어보아야겠다 생각하던 담려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는 얼굴에 분노한 기색을 띠었다.
“담목,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막 안으로 들어선 담목은 잠깐 멈칫한 기색을 보이더니 왜 그러나? 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너무나 뻔히 보이는 표정이라 누구나 그 속내를 꿰뚫어볼 수 있을 정도로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이 아이에게 어제 들어온 책들의 정리를 맡겼더군. 어찌 그리 무책임한 짓을 하였는가.”
“어허, 무책임한 짓이라니. 자네 말이 너무 심하구만.”
“이 추운 겨울에 열기 하나 없는 서각에서 이 어린아이를 밤새 떨게 한 것이 그럼 잘한 일이란 말인가!”
“밤을 새? 이런, 이런, 누가 네게 밤을 새서 하라 하였느냐. 안되겠다 싶으면 방에 들어가서 잘 것이지.”
시치미를 뚝 떼고 말하는 담목을 보고 있자니 오칠은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하나, 내심으로만 코웃음치고, 겉으로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제가 원래 한 번 맡은 일은 끝까지 하고야마는 못된 성미가 있어 이리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순간, 담목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럼… 정리를 다 끝냈느냐?”
“예, 담목 스님.”
마음 같아서는 통쾌하게 웃어주고 싶었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옆에 있는 담려가 알아서 담목에게 쓴 소리를 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자네 나와 이야기 좀 하세. 넌 그만 방으로 돌아가거라.”
“예, 담려 스님. 그럼 소인은 이만.”
오칠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앞으로의 일이 눈에 선하여 절로 기분이 좋았다.
‘그보다 빨리 이 양피지를 해석해보아야 할 텐데.’
즐거움도 잠시.
서각을 나서는 오칠은 품에 있는 양피지를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다급해졌다. 어서 해석하고 싶다는, 어서 그 뜻을 알고 싶다는 조급함이 이유도 없이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하나,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서각 안에는 담려와 담목이 있고, 조금 뒤면 많은 학승들이 서각을 들락거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런 그들의 앞에서 양피지를 해석할 수도 없는 일.
‘나중에 기회를 봐서 아까 그 책들을 몰래 가져와야겠군.’
그렇게 마음을 먹은 오칠은 걸음을 재게 놀려 승방으로 향했다.
조금 뒤에는 공양을 들고 노승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제5장. 영물? 영초?
뭐야, 이 어둠은?
앞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데도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마치 얼굴에 보자기를 씌운 것처럼 깜깜하고, 답답했다.
빛이다.
저 멀리, 아주 저 멀리서 두 개의 빛이 보였다.
깨알처럼 보이지만 분명 빛이었고, 희한하게도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불이라도 피우나?
걸어갔다. 아니, 달려갔다. 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에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왜 이리 멀어?
달려도 달려도 가까워지지가 않았다. 짜증이 났다. 화가 났다. 그래서 버럭 소리쳤다.
이리 와!
왜 그렇게 소리쳤는지 모르지만, 놀랍게도 그 두 개의 빛이 점점 크게 확대되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말을 이해하고 다가오는 것이리라.
불이 아니었나?
말을 알아들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가는 것도 아닌데 점점 가까워진다는 것은, 저 두 개의 붉은빛이 결코 한곳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
두 개의 붉은빛은 너무나 커져가고 있었다.
얼마나 멀리 있었기에 깨알처럼 보인 것인지 모르지만, 가까워질수록 점점 커져서 두 눈에 담기 어려울 만큼 커져갔다.
으아~!
절로 비명이 나왔다.
두려웠다. 붉은빛은 너무 무서웠다. 뜨겁지도 않고, 형체도 없는 것이었지만, 두려웠다. 저 두 붉은빛에 닿으면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도망쳐야 해!
뒤로 물러났다. 몸을 돌리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으면 붉은빛에 먹혀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붉은빛은 너무나 빨랐다. 뒷덜미로 싸늘한 감촉이 전해져왔다. 무언가 어깨를 움켜잡는 것 같았다. 몸이 위로 들어 올려진다. 다리는 공허하게 허공을 밟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죽기 싫어―! 으아~!
* * *
“으아~!”
벌떡!
오칠은 멍하니 정면을 보았다.
어둠.
주변은 어두웠다. 하지만 조금 전 자신을 공포에 짓눌리게 만들었던 어둠에 비하면 대낮처럼 밝은 어둠이었다.
“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온몸은 땀으로 번들거리고, 심장은 격하게 운동을 한 것처럼 마구 날뛰고 있었다. 꿈이라기에는 지독히도 섬뜩하게 사실적이었다.
‘이제는 일어나지도 않는군.’
좌우에는 행자승들이 머리꼭대기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자고 있었다.
아마도 오칠의 비명소리를 듣고 잠결에 이불을 잡아당긴 것이리라.
오칠이 며칠 동안이나 악몽에 시달리며 비명을 질러대는 것에, 행자승들도 이제는 이력이 난 것이 분명했다.
부스럭.
오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지난 밤 내린 하얀 눈에 뒤덮인 밖으로 나왔다.
아직 어둑한 지금 시간은 인시(寅時:새벽 3~5시) 중순쯤. 악몽을 꾸고부터는 쭉 같은 시간에 일어났으니 틀림없이 그 시간일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정말 왜 이렇게 악몽을 꾸는 걸까.
며칠 동안, 밤이고, 낮이고 잠을 잘 때마다 이런 악몽을 꾸게 되었다.
게다가 매일 같은 내용의 꿈도 아니었다. 이건 매일 밤이 다른 내용의 악몽이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닌가.
요즘은 오칠을 보는 모든 사람이 다 깜짝 놀랄 정도였다. 다른 행자승의 말로는 시체처럼 얼굴이 음침해졌다나. 보고 있으면 섬뜩해질 정도라고 한다.
“이것 때문인가?”
품에 잘 넣어둔 양피지를 꺼내들었다.
서각에서 밤을 새고부터 악몽을 꾸기 시작했으니 가능성이 가장 컸다. 양피지의 내용을 거의 해석해가면서 왠지 악몽의 강도도 점점 높아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왜? 라는 의문에는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기가 허하기 때문이 아닐까?’
기가 허하면 헛것이 보인다고 하질 않는가.
절에 들어오고부터 고기 한 점 먹어보지 못했다.
두 달여를 쭉 나물밥만 먹고 살았더니, 속이 허하여 늘 공복감에 시달렸다.
“그래, 오늘은 배에 기름칠 좀 해야겠다.”
마음을 먹자 그게 가장 큰 목적이 되었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양피지의 내용을 어서 해석해야 한다는 강인한 의지가 치솟고 있었지만, 고기에 대한 욕구도 그에 만만치 않을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한데, 정재소에서 작은 칼 하나를 품에 넣고 나오던 오칠은,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난 정재소 담당 행자승과 마주쳤다.
“어딜 가려는 거냐?”
“노스님께서 산에서 구해오라는 것이 있어 가는 길입니다. 아~ 무얼 찾는지는 묻지 마십시오. 노스님께서 저와 둘만의 비밀이라고 함구하라 하셨습니다. 아마도 조금 늦을 것 같으니 혹여 다른 스님들께서 찾으시면 대충 얼버무려주십시오.”
거짓말이었지만 사냥을 하는 데는 반나절이면 충분하고, 그 정도 시간을 비웠다고 자신을 찾거나, 노승을 찾아갈 중은 없었기에 만들어낸 핑계였다.
“아, 그리고 노스님께 공양 갖다드릴 때 다른 말씀 마십시오. 급하다 하지 않으신 것을 제가 서둘러 구하려고 하는 것이니, 괜한 걱정 하실까 염려되어 그렇습니다.”
거짓말이었지만, 행자승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있는 표정이었다.
사실 믿지 못한다고 해도 오칠에게 뭐라고 할 배짱도 없었다.
“알았다. 산속에 눈이 많이 쌓였으니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걱정 마십시오.”
참으로 순진하기 그지없다 생각하며 오칠은 숲으로 깊숙하게 들어갔다.
‘근처에 어떤 놈들이 살고 있으려나.’
오칠은 차근히 땅을 살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