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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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69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6화
파계 1권 - 6화
제3장. 괴이한 노승
“내가 하죠.”
오칠은 보자기에 싸인 작은 항아리를 행자승의 손에서 받아들었다.
“네가 하지 않아도 돼.”
“한 달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몸도 뻐근하고, 조금쯤은 움직여야겠습니다.”
오칠은 구정을 때려눕히고 나서부터 굼벵이와 다름없이 지내왔다.
오후에 있는 학습 시간 외에는 굳이 해야 할 일이 없었고, 시키는 사람도 없어 승방에서 빈둥거리기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빈둥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한 달간이나 그러고 있었더니 삭신이 다 쑤시고 아플 정도였다. 그래서 아침부터 정재소로 나와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행자승 하나가 어딘가로 공양을 갖다주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오칠이 그 일을 맡겠다고 한 것이다.
“그분은 본사까지 통틀어 가장 배분이 높은 분이니 예를 갖추어야 해.”
오칠에게 맡기는 것이 영 불안한지 정재소 행자승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여 당부했다.
“아~ 알았다니까요.”
오칠은 공양을 넣은 항아리를 들고서 정재소를 나와, 그 배분 높은 노승이 거처로 삼고 있다는 암자를 향해 걸어갔다.
“여~ 잘 하고 있어?”
오칠은 몇 개의 승방을 지나고, 책들이 비치되어 있는 서각을 지나치다가, 서각 입구에서 나오는 구정을 발견하고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예… 예.”
구정은 움츠러든 어깨만큼이나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달 전 이후로 완전 소심해진, 특히나 오칠의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변해버린 구정이었다.
“청소하러 들어가서 땀도 별로 나지 않는 걸 보면, 열심히 하지 않은 거 같은데?”
아무리 열심히 청소를 해도 땀이 잘 나지 않는 추운 겨울이었다.
그러니 오칠의 말은 반 억지와 다름없으나, 때론 그런 말들이 진실을 집어내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아… 아닙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구정은 당황하여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오칠은 코웃음을 치며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고는 구정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행자승이 나중에도 훌륭한 중이 되는 것이 아니겠어? 그러니 열심히 하라고. 아~ 주 열심히 말이야.”
“예… 예, 예!”
“나중에 내가 서각에 한 번 들러볼 것이니 꾀부리지 마.”
오칠은 가볍게 구정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구정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뭔가 오칠을 향해 좋지 않은 의도의 표정을 지었다가 딱 걸린 것이다.
“조심해라.”
오칠은 검지를 앞으로 들어 좌우로 흔들면서 싱긋 웃음을 지었다.
몇 대 두들겨줄 수도 있었지만, 적당한 아량과 함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만으로도 상대를 주눅 들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참는 것이다.
“예, 예!”
구정은 겁먹은 얼굴이 되어 머리를 굽실거렸다.
한 달 전 오칠에게 맞은 것만 생각해도 오금이 저리고, 그날 밤 삐죽하게 깎인 나무꼬챙이에 목젖이 겨누어진 채 들었던 말은 여전히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입만 뻥긋해봐. 쫓겨나더라도 네놈은 꼭 죽이고 갈 테니까.’
당시 오칠의 얼굴엔 누군가를 죽여 본, 그리고 당장이라도 죽일 수 있다는 살기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구정은 그것만으로도 오칠의 무서움을 깨닫고,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담목 스님, 속세의 연으로 따지자면 백부인 그가 묻는 말에도 아무 말 하지 않은 것 역시 오칠에게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보자.”
오칠은 뒤로 손을 흔들고 다시 암자가 있다는 곳으로 움직였다.
노승이 기거하고 있다는 암자는 외학전의 북쪽 한 식경 거리에 있었다.
더구나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어서 길도 나 있지 않고, 숲이 떡하니 막고 있어 초행이라면 찾기가 더욱 쉽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오칠은 그런 암자를 잘도 찾아갔다.
죽은 늙은이한테 추적술을 배운 적이 있어, 아주 미세한 사람의 발자취만으로도 어느 정도 길의 방향을 추적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참 초라하구만.’
오칠은 눈앞에 보이는 암자를 보며 혀를 찼다.
외학전은 그래도 어느 정도 구색이나 맞추어놓은 절이었지만, 지금 오칠의 앞에 세워진 암자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모양새였다.
암자는 중이 임시로 거처하며 도를 닦는 작은 집이었다.
한 사람, 혹은 두세 사람이 기거한다고는 하지만 큰 절에 속하는 작은 절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암자는 외지고, 높은 곳에 지어졌어도, 그 기반이나 모양새를 더욱 꼼꼼하고, 단단하게 짓는 것이 기본이었다. 위치가 위치이니만치 쉽게 무너지지 않고, 수련을 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곳은 그 모양새에 꽤나 정성을 쏟는 곳도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주위의 경관과 어울리는, 시각적으로 매우 멋스러워서 돈 많고, 권력 있는 이들이 휴양을 목적으로 찾아올 정도였다.
‘그런데…….’
이놈의 암자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주위 풍광이나 산세는 그럴듯하기 그지없는데, 통나무로 대충 집의 모양새나 갖춘 암자의 형태는 너무도 이질적이라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소림사까지 포함하여 가장 배분이 높다고 했는데, 거처가 이 모양이니, 그 인지도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물인지 빤히 보이는 듯했다. 한마디로, 나이만 처먹은 늙은 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퉁! 퉁! 퉁!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없네.”
‘밥만 두고 갈까?’
하지만 노승을 찾아 직접 전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돌아가서 마땅히 할 일도 없었으니까.
“어디 보자…….”
딱딱하게 얼어 있는 땅이라 자국이 잘 남지 않지만, 그런 만큼 티가 더욱 잘 나는 법이다.
그래서 오칠은 세심하게 땅을 살피며 가장 최근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이상하네.’
노승이라 했으니, 그 걸음걸이가 시원치 않고, 불규칙하여 찾기가 더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희한하게도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분명 흔적은 많은데 그놈이 그놈 같고, 이놈이 이놈같이 죄다 비슷비슷한 깊이와 거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무공고수일까?
그런 생각이 오칠의 머릿속을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나이가 많은 중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일정한 깊이와 거리로 걷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아무나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소림 최고 배분이라 하면, 전 무림에서도 최고 배분이라 할 수 있잖아!’
그런 사람이 무공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정재소 행자승이 예를 갖추라며 몇 번이나 당부하던 표정엔 더할 수 없는 존경심이 그득하지 않았던가.
‘이거야!’
암담하게 어두워만 가던 절간 생활에 서광이 비추는 것 같았다.
오칠은 대충 시간만 때우다 날이 풀리면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림사가 아니니, 더욱 빠져나가기 좋아졌다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횡재가 난데없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확인부터 해보자!’
이것 또한 망상에 불과할 수 있었다.
얼굴을 보고, 혹은 그 실력을 확인해본 연후에 따져도 늦지 않았다. 하지만 오칠의 가슴은 벌써부터 기대감에 가득 부풀어 올랐다.
말로만 들어오던 무림의 은거고수, 무림 최고 배분의 고수를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감격스러움이 이마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찾았다!”
저도 모르게 환성이 터져 나왔다.
기대감이 커지면서 집중력이 높아졌기 때문에 찾아낼 수 있었던 흔적이었다.
오칠은 차분하게 그 흔적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섣부르게 가다가 흔적을 놓칠 수도 있고, 소란을 떨어서 그 노승의 심기를 흐트러트릴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히, 아주 조심히 걷고 있었다.
“아!”
갑자기 공간이 넓어진다 싶더니 숲 속에 좌우 오 장여 정도의 공터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한 노승이 멀뚱히 서서 하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분이구나!’
노인이라기엔 조금 훤칠하다 싶은 키.
깎았다기보다 이제는 빠질 때가 되었기에, 털 한 올 보이지 않는 반들반들한 대머리.
가슴 아래까지 길게 자란 흰색 수염.
얼굴 가득 자글자글한 주름.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늙은 중이었지만, 오칠에게는 더할 수 없이 오묘한 모습이었다.
‘이거거든!’
바로 저게 은거고수의 풍모다, 라고 오칠은 생각했다.
자연을 벗 삼아 그 기운을 몸에 담고, 자신을 관조하는 자세.
오칠이 보기에 노승은 바로 그러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너 누구냐?”
문득 고개를 돌린 노승이 오칠을 빤히 바라보다 툭 내던진 말이었다.
고수치고는 너무 늦게 반응했고, 그 목소리도 그리 중후한 맛이 없었지만, 오칠은 아주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행자승 오칠입니다.”
“그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비구니인 줄 알겠다.”
“…….”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여색을 멀리해라. 네놈 얼굴을 보니 여자가 줄을 잇게 생겼어. 자고로 음행은 우리의 청정한 본성을 탐욕의 굴레로 얽어매고, 가리게 하는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모든 생사윤회의 세계가 전개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음행을 하지 말 것을 거듭거듭 강조하셨다.”
실제로는 아니지만, 어쨌든 중이 되겠다는 행자승에게 여색을 멀리하라는 말이 맞는 충고이기는 한 것일까?
약간 의아하기는 했지만, 오칠은 노승의 말을 얼굴값 하다가 신세 망친다, 정도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밥 가져왔니?”
“예.”
“이리 가져와.”
오칠은 노승의 앞으로 다가가 항아리를 공손하게 내밀었다.
노승은 작은 항아리를 받아서 보자기를 풀고 안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밥에 그 나물이군.”
아~ 심오한 말이다! 라고 오칠은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없고, 웃기는 말이었지만, 지금의 오칠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저 노승이 진짜 은거고수일 거야! 라는 생각에 점점 깊이 빠져들고 있을 뿐이었다.
쩝쩝! 우적우적!
노승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밥을 먹었다.
밥과 나물이 항아리 속에 잘 갈무리된 것을 나무수저로 이리저리 뒤적인 뒤에 한 수저씩 천천히 먹는 것이다.
하지만 천천히 먹으면서도 음식을 씹는 소리는 참으로 크고 경박했다. 절의 식사란 침묵하듯 조용하기 그지없는데, 그러한 모습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다.
하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소탈하다 할 수 있었다. 대범하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가 가득했다.
지금의 오칠은 그렇게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꺼억! 잘 먹었다!”
족히 한 식경은 넘었을 것이다.
이 추운 겨울에, 그것도 밖에서, 그것도 항아리를 들고 서서 먹는다는 것이 어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던가. 그러나 노승은 그렇게 했고, 허리에 차고 있는 호리병 속의 무언가를 한 모금 들이켜며 트림까지 시원스럽게 터트렸다.
털썩!
“……!”
갑자기 노승이 바닥에 드러누워버렸다.
그리고 눈까지 감아버렸다.
밥을 먹고 바로 눕다니! 그것도 이 차가운 겨울에!
‘고수다!’
내공의 경지가 화경에 달하면 한서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했다.
오칠은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노승이 무공고수라는, 은거고수라는 생각에 더욱 확신을 더해가고 있었다.
“한 중이 숲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노승이 입을 열어 말을 했다.
오칠에게 해주려는 말일까?
노승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어서 그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오칠은 가만히 서서 노승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좌선을 하던 중은 허기가 져서 가져온 밥을 꺼냈는데, 원숭이 한 마리가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해서 중은 원숭이에게 밥을 주었고, 그렇게 몇 날 며칠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한데, 어느 날 중은 밥을 싸오는 걸 잊어먹고 그냥 오게 되었다. 그리고 여지없이 원숭이가 다가오는데, 밥을 가져오지 않았으니 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원숭이가 그것을 알 리가 있나. 중이 고의로 주지 않는다, 생각했는지 옷까지 들추기 시작했다. 중은 그런 원숭이가 귀찮아졌고, 손을 휘저어 쫓아내려 했지만, 원숭이는 쉬이 포기하지 않았고, 그래서 주변에 있던 나무막대기를 집어 원숭이에게 던졌는데, 그만 나무막대기에 맞아 원숭이가 죽고 말았다.”
갑자기 노승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그리고 누운 채로 고개만 돌려서는 오칠을 보았다.